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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조판서 홍여순에게 보내는 편지 【1599년 3월】(與洪兵判書 【己亥三月】)
금성삼고(錦城三稿) / 소포유고 / 서(書)
병조판서 홍여순주 191)에게 보내는 편지 【1599년 3월】
예전에 변방에서 한번 뵙고 싶었던 소원을 이루었는데 갑작스러운 거취 때문에 태산북두주 192)의 회포를 아직 풀지 못하였으니 남과 북에서 근래에 삼가 만나고 싶은 마음이 늘 간절하였습니다. 작년 여름 저는 적을 피하여 떠돌아다니다가 한강 가에서 기거하고 있었는데, 병판께서 성에 계신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는 댁으로 찾아뵙고 우러러 사모하는 마음을 보이고 싶었으나 제가 상중이라 감히 최질(衰絰)주 193)의 복장을 보여 놀라게 할 수 없어 객지에서 문을 걸어 닫고 있으며 다만 그리는 마음만 더했습니다. 급기야 적이 물러가 고향으로 돌아오고 나니 산천이 아득히 멀고 현회(顯晦)주 194)의 자취가 달라 가르침을 받을 길이 없으니 어찌하여야 하겠습니까?
저는 지난달 초 담제(禫祭)주 195)를 마치고 몸을 의지할 곳이 없어 선영 아래에 초가삼간을 짓고 삶을 마칠 계획을 세웠습니다. 다만 생각건대 남쪽 지방이 한 번의 병란을 겪고 난 뒤에 물력(物力)이 모두 쓸려나갔으니 천자의 조정주 196)에서 오랫동안 병사를 머물게 하여 우리 호남과 영남을 보호해 줄지 모르겠습니다. 황제의 은혜도 끝이 있을 것이니 비록 오랫동안 주둔하게 한다고 할지라도 천자의 병사를 먹일 군량이 어찌 남아 있겠습니까? 8년간 이어진 병란으로 살아남은 백성은 뼈와 살이 거의 다 없어졌으니 결단코 지탱할 수 없는 형세입니다. 비유하자면 어떤 한 사람이 외진 지역에 살고 있는데 해마다 강도의 침입을 받아 가장과 자제들이 수수방관하며 오직 이웃이 와서 구원해주기를 의지하는 것과 같습니다. 아! 이웃의 정성은 한계가 있으니 도적이 쳐들어오기를 그치지 않는다면 반드시 집안을 망하게 한 뒤에야 그만둘 것건만, 부자와 형제가 서로 마주보고 눈물을 흘리며 "이것은 천명이고 운수이다."라고 말하며 천명과 운수로 돌리고 담장을 수리하거나 활과 칼을 준비하여 견고하게 스스로 방어하는 계책을 세우지 않는 격입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형세가 정녕 이와 같으니 어떻게 하겠습니까? 병력은 천자의 조정에서 오랫동안 빌릴 수 없고 흉악한 도적의 근심은 해마다 없어지지 않을 테니 호남과 영남에 얼마 남지 않은 백성으로 장차 다시 어떻게 하겠습니까? 수자리를 방어하는 장구한 계책은 백성을 보호하는 하나의 일에 불과할 뿐이나 백성을 보호하는 일은 비록 늙은 선비의 진부한 말일지라도 진부(陳腐)한 말속에 스스로 활법(活法)이 있을 것입니다.
생각건대 합하(閤下)께서도 이미 헤아리고 계실 텐데 제가 어찌 감히 번잡한 혀로 지껄이겠습니까? 다만 하늘 끝 아득히 먼 곳에서 숨어 지내며 지금의 일을 눈으로 보고 백성을 괴롭히는 폐단을 고치지 않을 수 없었으니 제가 때때로 집정자(執政者)를 만나면 힘써 간쟁하기를 그치지 않았으나 집정자들은 헤아리지 못합니다. 지난해에도 이와 같았고 올해도 이와 같다면 틀림없이 국가의 명맥이 날로 무너지게 될 것이니, 식견이 있는 자라면 누구인들 길게 탄식하지 않겠습니까?
통제사(統制使)와 감·병·수사(監兵水使)가 여러 아문(衙門)을 다스리고 각각 둔전(屯田)주 197)을 설치하는데 더러는 여염(閭閻)의 보잘 것 없는 사람을 유사(有司)로 삼기도 하고, 더러는 군관 중에 탐욕스럽고 포악한 사람을 차관(差官)으로 삼기도 합니다. 별처럼 많은 주현(州縣)에서 민전(民田) 열 가운데 둔전이 다섯을 차지하는데 통제사의 둔전이요 병·수사(兵水使)의 둔전이라고 합니다. 둔전이라 이름을 붙이면 요역(徭役)이 없고 연호(煙戶)주 198)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백성들이 둔전으로 앞다투어 달려가 바로 하나의 아문(衙門)을 이루면 이른바 차관과 유사의 무리가 흉악한 속셈으로 위복(威福)주 199)을 행사하여 밭을 갈고 파종을 할 때면 마을의 백성을 가노(家奴)처럼 부립니다. 급기야 가을 추수 때가 되면 관아에 납부하는 것은 겨우 10분의 3이나 4이고, 모두 자신을 살찌우는 자본으로 삼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심한 자는 사전(私田)을 가리켜서 둔전이라 하고, 공물과 부세를 모두 폐하고 수확한 허다한 곡식으로 편안하게 누리고 있습니다. 오직 이와 같은 까닭으로 공부(貢賦)와 요역(徭役)을 바치는 백성이 몹시 드물어 수령은 상사(上司)의 위엄에 겁하고, 둔전에 거주하는 백성은 둔전에 감히 손을 대지 못하고 있으며 유사의 권위가 도리어 수령보다 우위에 있으니 이것이 이른바 머리가 도리어 아래에 있다는 것이니, 길게 탄식할 일이라 할만합니다.
지금을 위한 계책은 마땅히 여러 아문의 둔전을 급히 폐지하고 수령으로 하여금 백성을 관장하여 부역을 균등하게 하며, 백성에게 권면하여 힘껏 농사짓기를 힘쓰게 하여 묵은 땅이 없게 하는 것이니 이렇게 하면 백성에게 반드시 남은 곡식이 있을 것입니다. 백성에게 남은 곡식이 있으면 군국(軍國)의 수요에 어떻게 여유가 없겠습니까? 이렇게 지키고 방어한다면 백성은 병란에도 고달파하지 않을 것이고, 이렇게 출정하여 싸운다면 백성은 날카로운 칼날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니 옛날 사람이 손과 발을 가지와 잎에 비유한 것이 과연 이와 같을 것입니다. 지난번에 말씀드린 오랑캐를 방어할 장구한 계책이 바로 이것입니다.
삼가 바라옵건대 합하께서는 특별히 이 뜻을 비변사(備邊司) 여러 회의 중에 발의하시고, 속히 사자를 보내 농사가 시작되기 전에 둔전을 폐하게 하시어 백성으로 하여금 각자의 밭에서 밭 갈게 하고, 수령으로 하여금 부역을 균등하게 하여 국가의 근본을 세워주신다면 천만 다행이겠습니다. 만약 부득이하여 둔전을 반드시 두고자 한다면 조충국(趙充國)의 고사주 200)에 의거하여 관내의 군졸들이 묵은 땅을 얻어 경작하고 파종하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제가 또 시골 사람들의 말을 들으니 둔전의 여러 차관과 유사를 폐지하고 가을 추수를 기다렸다가 밭 1결당 곡식 1섬을 납부하도록 하여 둔전의 곡식을 채우기를 바란다고 합니다. 이는 둔전에 속하지 않는 백성이 계속해서 지나친 요역에 고달파하고 차관과 유사의 침해에 시달리므로 이런 계책이 있는 것입니다.
제가 멀리 초야에 있으나 칠실(漆室)의 근심주 201)이 없을 수 없기에 감히 민간의 고통스러운 상황을 갖추어서 근엄한 위엄을 더럽혔으니, 잘 모르겠습니다만 합하의 뜻에 어떠하신지요? 혹시라도 사람 때문에 그 말까지 폐하지 않아 주신다면주 202) 국가에 큰 다행이요 백성에게도 큰 다행이겠습니다.
- 주석 191)홍여순(洪汝諄)
- 1547~1609. 자는 사신(士信), 본관은 남양(南陽)이다. 임진왜란 중에 북인의 영수 이산해(李山海)와 밀착하여 남인 유성룡(柳成龍) 등을 몰아내고 북인 세력이 정권을 잡는 데 기여하였다. 난후(亂後)에는 병조 판서로서 무반 인사권과 병권을 장악하고, 독자 세력을 구축하여 대북을 영도하면서 남이공(南以恭) 등의 소북과 대립하다가 탄핵을 받아 관직이 삭탈되었다. 복관되어 유영경(柳永慶)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다가 1608년 광해군 즉위 후 또 대간의 탄핵을 받아 진도(珍島)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 주석 192)태산북두
- 원문의 '산두(山斗)'는 태산북두(泰山北斗)의 준말로, 《신당서(新唐書)》 권176 〈한유열전(韓愈列傳)〉에서 그에 대한 찬(贊)에 "한유가 작고한 뒤 그의 말이 크게 행해져, 학자들이 그를 태산북두처럼 우러러 받들었다.[自愈沒, 其言大行, 學者仰之如泰山北斗云.]"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 주석 193)최질(衰絰)
- 최는 4치, 6치짜리 베 헝겊을 왼쪽 가슴에 붙인 것이며, 질은 머리에 두른 띠〔首帶〕와 허리에 두른 띠〔腰帶〕로 상주에 있는 것을 말한다..
- 주석 194)현회(顯晦)
- 드러나거나 가려지는 것으로 세상 사람에게 알려지는 것과 알려지지 아니하는 것을 말한다.
- 주석 195)담제(禫祭)
- 3년의 상기(喪期)가 끝난 뒤 상주가 일상생활로 되돌아가는 것을 고하는 제례 의식이다. 부모상(父母喪)과 죽은 아버지를 대신하여 손자가 지내는 조부상(祖父喪) 및 부상(夫喪)과 처상(妻喪)에만 행한다. 일반적으로 부모상의 경우 대상재(大祥齋)를 치른 뒤 3개월째, 곧 초상을 치른 후 27개월이 되는 달의 정일(丁日) 또는 해일(亥日)을 택하여 지내고, 남편이 죽은 아내를 위하여 지내는 담제는 상후 15개월째 지낸다.
- 주석 196)천자의 조정
- 원문의 '천조(天朝)'는 천자의 조정을 제후국에서 일컫는 말로 여기서는 명나라를 가리킨다.
- 주석 197)둔전(屯田)
- 변경이나 군사요지에 주둔한 군대의 군량을 마련하기 위하여 설치한 토지로, 군인이 직접 경작하는 경우와 농민에게 경작시켜 수확량의 일부를 거두어가는 경우가 있다.
- 주석 198)연호(煙戶)
- 연역(煙役)이라고도 하는데, 민가(民家)의 매 호(戶)마다에 부과하던 여러 가지 부역을 가리킨다.
- 주석 199)위복(威福)
- 벌(罰)과 상(賞)을 뜻한다. 원래는 군주만이 상벌을 행할 수 있는데, 후대에는 집권자가 마음대로 권력을 휘둘러 내치기도 하고 벼슬을 주기도 하는 것을 이른다. 《서경》 〈홍범(洪範)〉에 "오직 군주만이 복을 짓고 오직 군주만이 위엄을 지을 수 있다.〔惟闢作福 惟闢作威〕" 하였다.
- 주석 200)조충국(趙充國)의 고사
- 조충국(趙充國)은 자가 옹손(翁孫)으로 용기와 지략이 있었고 사이(四夷)의 일에 능통하여 한 선제(漢宣帝) 때에 장군에 올랐다. 선제가 흉노의 정황과 얼마의 군사면 방비할 수 있는지 물으니, 조충국은 "병사는 멀리서 헤아리기 어려우니, 금성에 가서 방략(方略)을 세워 올리겠습니다."라고 대답하고서, 금성에 가서 살핀 후에 기병(騎兵)을 없애고 요해처에 보병 수만을 주둔시키자는 취지로 둔전(屯田)의 열두 가지 편리한 점을 아뢰었다. 매번 상주문이 올라오면 선제는 공경들에게 의논케 하였는데, 승상 위상(魏相)이 그 계책을 시행할 만하다고 하니 선제가 따랐다. 《漢書 卷69 趙充國傳》
- 주석 201)칠실(漆室)의 근심
- 춘추 시대 노(魯)나라의 칠실이라는 읍(邑)에 과년한 처녀가 자신이 시집가지 못하는 것은 걱정하지 않고, 임금은 늙고 태자가 어린 것을 걱정하여 기둥에 기대 울자, 이웃집 부인이 비웃으며 "이는 노나라 대부가 할 근심이니 그대가 무슨 상관인가?"라고 하였다. 《列女傳 卷3 漆室女》 이는 분수에 지나친 근심을 뜻하는 말인데, 일반적으로 국사(國事)를 걱정하는 마음을 나타내는 겸사로 쓰인다.
- 주석 202)사람 …… 않는다면
- 《논어》 위령공(衛靈公)에 "군자는 말만으로 사람을 높이지 않고, 사람 때문에 그 말까지 폐하지 않는다.[君子不以言擧人, 不以人廢言.]"고 하였다.
與洪兵判書 【己亥三月】
前於塞上, 始副一識之願, 只緣去留忽迫, 未討山斗之懷, 南北年來, 敬戴常切. 去年夏, 某避賊流轉, 僑寓於漢濱, 傳聞令駕在城, 準擬尋拜門屛, 以酬景慕, 而生持孤時也, 不敢以衰絰冒駭令視, 杜門旅榻, 徒增傾傃. 及其賊退還鄕, 非但川原浩渺, 顯晦殊迹, 披承無路, 奈何奈何? 生前月初, 過了禫事, 寄身無地, 於先墓下, 構草三間, 以爲終焉之計矣. 第念南州一經兵火, 物力如掃, 未知天朝長留戍卒, 以護我湖嶺否乎. 皇恩有終, 雖使屯戍長年, 天兵糧餤, 何以贏了? 兵連八載, 孑遺生靈, 膏骨殆盡, 其勢決不可支也. 比如有一人, 居在僻地, 歲受强盜之侵, 其家長子弟, 束手無措, 唯賴隣人之來救. 噫! 隣人之誠有限, 盜來不止, 則必至於亡家後已. 父子兄弟, 相對涕泣曰: "此天也數也." 歸之於天也數也, 而曾不爲修垣墻備弓劍, 以固自禦之策. 今我國家之勢, 正類是, 焉何者? 兵力不可長借於天朝, 而凶寇之患, 無歲無之, 則以兩南些少餘民, 將復如何? 防戍長策, 無過於保民一事而已, 保民一事, 雖曰老儒陳談, 陳談之中, 自有活法. 想閤下亦已斤兩有的, 生何敢喋喋煩舌? 但屛伏天涯, 目見時事, 病民一弊, 不可不革, 而生時遇執政, 力爭不已, 執政暗於自智, 前年如是, 今年又將如是, 必使國脈日至傷敗, 其在有識, 孰不長吁? 唯統制監兵水使, 調度諸衙門, 各設屯田, 或以閭閻中碌碌者爲有司, 或以軍官之貪虐者爲差官. 星布州縣, 民田之十, 屯田居五, 曰統制使, 曰兵水屯田. 名之曰屯田, 則無徭役無煙戶. 故民爭趨之屯田之所, 便成一衙門, 所謂差官有司之輩, 行胸臆作威福, 當耕種時, 役村氓如家奴, 及其秋來收穀也. 納于公, 僅是十分之三四, 皆以爲肥己之資, 不特此也. 甚者指私田爲屯田, 專廢貢賦, 許多收穀, 晏然享之. 惟其如是, 故貢賦徭役之民甚尠, 而守令劫於上司之威, 屯田處居民, 則不敢下手屯田, 有司之權, 反出於守令之右, 此所謂首顧居下, 可爲長太息處也. 爲今之計, 當急罷諸衙門屯田, 使守令掌其民均賦役, 惟務於勸民力農, 俾無陳土, 則民必有餘穀矣. 民有餘穀, 則其爲軍國之需, 豈不有餘裕哉? 以之爲守禦, 民不苦其兵革, 以之爲征戰, 民不畏其鋒刃, 古人手足枝葉之喩, 果如斯歟. 向所謂防戎長策此也. 伏願閤下, 特以此意, 發議於備邊司諸會之中, 速馳星關, 罷屯田於未農前, 使斯民各田其田, 使守令均其賦役, 以植國本, 千萬幸甚. 屯田如不得已, 而必欲爲之, 則依趙充國古事, 以管下軍卒得陳地耕種可也. 生又聞村巷之言, 願罷屯田諸差官有司, 待秋成, 田一結納穀一石, 以充屯穀云云. 此不屬屯田之民, 苦其徭役之偏. 又困於差官有司之侵, 而有是計也. 生遠在山野, 不能無漆室之憂, 敢具民間疾苦之狀, 以瀆嚴威, 不審閤下之意, 以爲如何? 倘無以人而廢其言, 則國家幸甚, 生民幸甚.