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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칠언고시(七言古詩)
  • 도성으로 돌아가는 형 군문 개를 전송하며(送邢軍門玠還京師)

금성삼고(錦城三稿) / 소포유고 / 칠언고시(七言古詩)

자료ID HIKS_OB_F9008-01-240502.0002.0007.TXT.0003
도성으로 돌아가는 형 군문 개주 94)를 전송하며
황제 이십칠년주 95) 皇帝二十有七載
장군이 무사히 도성으로 돌아가네 將軍無事還京師
소국의 적은 백성을 황제께서 가엽게 여겨 小國寡民帝所憐
갈림길에서 무슨 말 주고자 했나 臨歧欲贈將何詞
우리 조정 이백 년 종묘사직 我朝宗社二百年
예악과 문물은 중화의 의식을 따랐네 禮樂文物遵華儀
황제 은혜 미치는 곳마다 천하가 맑아지니 皇恩隨處寰宇淸
오래도록 태평성대 기약하였네 準擬長占昇平期
지난 임진년 봄 이월을 생각하면 憶昨壬辰春二月
정녕 우리 임금 치세주 96)였네 正是吾君垂拱時
오직 현송주 97) 소리 상서주 98)에 가득한데 唯聞絃誦滿庠序
어지러운 전쟁을 어찌 생각이나 하랴 紛紛兵革何思惟
누가 알랴 섬나라 왜구가 황제의 교화를 막아 誰知島寇梗皇化
우리나라에 참상을 입힐 줄 坐使東域生瘡痍
천 척의 배 하룻밤에 바다를 날듯이 건너니 千艘一夕飛渡海
순식간에 도성에 비바람이 부네 倏忽王城風雨吹
조정은 장자방주 99)처럼 계책 낼 겨를이 없고 廟堂無暇子房籌
전장에는 진평의 기묘한 계책주 100) 미치지 못했네 沙場未及陳平奇
흉악한 칼날이 이르는 곳마다 공이가 뜰만큼 피가 흘러넘치고주 101) 兇鋒到處血漂杵
수많은 마을은 백골로 빈 땅을 메웠네 千村白骨塡空基
백성들은 생사 앞에 말조차 못 하는데 蒼生生死不可言
외로운 군신들은 어디로 가는가 孑孑君臣何所之
만 리 밖 의주에서 〈식미〉주 102)를 읊조리니 萬里龍灣賦式微
눈 내린 변방 달 비친 관문 처량함만 더하네 塞雪關月堪凄悲
우리 왕이 지성으로 황제 마음을 감격시켰으니 吾王至誠感帝衷
어찌 진나라에서 굶던 포서의주 103) 신세에 이르겠는가 豈待秦庭包胥飢
시서를 익힌 노련한 장수가 홀연 단에 오르니 詩書老將忽登壇
범 같은 두상 원숭이 같은 팔 실로 영웅의 자태였네 虎頭猿臂眞英姿
뛰어나고 우뚝한 마음으로 일만 병사를 품었으니 胸襟卓卓藏萬兵
대궐의 파목주 104)이 공이 아니고선 누구이겠는가 禁中頗牧非公誰
칼에 기대면 남산의 백호가 달아나고 倚劍南山走白額
활을 쏘면 장교 아래의 이무기가 놀라네주 105) 彈弓橋下驚蛟螭
황제께서 네가 가서 왜구주 106)를 정벌하고 帝曰汝往征不軌
난을 평정하여 위태로운 조선을 도와라 하셨네 蕩平扶我東藩危
씩씩하게주 107) 삼십 만 병사가 출정하니 桓桓出師三十萬
햇빛에 창을 번쩍거리며 앞다투어 내달렸네 金戈耀日爭奔馳
혁혁한 황제의 위엄이 구주주 108)에 진동하고 赫赫皇威動九州
삼군주 109)의 씩씩한 기상이 오랑캐를 능멸하였네 三軍壯氣凌蠻夷
장막 안의 훌륭한 계책주 110)은 극맹과 같고 嘉猷幕中有劇孟
문 앞에 늘어선 용사들은 모두 범과 곰주 111) 같으니 列戟門前皆虎羆
황소주 112)가 저도 모르게 걸상에서 떨어져 울 터 黃巢不覺下床泣
석륵주 113)이 어찌 감히 금구주 114)를 엿보리 石勒何敢金甌窺
팔 년 요망한 기운을 일시에 걷고 八載妖氛一時捲
유악주 115)에서 신묘한 계책 베풀었네 自是帷幄神謀施
마원처럼 구리 기둥으로주 116) 공을 자랑하지 않고 馬援休誇銅柱功
한유처럼 〈평회서비〉를주 117) 찬술하지 않았지만 韓愈莫撰淮西碑
만백성이 환호하고 머리를 조아려 절하고 萬姓歡呼拜稽首
모두들 요순의 신하 고요와 기와 같다고 하였네 咸曰堯舜臣皐夔
개선하면 응당 두터운 총애 입으리 旋師應荷寵渥優
생각건대 화곤과 부월주 118)로 영화를 더하리라 想見華鉞增榮滋
명성을 어찌 하인들만 알겠는가 聲名豈獨走卒知
큰 공로 역사주 119)에 길이 전하리라 鴻功竹帛傳無虧
이로부터 육로와 수로로 사해가 통하니 自此梯航通四海
온 세상이 다시 화락하고 태평해졌네주 120) 可使一世回雍熙
서생 또한 외람되이 은혜와 교화 속에서 書生亦忝恩化中
춤을 추며 다시 〈청아〉주 121)의 시를 불렀네 舞蹈更唱菁莪詩
생각건대 한 마디 말을 대궐에 아뢰었거늘 思將一言達九重
황제의 조정에서 알고 계시는지 借問皇朝知不知
우리 왕께서 처음부터 그 덕을 잃지 않아 我王初非失其德
늦게까지 정사 살피느라주 122) 걱정이 많으셨네 宵衣丙枕多憂思
훈육이 빈 땅을 침범하자 고공단보가 옮겨 가주 123) 獯鬻侵豳亶父移
이는 사람이 아니라 실로 하늘이 그렇게 한 것이었네 不是人爲天實爲
자연에 따라 성하고 자연에 따라 쇠락하니 自然而盛自然衰
흥망성쇠의 권력을 누가 잡았는가 盛衰權柄其誰持
옛날 요동성에서 오랑캐 기병을 물리쳤으니 伊昔遼城却虜騎
우리나라에 남아가 없다고 말하지 마오 莫道吾國無男兒
남산은 높고 한강은 밝아 南山峨峨漢水明
예로부터 영웅호걸이 여기에서 태어났다네 古來英傑生於玆
흥망 속에 시대가 바뀌고 인사도 변하나 興亡遞代人事變
앞에는 을지문덕이요 뒤에는 김유신이 있네 後有庾信前乙支
더구나 이제 우리 임금께서는 何況如今我主聖
암혈의 현자까지 남김없이 망라하였으니 網羅巖穴賢無遺
어찌 훌륭한 장수와 죽을 각오한 신하 豈無良將志死綏
예리한 병기를 든 강한 병사가 무수히 따르지 않겠는가 利兵勁卒紛相隨
아! 국운이 매우 어지러워 嗟嗟國運極濛厖
부산의 한 번 패배로 병사들이 절로 피폐했거늘 一敗釜山兵自疲
원수의 조정에 무릎 꿇은 자 하나도 없으니 屈膝讎庭無一人
만약 배양하지 않았다면 이와 같겠는가 若非培養能如斯
공께서 돌아가 혹시 이 뜻을 기억하실런지 公歸倘記此意否
천자께서 물으시매 헛된 말이 없으리 天子有問無虛辭
주석 94)형 군문 개
군문은 총독군무아문(總督軍務衙門)의 약칭이다. 명나라 경략(經略) 형개(邢玠, 1540~1612)를 말한다. 형개의 자는 진백(搢伯)이며 호는 곤전(昆田)이다. 1571년(융경5)에 진사가 되어 밀운지현(密雲知縣)ㆍ어사(禦史)ㆍ순무(巡撫) 등을 지냈다. 1597년(만력25)에 풍신수길(豐臣秀吉)이 조선을 침범하자 계요 총독(薊遼總督)으로 파견되어 왜군을 크게 무찔러 병부 상서(兵部尙書)에 이르렀고, 죽은 후 태자태보(太子太保)에 추증되었다. 조선에서는 선무사(宣武祠)라는 사당을 세워 그 공을 기렸다.
주석 95)황제 이십칠년
만력(萬曆) 27년으로 선조 32년, 1599년이다.
주석 96)치세(治世)
원문의 '수공(垂拱)'은 무위지치(無爲之治)를 가리킨다. 《서경》 〈무성(武成)〉에 "옷을 늘어뜨리고 팔짱을 낀 채 가만히 있어도 세상이 잘 다스려진다.[垂拱而天下治]"라고 하였다.
주석 97)현송
옛날 《시경(詩經)》을 배울 적에 거문고와 비파 등 현악기에 맞추어 노래로 불렀는데 이를 현가(絃歌)라고 한다. 그리고 악기의 반주 없이 낭독하는 것을 송(誦)이라고 하는데, 이 둘을 합하여 현송이라고 칭한다. 곧 수업하고 송독하는 것을 말한다.
주석 98)상서
중국 고대의 향교(鄕校) 즉 지방 학교 이름인데 후대에는 학교를 범칭한 말로 쓰인다. 《맹자》 〈양혜왕 상(梁惠王上)〉에 맹자가 양혜왕에게 왕자(王者)의 다스림에 대해 논하면서 이르기를 "상서의 가르침을 삼가서 효제의 의리로써 거듭한다면 머리가 반백이 된 자가 길에서 짐을 등에 지거나 머리에 이지 않을 것입니다.[謹庠序之敎, 申之以孝悌之養, 頒白者不負戴於道路矣.]"라고 하였다.
주석 99)장자방
한(漢)나라의 개국공신 장량(張良)으로, 자방(子房)은 그의 자이다. 장량은 뛰어난 계책을 내어 한 고조(漢高祖)가 천하를 통일하는 데에 큰 공을 세웠으나, 천하가 평정된 뒤에 한 고조가 제(齊)나라 땅 3만 호(戶)를 봉해 주려고 하자 이를 사양하고 유후(留侯)에 봉해지는 것에 만족하였다. 《史記 卷55 留侯世家》
주석 100)진평의 기이한 계책
한(漢)나라 진평(陳平)이 고조(高祖) 유방(劉邦)을 위하여 올린 여섯 가지 기이한 계책을 이른다. 《사기(史記)》 권130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에 진평에 대해 "여섯 가지 기이한 계책을 올리자 제후들이 한나라에 복종하였다.[六奇旣用, 諸侯賓從於漢.]"라고 하였다.
주석 101)공이가 …… 흘러넘치고
《서경(書經)》〈무성(武成)〉의, "피가 흘러 절굿공이가 떠내려갔다.〔血流漂杵〕"라는 표현을 인용한 것이다.
주석 102)〈식미〉
《시경》 〈식미(式微)〉에 "쇠할 대로 쇠했거늘, 어찌 돌아가지 않으리오.[式微式微, 胡不歸.]"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주석 103)진나라에서 굶던 포의서
신포서(申包胥)는 춘추 시대 초(楚)나라 사람으로, 소왕(昭王)의 대부(大夫)를 지냈다. 오자서(伍子胥)가 오(吳)나라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와 초나라 수도 영(郢)을 함락하자, 진(秦)나라의 애공(哀公)에게 7일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울며 구원병을 청하였다. 《史記 卷66 伍子胥列傳》
주석 104)대궐의 파목
문무를 겸비하고 재략(才略)이 탁월한 형개를 뜻하는 말이다. 파목은 전국 시대 조(趙)나라의 명장인 염파(廉頗)와 이목(李牧)을 병칭한 말인데, 당 선종(唐宣宗) 때 한림학사 필함(畢諴)이 강족(羌族)을 격파할 대책을 상세히 올리자, 황제가 "우리 조정의 시종신 중에 염파와 이목 같은 명장이 있을 줄 어떻게 생각이나 했겠는가.〔孰謂頗、牧在吾禁署!〕"라고 하고, 필함을 절도사로 임명해서 공을 세우게 했던 고사가 있다. 《新唐書 卷183 畢諴列傳》
주석 105)칼에 …… 놀라네
원문의 '백액(白額)'은 남산에 사는, 이마가 희고 난폭한 호랑이를 말한다. 중국 삼국 시대 주처(周處)의 고사에서 유래한다. 주처는 젊었을 때 힘이 세고 난폭하여 마을에 해를 끼치고 다녔다. 어느 날 마을의 노인에게 "시절도 좋고 농사도 풍작인데 어찌하여 즐거워하지 않습니까?" 하고 묻자, 노인이 한숨을 쉬며, "세 가지 폐해가 없어지지 않는데 무어 즐겁겠는가?" 하였다. 주처가 그게 무어냐고 묻자, "남산에 있는 이마가 흰 호랑이〔白額虎〕와 장교(長橋) 아래에 사는 이무기와 자네라네." 하였다. 주처는 호랑이를 때려잡고 이무기를 죽였으나, 사람들이 도리어 그를 더욱 두려워하였다. 이후 주처는 열심히 학문을 닦고 자신을 다스려 훌륭한 인물이 되었으며, 진(晉)나라에서 벼슬하여 어사중승(御史中丞)이 되었다. 뒤에 제만년(齊萬年)의 반란에 후퇴하지 않고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晉書 卷58 周處列傳》
주석 106)왜구
원문의 '불궤(不軌)'는 마땅히 좇아야 할 법이나 도리에 벗어났다는 뜻으로, 모반이나 반역을 말하지만 여기서는 왜구를 의미한다. 한(漢)나라 가의(賈誼)의 〈과진론(過秦論)〉에 "비록 교활한 백성이 있더라도 주상을 떠난 마음이 없다면, 불궤(不軌)의 신하가 그 간사한 지혜를 꾸밀 길이 없어서 포란(暴亂)의 간사함이 그쳐집니다.〔雖有狡猾之民 無離上之心 則不軌之臣無以飾其智 而暴亂之奸弭矣〕"라고 하였다.
주석 107)씩씩하게
《시경(詩經)》 〈주송(周頌) 환(桓)〉의 "씩씩한 무왕이여, 그 땅을 보전했도다.[桓桓武王, 保有厥土.]"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주석 108)구주
중국 전역을 지칭하는 말이다. 《상서(尙書)》 〈우공(禹貢)〉에서는 예주(豫州), 청주(靑州), 서주(徐州), 양주(揚州), 형주(荊州), 양주(梁州), 옹주(雍州), 기주(冀州), 연주(兗州)를 '구주'라고 하였다.
주석 109)삼군
제후국의 군사로, 중국 고대 주(周)나라의 군대 편제에서 비롯하였다. '군(軍)'은 군사의 단위로, 다섯 사람이 '오(伍)'가 되고 5오가 '양(兩)'이 되고 4양이 '졸(卒)'이 되고 5졸이 '여(旅)'가 되고 5려가 '사(師)'가 되고 5사가 '군(軍)'이 되므로 1군은 1만 2500명이고 6군은 7만 5000명이 된다. 또한 천자는 6군을 거느리고, 큰 나라는 3군을 거느리고, 작은 나라는 2군을 거느리고, 아주 작은 나라는 1군을 거느린다. 《周禮注疏 卷28 下官 司書》
주석 110)훌륭한 계책
원문의 '가유(嘉猷)'는 나라를 다스리는 훌륭한 계책이라는 뜻으로, 《상서(尙書)》 〈군진(君陳)〉에 "그대에게 훌륭한 계획과 계책이 있거든 들어가 궁중에서 그대 임금에게 아뢰고 그대는 밖에서 거기에 따르라.[爾有嘉謀嘉猷, 則入告爾后于内, 爾乃順之于外.]"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주석 111)범과 곰
원문 '호비(虎羆)'는 《서경》 〈목서(牧誓)〉에 "부디 굳세고 굳세어 범과 같고 비휴와 같으며 곰과 같고 큰곰과 같이 상나라 교외에서 싸워 도망하는 자들을 맞아 공격하여 서토 사람들을 노역하게 하지 말라.[尙桓桓如虎如貔, 如熊如羆于商郊, 弗迓克奔, 以役西土.]"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용감한 장병을 의미한다.
주석 112)황소
820~884. 당나라 말기 반란군의 지도자로 왕선지가 난을 일으키자 그를 따르다가, 왕선지가 죽자 남은 무리를 이끌고 수도 장안(長安)을 점령하여 국호를 '대제(大齊)'라 하였으나, 뒤에 관군에게 패하여 자살하였다. 이 일로 당나라는 망국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주석 113)석륵
274~333. 중국 16국 시대 후조(後趙)의 건국자로, 상당 무향(上黨武鄕) 사람이며 갈족(羯族)이다. 유연(劉淵)에게 투항하여 대장이 되었다가 319년 후조(後趙)를 건국하고 조왕이라 일컬었다.
주석 114)금구
금으로 만든 사발을 말하는데, 흠이 없고 견고하다 하여 강토(疆土)에 비유된다. 양(梁)나라 무제(武帝)가 일찍 일어나 무덕각(武德閣)에 이르러 "나의 국토는 금구와 같아서 하나의 상처도 흠도 없다.[我家國猶若金甌, 無一傷缺.]"라고 말한 데서 유래하였다. 《양서(梁書)》 〈후경열전(侯景列傳)〉
주석 115)유악
본래 대장의 진영에 치는 장막을 이르던 말로 전(轉)하여 임금의 곁에서 나라의 정사(政事)를 늘 함께 의논하는 참모의 뜻을 지니게 되었다. 한 고조(漢高祖)가 천하를 통일하고 나서 "장악(帳幄) 안에서 계책을 운용하여 천 리 밖의 승리를 결단하는 것은 내가 자방(子房)만 못하다."라고 했던 데서 왔다. 《史記 卷55 留侯世家》
주석 116)마원처럼 구리 기둥으로
원문의 '동주(銅柱)'는 구리로 만든 기둥으로 국경을 표시하는 데 사용하였다. 《후한서(後漢書)》 권24 〈마원열전(馬援列傳)〉에 "교남이 모두 평정되었다.[嶠南悉平]"라고 한 내용에 대한 주석에서 《광주기(廣州記)》를 인용하여 "마원이 교지에 이르러 동주를 세워 한나라의 경계로 삼았다.[援到交阯, 立銅柱, 爲漢之極界也.]"라고 하였다.
주석 117)한유처럼 〈평회서비〉에
당나라의 한유(韓愈)가 지은 글로, 헌종(憲宗) 때 회서선위초토처치사(淮西宣慰招討處置使)가 되어 오원제(吳元濟)의 반란을 평정한 재상 배도(裴度)의 공을 으뜸으로 서술하였다. 《古文眞寶後集 平淮西碑》
주석 118)화곤과 부원
원문의 '화월(華鉞)'은 화곤(華袞)과 부월(鈇鉞)의 약칭이다. 여기서는 임금에게 받는 최고의 은총이라는 뜻을 말한다.
주석 119)역사
원문의 '죽백(竹帛)'는 죽소(竹素)과 같은 말로, 글을 대쪽이나 헝겊에 쓴 데에서 연유하여 사서(史書)나 서책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주석 120)화락하고 태평해졌네
원문의 '옹희(雍熙)'는 천하가 잘 다스려져서 화락(和樂)한 모양을 뜻한다. 요순(堯舜) 때의 정치를 찬양하는 말에서 유래한다. 진(晉)나라 장형(張衡)의 〈동경부(東京賦)〉에 "백성들이 부유함을 함께하고, 상하가 그 옹희(雍熙)를 함께 누린다.〔百姓同於饒衍 上下共其雍熙〕"라고 하였다.
주석 121)〈청아〉
〈소아(小雅) 청청자아(菁菁者莪)〉로 인재를 양성함을 노래한 시이다. 《시경》 〈청청자아(菁菁者莪)〉에 "무성하고 무성한 쑥이여, 저 언덕 가운데 있도다.[菁菁者莪 在彼中阿]"라고 하였다.
주석 122)늦게까지 정사 살피느라
원문의 '소의(宵衣)'는 소의간식(宵衣旰食)과 같은 말로, 임금이 새벽에 일어나고 밤늦게 밥을 먹는다는 뜻인데, 정치에 부지런히 힘쓰는 것을 의미하고, 원문의 '병침(丙枕)'은 병야(丙夜 3경(三更))에 잠자리에 든다는 뜻으로 임금이 정사를 살피다가 늦게야 잠자리에 드는 것을 말한다.
주석 123)훈육이 …… 옮겨 가
고공단보(古公亶父)는 주(周) 나라 문왕(文王)의 조부(祖父)이고, 훈육은 고대 북방(北方)의 소수 민족 이름으로 중국을 자주 침범하여 포악한 짓을 일삼았다. 고공단보가 빈(豳) 땅에 살고 있을 때 훈육이 침범하자 사람들은 모두 싸우고자 하였는데, 고공단보는 차마 살상을 할 수 없다 하여 기산(岐山) 아래로 옮겨 가니 빈 땅 사람들이 모두 그를 따라갔다. 이에 비로소 주(周)라는 국호를 정하였다. 《書經 武成》
送邢軍門玠還京師
皇帝二十有七載, 將軍無事還京師.
小國寡民帝所憐, 臨歧欲贈將何詞.
我朝宗社二百年, 禮樂文物遵華儀.
皇恩隨處寰宇淸, 準擬長占昇平期.
憶昨壬辰春二月, 正是吾君垂拱時.
唯聞絃誦滿庠序, 紛紛兵革何思惟.
誰知島寇梗皇化, 坐使東域生瘡痍.
千艘一夕飛渡海, 倏忽王城風雨吹.
廟堂無暇子房籌, 沙場未及陳平奇.
兇鋒到處血漂杵, 千村白骨塡空基.
蒼生生死不可言, 孑孑君臣何所之.
萬里龍灣賦式微, 塞雪關月堪凄悲.
吾王至誠感帝衷, 豈待秦庭包胥飢.
詩書老將忽登壇, 虎頭猿臂眞英姿.
胸襟卓卓藏萬兵, 禁中頗牧非公誰.
倚劍南山走白額, 彈弓橋下驚蛟螭.
帝曰汝往征不軌, 蕩平扶我東藩危.
桓桓出師三十萬, 金戈耀日爭奔馳.
赫赫皇威動九州, 三軍壯氣凌蠻夷.
嘉猷幕中有劇孟, 列戟門前皆虎羆.
黃巢不覺下床泣, 石勒何敢金甌窺.
八載妖氛一時捲, 自是帷幄神謀施.
馬援休誇銅柱功, 韓愈莫撰淮西碑.
萬姓歡呼拜稽首, 咸曰堯舜臣皐夔.
旋師應荷寵渥優, 想見華鉞增榮滋.
聲名豈獨走卒知, 鴻功竹帛傳無虧.
自此梯航通四海, 可使一世回雍熙.
書生亦忝恩化中, 舞蹈更唱菁莪詩.
思將一言達九重, 借問皇朝知不知.
我王初非失其德, 宵衣丙枕多憂思.
獯鬻侵豳亶父移, 不是人爲天實爲.
自然而盛自然衰, 盛衰權柄其誰持.
伊昔遼城却虜騎, 莫道吾國無男兒.
南山峨峨漢水明, 古來英傑生於玆.
興亡遞代人事變, 後有庾信前乙支.
何況如今我主聖, 網羅巖穴賢無遺.
豈無良將志死綏, 利兵勁卒紛相隨.
嗟嗟國運極濛厖, 一敗釜山兵自疲.
屈膝讎庭無一人, 若非培養能如斯.
公歸倘記此意否, 天子有問無虛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