국역/표점
  • 국역/표점
  • 국역
  • 금성삼고(錦城三稿)
  • 금봉습고
  • 부제학 학봉 김성일에게 올린 편지(上鶴峰金副題提學誠一書)

금성삼고(錦城三稿) / 금봉습고

자료ID HIKS_OB_F9008-01-240502.0004.TXT.0006
부제학 학봉주 79) 김성일에게 올린 편지
성주주 80)께서 왜국에 사신의 임무를 받드신 뒤로 마음이 온통 걱정스러워 일찍이 먹고 쉬는 사이에도 감히 잊지 못하였는데, 지금 들으니 거센 파도를 잘 건너시고, 또 사신의 임무를 잘 처리하고주 81) 돌아와서 임금의 은혜에 감응하고 임금의 은총과 영광을 받으셨더군요. 이는 실로 정성이 금석(金石)을 뚫고 신물(神物)이 호위한 바이니, 변변찮은 저는 공경히 박수를 보낼 뿐 어찌 말로 형용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행실이 신명(神明)을 저버려서 이런 기이한 화를 만나 칠십이 되신 늙은 아버지와 떨어져 삼천리 밖에 유배되었습니다. 불효의 죄는 스스로 속죄할 길이 없고, 엎어지고 고꾸라지는 고통은 거의 견딜 수 없을 지경이라 겨우 죽음만 모면했으니 다른 일이야 어찌 말씀 드리겠습니까. 믿을 것은 하늘의 태양 같은 임금의 밝고 밝음이 엎어진 항아리의 속의 어둠주 82)을 비추어 주시는 일 뿐입니다.
별지(別紙)에 적은 슬픔과 간절함은 오로지 사랑으로 돌봐주시는 마음을 믿고 사사로이 품고 있던 생각을 솔직하게 토로한 것이니, 한 번 보시고 불에 태워 다른 이들의 눈에 뜨이지 않게 해주십시오. 언제쯤 다시 빛나는 모습을 뵐 수 있겠습니까? 이 답답한 마음을 드러내고 나니, 다만 더욱 목이 메일 뿐입니다.


별지
기축(己丑 1589)년 겨울에 있었던 일주 83)을 생각하니 여섯 부자(父子)주 84)가 함께 중대한 옥사로 모함을 받을 적에 예부터 알고 지내던 친구들은 한마디 말도 위로해준 적이 없었으나 오직 우리 성주께서 편지를 내려 위로해주셨고, 우리 일가족이 온전히 목숨을 보전하게 되기에 이르자 그것을 효성이 응한 소치로 돌리셨으니, 군자의 마음이 평탄하거나 어려움에 따라 지조를 바꾸지 않은 점에 삼가 탄복하고, 또한 보잘것없는 제가 어찌 성주의 지우를 입어 이와 같기에 이르렀는지 감탄하였습니다.
스스로 도깨비나 살 것 같은 시골에 들어가 흙집에서 흙덩이처럼 엎드려 살면서 예전의 잘못들을 들추어보니, 대체로 평생의 제 행실은 단지 선(善)을 좋아하나 밝게 분별하지 못하고, 악을 싫어하나 미워함이 지나치게 심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 소인배들이 농간을 부리고 말을 만들어내며 기회를 엿보아 모함에 빠지게 하여 그 재앙이 장차 친족을 모조리 죽일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게다가 남쪽 지방 선비들의 습속이 괴팍하고 심술이 그르다고 알려져 여우와 쥐새끼주 85) 같은 무리가 우르르 모여 벼룩이 호랑이나 표범에 달라붙은 형세를 이루어 위로는 사대부로부터 아래로는 벼슬하지 않은 선비까지 모조리 일망타진하려는 계책을 세웠거늘, 성상께서 위에서 해와 달과 같은 빛으로주 86) 보이지 않는 곳까지 통촉하시어 감히 그 흉악한 생각을 제멋대로 하지 못하게 하셨으니, 이는 종사(宗社)의 복이요, 사림(士林)의 행운입니다.
아! 정적(鄭賊)주 87)은 애초에 마을 입구를 막고 사람을 겁박하는 도둑이 아니라 진실로 고상한 말로 사람을 속이는 간신입니다. 그러므로 당시 박학다식하여 사물의 이치에 막힘이 없다는 명목으로 세상에 명성을 떨쳤고 벼슬이 청요직에 이르렀으니, 비록 지혜로운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의 숨겨진 흉악함과 간특함을 미리 알아채지 못하였거늘, 하물며 저와 같이 어둡고 아둔한 자야 어찌 그 사람이 거짓을 꾸며 온 세상을 속일 줄 알았겠습니까.
예전 도성에서 노닐 적에 율곡 선생께서 일찍이 저희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남쪽 지방에서 학문하는 선비 중에 정철이 최고다."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평소 선을 좋아하는 마음으로 일찍이 그 사람됨을 보고 싶어서 을유(乙酉 1585)년 봄에 어버이를 뵈러 도성에 올라갔다가 비로소 한번 만나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하는 말을 들어보니 과장되고 허황되었으며, 급기야 경연(經筵)에서 율곡 선생을 매우 심하게 공격하였다는 말을 듣고는 일찍이 형제간에 말하기를 "오랜 친구를 버리지 않는 것은 옛 사람도 경계한 일주 88)인데 빛과 어둠처럼 서로 등지게 되었으니 어찌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라고 하였습니다. 마음으로 그를 매우 의심하였기 때문에 왕래하고 지나면서 일찍이 한 번도 그 문에 이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병술(丙戌 1586)년 사이에 쇠약한 가문에 괴이한 변고가 있고 의론이 분분할 때 정적이 상도(上道)주 89)에 있으면서 시비를 주장하므로 도성에서 돌아오는 길에 과연 한 통의 편지를 써서 그 일의 전말을 논하였을 뿐이니, 어찌 받들어 존중하는 뜻이 있었겠습니까.
성주께서 나주에 계실 때 일찍이 정적의 심술을 논하였는데 제가 추종하여 그의 단점을 지적했던 일이 또한 많았습니다. 결국 한 번 얼굴을 보고 한 번 편지를 보낸 일로 마침내 큰 재앙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이는 실로 운명이 기구해서이니 어쩌겠습니까. 이 한 몸의 길흉화복은 마땅히 하늘의 뜻을 따르겠지만, 다만 연로하신 아버지의 노년을 생각하면 밤낮으로 통곡하게 될 것이니 자식 된 입장으로 마땅히 어떤 마음이 일어나겠습니까?
대개 겸허하고 선을 좋아하는 선비 중에 세상을 속이는 사람에게 연루되어 큰 참화를 입은 사람이 많으니, 조정에 어찌 그 원통함을 마음으로 아파하고 한랑(寒朗)주 90)처럼 다스려 풀어주고자 하는 사람이 없겠습니까? 그러나 속으로 이해를 따지는 마음이 있고 겉으로 행적을 의심하여 그러한 일을 좌시하며 감히 한마디 말을 꺼내 구원하지 않으니, 자신을 보호하는 방법으로 비록 소득이 있는듯하나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정성은 아마도 이와 같지 않을 것입니다.
오직 성주께서 얼굴빛을 바르게 하고 조정에 서서 정성은 천지를 감동시키고 믿음은 신명과 통하여 이해와 행적을 초월하고 한결같이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으신다면 반드시 깊은 원한을 밝혀 씻어주어야 하는 책임을 갖고 한랑으로 하여금 앞시대의 아름다움을 독차지 하지 못하게 할 것을 생각하실 터인데,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성주께서도 이렇게 생각하시는지요? 곁에서 듣기로 조정에서 관대한 법을 적용하고 성스러운 덕이 또한 날로 새로워진다고 하니 이것은 참으로 깊은 원한을 밝혀 씻을 수 있는 한 번의 큰 기회입니다. 원컨대 성주께서는 깊이 헤아리시고 빠르게 도모하소서. 서애 유성룡 상공(相公)께서 조사하여 국문하시는 것이 공평하고 분명하여 잘 처리되어 석방된 자 또한 많으니 모든 사람들이 모두 감복하고 민심이 기대하고 있습니다. 사도(斯道)를 붙들고 나라의 명맥을 연장하는 책무를 더욱 사양하셔서는 안 됩니다. 원컨대 성주께서 협력하여 세상에 없던 공적을 도모하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주석 79)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 1538~1593)로,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사순(士純), 호는 학봉(鶴峯),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1568년 증광시 병과에 급제하였다. 1577년 사은사(謝恩使)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를 다녀왔다. 경상 우도 병마절도사ㆍ초유사ㆍ경상 우도 관찰사ㆍ순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로 《학봉집(鶴峯集)》 등이 있다.
주석 80)성주(城主)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을 가리킨다.
주석 81)사신의 임무를 잘 처리하고
원문의 '전대(專對)'는 외국에 사신으로 나가서 독자적으로 응대하며 일을 잘 처리하는 것을 말한다. 《논어》 〈자로(子路)〉에 "시경 삼백 편을 외우면서도 정치를 맡겼을 때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사방으로 사신 가서 혼자서 처결하지 못한다면 비록 많이 외운다 한들 어디에 쓰겠는가.〔誦詩三百, 授之以政, 不達, 使於四方, 不能專對, 雖多, 亦奚以爲.〕"라는 말이 보인다.
주석 82)엎어져서 …… 속까지
원문의 '복분(覆盆)'은 태양이 밝아도 땅에 엎어 놓은 동이 속에는 태양빛이 미치지 못한다는 뜻인데, 억울한 사정을 윗사람이 몰라준다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포박자(抱朴子)》 〈변문(辨問)〉에 "해와 달도 비치지 못하는 곳이 있고, 성인도 알지 못하는 것이 있다. 그러나 어찌 이 때문에 성인이 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며 천하에 신선이 없다고 하겠는가. 이것은 바로 삼광이 엎어 놓은 동이 안을 비추지 못한다고 책망하는 격이다.[日月有所不照, 聖人有所不知. 豈可以聖人所不爲, 便云天下無仙. 是責三光不照覆盆之內也.]"라고 하였다.
주석 83)기축년(1589) 겨울에 있었던 일
기축옥사. 1589년(선조22)에 일어났으며,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을 계기로 동인이 서인의 박해를 받은 옥사를 말한다.
주석 84)여섯 부자(六父子)
아버지 나사침(羅士忱), 첫째 나덕명, 둘째 나덕준(羅德峻), 셋째 나덕윤(羅德潤), 넷째 나덕현(羅德顯), 다섯째 나덕신(羅德愼), 여섯째 나덕헌(羅德憲)을 지칭하는 말이다.
주석 85)여우와 쥐새끼
원문의 '호서(狐鼠)'는 여우와 쥐를 이른다. 본래는 사람이 함부로 손댈 수 없는 '성안에 사는 여우와 사당에 사는 쥐[城狐社鼠]'라는 고어(古語)에서 온 말로, 흔히 임금 곁에서 알랑거리는 간소배(奸小輩)에 비유된다.
주석 86)해와 달과 같은 빛으로
원문의 '이명(离明)'은 곧 일월(日月)의 밝음을 말한 것으로, 임금의 총명을 가리킨다. 《주역(周易)》 〈이괘 상(象)〉에는 "밝은 것 둘이 이를 만드니, 대인이 그것을 인하여 밝음을 이어서 사방에 비추니라.[明兩作離 大人以 繼明 照于四方]" 하였다.
주석 87)정적(鄭賊)
기축옥사를 이끌었던 정철(鄭澈)을 말한다.
주석 88)오랜 …… 경계한 일
《論語》의 〈泰伯〉에 나오는 말로 "군자가 친족에게 두터이 하면 백성들이 인에 흥기하고 옛 친구를 버리지 않으면 백성들이 투기하지 않는다.〔君子 篤於親, 則民興於仁, 故舊不遺, 則民不偸.〕"고 하였다.
주석 89)상도(上道)
남원(南原)ㆍ순천(順天) 일대의 전라도 동반(東半) 지역을 말한다.
주석 90)한랑(寒朗)
후한(後漢) 때 사람으로 자가 백기(伯奇)이다. 명제 때 초왕(楚王) 유영(劉英)의 역옥이 발생하였는데, 유영의 무리인 안충(顔忠)과 왕평(王平) 등이 함께 역모를 하였다고 끌고 들어간 사람 가운데 수향후(隨鄕侯) 경건(耿建), 낭릉후(郎陵侯) 장신(臧信), 호택후(護澤侯) 등리(鄧鯉), 곡성후(曲成侯) 유건(劉建) 등이 있었다. 한랑은 이때 알자수시어사(謁者守侍御史)로서 이 옥사를 다스렸는데, 함께 다스리는 사람들이 모두들 황제가 몹시 노한 데 겁을 집어먹고서 이들이 역모를 하였다는 내용으로 조서를 꾸몄으나, 한랑만은 이들이 죄가 없다는 것을 알고서 이를 사실대로 말하여 풀려나게끔 하였다. 《後漢書 卷41 寒朗列傳》
上鶴峰金副題提學誠一書
自城主奉使海國, 一心憂虞, 未嘗食息之敢忘, 今聞利涉鯨濤, 又能專對, 歸膺明恩, 受天寵光. 是實誠貫金石, 而神物所拱衛, 區區欽抃, 豈可以言語形容. 某行負神明, 遘此奇禍, 違七十老父, 拘三千里外, 不孝之罪, 無以自贖, 顚沛之苦, 殆不可堪, 僅免一死, 他何足言. 所恃者, 天日昭明, 應照覆盆之幽耳. 別紙悲懇, 專恃愛念之眷, 直討幽蘊之私, 一覽付丙, 毋掛他眼. 安得更接儀光? 訟此幽鬱, 但增嗚咽而已.


別紙
憶在己丑冬, 六父子俱陷重獄, 所識朋舊無一言以慰者, 而惟我城主賜書存撫, 至於保全一家, 歸之於孝感所致, 欽服君子之心不以夷險易操, 而又歎無狀何以見知於明公, 至於如是耶. 自入魑魅之鄕, 塊伏土宇, 抖擻前愆, 大槪平生行己, 只是好善而卞之不明, 惡惡而嫉之太甚, 故群小輩, 作弄造語, 乘機傾陷, 其禍將至赤族之地, 而況又南方士習壞心術誤知見, 群聚狐鼠之輩, 虱附虎彪之勢, 上自搢紳, 下及韋布, 盡爲網打之計, 而聖明在上, 离明燭幽, 不敢恣其胸臆, 是則宗社之福, 士林之幸也. 噫! 鄭賊初非逄州劫人之盜, 而實是高談罔人之奸. 故在當世以博洽鳴世, 而官至淸要, 雖智者, 不能逆探包裝凶慝, 況如生之昏愚, 豈知僞情飾冒, 以誣一世也哉. 在昔遊洛時, 栗谷嘗謂生等曰: "南中學問之士鄭爲最云." 以生平日好善之心, 嘗欲見其爲人, 而乙酉春覲親上洛, 始一見焉. 聽其言論浮誇, 及聞筵中攻栗谷已甚之語, 嘗語兄弟間曰: "不遺故舊, 古人所戒, 幽明相負, 乃至是耶." 心甚疑之, 故往來經過, 未嘗一至其門. 而丙戌間, 衰門怪變, 議論紛紜時, 鄭賊在上道, 主張是非, 故自京歸路, 果爲一書以論其事之顚末而已, 有何推重之意. 城主在羅時, 嘗論此賊之心術, 生之從以短之者, 盖亦多矣. 竟以一面之分一度之書, 而終陷大禍, 是實氣數之奇蹇, 奈何奈何. 一身禍福, 且當聽天, 而只念老父臨年, 日夜號痛, 爲人子者, 當作如何懷抱. 大抵虛恢好善之士, 坐誣欺世之人, 最被慘禍者多矣, 朝廷之上, 豈無心傷其寃, 欲其理出如寒朗者, 內有利害之心, 外爲形跡之疑, 坐視其然, 而不敢出一言以救之, 其於保身之道, 雖似得矣, 愛君憂國之誠, 恐不若是也. 惟明公正色立朝, 誠足以動天地, 信足以通神明, 能超乎利害形跡之外, 而一以愛君憂國爲己任, 則其必思有以昭雪幽寃之責, 而不使寒朗專美於前, 不審明公其亦念及否. 仄聞朝廷用寬典, 聖德又日新, 此正昭雪幽寃之一大機. 願明公深量而亟啚之. 西厓相公按鞫平明, 理出且多, 衆志咸服, 人心屬望, 扶斯道壽國脈之責, 益不可以辭也. 願明公恊贊之, 以圖不世之功, 幸甚幸甚.