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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성삼고(錦城三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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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문(序)
- 서문(2)(三稿合部序 【二】)
금성삼고(錦城三稿) / 금성삼고 / 서문(序)
서문(2)
말이라는 것은 몸의 문채(文彩)이다.주 18) 행동은 몸에서 드러나기 때문에 말이 문채로써 빛난다. 중앙과 지방에서 직무를 수행할 때 진실로 곡식을 주면서 올바르게 기른다면 글에서도 도(道)를 볼 수 있다. 지금 금성 나씨의 소포·금암·금봉 삼형제의 유묵을 합편한 책을 삼가 세 번 반복해서 읽으니 감탄하고 흠모할 만한 점이 있었다. 세 분은 대개 선조의 빛나는 전통을 이어받고 태어나 생장하는 동안 금호공(錦湖公)께서 독실히 지키는 떳떳한 도리의 전형(典刑)에 몸담고서 눈으로 보고 귀로 들었기 때문에 배우지 않고도 잘할 수가 있었다.주 19) 곽망우(郭忘憂)주 20)의 훌륭한 절조를 마음으로 헤아리니 선조(宣祖)께서 군사에 대해 질문하던 날 추천을 받았고, 곤재 정개청의 정학(正學)을 가슴에 새기니 혹자는 '고명(高明)하여 경외롭다.'라고 칭송하며, 혹자는 '세간의 인물이다.'라고 칭송하였다. 이 때문에 인간의 도리를 행하고 남은 힘으로 한 학문주 21)은 뜻을 펼침에 뿌리가 무성해지고, 글을 지음에 기름을 부어 광채가 나는 것 같았다.주 22) 어둠 속에서 헤아려보아도 덕스럽고 의로운 마음에서 흘러나와 시인과 문사의 구기(口氣)가 아님을 알 수 있으니 참으로 진실하다.
여 시강(呂侍講)주 23)이 "사람이 살아가면서 안으로는 현명한 아버지나 형이 없고, 밖으로는 엄한 스승이나 벗이 없는데도 이룰 수 있는 자는 드물 것이다."라고 한 말과 《맹자(孟子)》에서 "그 시를 외고 그 글을 읽으면서 그 사람을 알지 못한다면 되겠는가?"라고 한 말이 더욱 의미가 있다. 《예기(禮記)》주 24)에서 "선조에게 착한 일이 있는데도 모르면 현명하지 못하고, 알고도 후세에 전하지 않으면 어질지 못하다."라고 하였으니, 주옥같은 문장을 가리고 인도한 두 후손이 전전긍긍함이 있다.
금암의 증손 상사(上舍) 나두동(羅斗冬)이 과거를 그만두고 서책을 읽으며 오직 선조의 일에 책임을 지고 크고 작은 것 가릴 것 없이 반드시 드러낸 뒤에 이윽고 끝마쳤다. 이에 종이주 25)로만 남아 있는 말과 이야기가 날마다 사라질까 두려워 어느새 남은 시문과 침식된 간찰을 대추나무에 판각하여 영원토록 하고, 닥나무 종이로 간행하여 귀하게 한 뒤 내종(內從)인 침랑(寢郞) 정중원에게 서문을 지어주기를 요청하였다.
정중원 군은 본래 가학(家學)이 풍부하고 외손자의 서열로 시종일관 뜻이 크고 기개가 있으며 간절하고 진실하며 곧고 굳어 삼가 그 말이 행동과 일치하였다. 당화(黨禍, 기축옥사)와 도적들의 난[임진왜란]으로 그 글이 거의 다 망실됨을 개탄하였다. 죽은 스승의 원통함을 변론하고 아울러 뭇사람들의 억울함도 신원하며 기축년의 간사한 자들이 기회를 틈타 모함한 상황을 진술하였다. 더욱 격앙된 세 분 상소의 말은 엄정하고 뜻은 정당하여 세도(世道)와 관계되어 귀신도 질정할 수 있으니, 아! 어찌 다만 이것뿐이겠는가?
소포옹께서 선산을 참배한 시와 분발하여 오랑캐를 막자는 계책은 효와 충의 모범이 되어 의리가 신명(神明)을 관통하였고, 금암옹께서 자식을 경계한 글과 금봉옹께서 형님에게 바친 제문은 의방(義方)주 26)과 형제간의 우애에 대한 도(道)가 인륜의 차례를 다하였으니, 큰 솥에 있는 한 점의 고기나 길광(吉光)의 조각 털주 27)임은 말할 것도 없다. 곧 〈촉도난(蜀道難)〉 시처럼 귀신을 울렸고주 28) 강을 건너며 쓴 글처럼 공경대부와 필적할 만하였으니주 29) 삼가 재주가 있을 따름이었다.
우리들의 사업은 문장이나 공명(功名)에 있지 않으니 구구하게 그 사이에서 우열주 30)을 가릴 필요는 없다. 오직 때가 불행하여 일찍 재앙의 그물에 떨어졌고, 결국 낮은 벼슬에 머물러 매우 드러났던 재주와 학문을 한두 가지도 다 펼치지 못하였으니, 이 글을 보는 자 또한 남은 감회가 있을 것이다. 나는 두 사람[나두동·정중원]에 대하여 벗인데도 경외하는 것은 이런 행동이 좋아서이다. 감히 좋지 못한주 31) 한마디 말이라도 빌리려고 하니 대략이나마 만생(晩生)주 32)이 산야에서 생활하고 도를 음미하는 경회(景懷)를 드러낸다.
숭정 후 두 번째 계묘(癸卯 1723)년 10월 상순 여흥(驪興) 민창도(閔昌道)주 33)
- 주석 18)말은이라는 …… 문채(文彩)이다.
- 《사기(史記)》 권39 진세가(晉世家)에 "말은 몸을 꾸미는 것입니다. 장차 몸을 숨기려 하면서 무엇 때문에 꾸미겠습니까. 만약 꾸민다면 이것은 현달하기를 구하는 것입니다.[言, 身之文也. 身將隱, 焉用文之? 是求顯也.]"라는 개지추(介之推)의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 주석 19)선조의 …… 있었다.
- 한유(韓愈)의 〈청하군공방공묘갈명(淸河君公房公墓碣銘)〉에 "공은 선조의 빛나는 전통을 이어받고 태어나 생장하는 동안 언제나 고전의 세계에 몸담고서 항상 눈으로 보고 귀로 들어 왔기 때문에 굳이 배우지 않고도 잘할 수가 있었다.〔公胚胎前光, 生長食息, 不離典訓之內, 目擩耳染, 不學以能.〕"라고 한 표현을 인용하였다.
- 주석 20)곽망우(郭忘憂)
- 곽재우(郭再祐, 1552~1617)를 말한다. 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계수(季綏), 망우당(忘憂堂)은 그의 호이다. 조식의 문인으로, 임진왜란 때 창의하여 공을 세웠다.
- 주석 21)인간의 …… 학문
- 원문은 '행유지학(行餘之學)'으로, 《논어》 〈학이〉에 "공자가 말하기를 '자제가 집에 들어가면 효도하고 밖으로 나오면 공경하며, 행동은 삼가며 말은 믿음 있게 하며, 널리 사람들을 사랑하되 인자한 사람을 친하게 지내야 하니, 이것을 행하고도 여력이 있으면 글을 배워야 한다.'하였다.〔子曰:弟子入則孝,出則弟,謹而信,汎愛衆,而親仁,行有餘力,則以學文.〕"라고 하였다.
- 주석 22)뜻을 …… 같았다.
- 한유(韓愈)의 답이익서(答李翊書)에 "그대가 장차 옛 작가의 경지에 이르려고 한다면, 빨리 이루어지기를 기대해서도 안 될 것이요, 권세와 이익의 유혹에 넘어가서도 안 될 것이다. 우선 그 뿌리를 길러서 열매 맺기를 기다리고, 기름을 부어서 광채가 나기를 기대해야 할 것이니, 뿌리가 무성하게 퍼져야 열매가 여물고 기름을 부어 닦아야 광채가 나는 것이다.〔將蘄至於古之立言者 則無望其速成 無誘於勢利 養其根而竢其實 加其膏而希其光 根之茂者其實遂 膏之沃者其光曄〕"라는 말을 인용하였다.
- 주석 23)여 시강(呂侍講)
- 송나라 때 시강을 지낸 여희철(呂希哲)을 가리킨다.
- 주석 24)《예기(禮記)》
- 원문의 '대기(戴記)'는 《예기(禮記)》의 다른 이름이다. 중국 한나라 때 대성(戴聖)이 편찬한 《예(禮)》 49편의 《소대례(小戴禮)》가 바로 《예기》다. 《소대기(小戴記)》라고도 한다.
- 주석 25)종이
- 원문의 '혁제(赫蹄)'는 혁제(赫蹏)와 같은 말로, 고대에는 글씨를 쓰는 데 썼던 폭이 좁은 비단을 지칭하였는데 후대에 와서는 작고 얇은 종이를 가리킨다.
- 주석 26)의방(義方)
- 원문의 '의방(義方)'를 정도(正道)를 뜻하지만 여기서는 부모가 자식을 가르치는 올바른 도리를 의미한다. 《춘추좌씨전》 은공(隱公) 3년 조에, 위(衛)나라 장공(莊公)의 아들 주우(州吁)가 오만 방자하게 굴자, 현대부(賢大夫) 석작(石碏)이 장공에게 "아들을 사랑한다면 그에게 올바른 도리로 가도록 가르쳐서 잘못된 곳으로 빠져들지 않게 해야 한다.〔愛子, 敎之以義方, 弗納於邪.〕"라고 나온다.
- 주석 27)큰 솥에 …… 조각 털
- 원문의 '대정일련(大鼎一臠)'은 적은 양의 시문이 남았지만 소량의 시문으로 전체를 알 수 있다는 의미이고, '길광편우(吉光片羽)'은 전설상의 신마(神馬)인 길광의 털 조각처럼 남겨진 시문이 우수하다는 것을 비유하고 있다.
- 주석 28)〈촉도난(蜀道難)〉의 …… 울렸고
- 시가 매우 뛰어나 귀신이 보고 탄복하여 울 것이라는 뜻이다. 두보(杜甫)의 〈기이백(寄李白)〉이란 시에서 이백(李白)의 뛰어난 시재(詩才)를 찬탄하여 "붓이 떨어지면 풍우가 놀라고, 시가 이루어지면 귀신이 울었지.[落筆驚風雨 詩成泣鬼神]" 하였다.
- 주석 29)강을 …… 만하였으니
- 백거이의 〈곡황보칠낭중식(哭皇甫七郞中湜)〉 "강을 건너며 쓴 글월 한수는 곧 공경대부의 글에 필적할만하네.〔涉江文一首, 便可敵公卿.〕"라는 말을 인용하였다.
- 주석 30)우열
- 원문의 '헌지(軒輊)'는 고저(高低)ㆍ경중(輕重)ㆍ우열(優劣)을 의미한다. 수레가 앞이 높고 뒤가 낮은 것을 헌(軒)이라 하고, 수레가 앞이 낮고 뒤가 높은 것을 지(輊)라고 한다.
- 주석 31)좋지 못한
- 원문의 '부전(不腆)'은 좋지 않다는 뜻으로, 자기의 글재주에 대한 겸사이다.
- 주석 32)만생(晩生)
- 후배가 선배에 대한 자신의 겸사(謙辭)로 쓰는 말이다.
- 주석 33)민창도(閔昌道)
- 1654~1725. 자는 사회(士會), 호는 화은(化隱)이다. 1678년 증광 문과(增廣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고 이듬해 문과 중시(重試)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1693년(숙종19)에 대사성(大司成)에까지 올랐다가 1722년(경종2) 신임사화(辛壬士禍)로 장수(長壽)에 유배되었다. 문장과 글씨에 능하였다.
三稿合部序 【二】
言者, 身之文也. 行著於身, 故言炳以文. 揆元都卒, 亶在穀貽而正養, 可以卽辭而觀道. 迺今於錦城羅氏嘯浦錦巖錦峰伯仲叔遺墨合編也, 竊有所三復而歎仰者. 盖其胚胎前光, 生長食息, 不離於錦湖公篤守天經之典刑, 耳濡目梁, 不學而能. 其推衿於郭忘憂之偉節, 被其薦剡於穆陵問帥之日, 鏤膺於鄭困齋之正學, 或稱高明可畏, 或稱間世人物. 是以行餘之學, 根茂於宣志, 膏沃於屬辭. 暗中模索, 知其流出於德肚義腸中, 非詩人文士口氣, 忱哉! 呂侍講所謂人生內無賢父兄, 外無嚴師友, 能有成者鮮矣, 與夫鄒傳所謂誦其詩讀其書, 不知其人可乎之益有味也. 若戴記所謂先祖有善而不知, 不明也, 知而不傳, 不仁也, 則有兢兢乎揀珠導玉之二裔子. 錦巖曾孫上舍斗冬, 廢擧讀書, 唯先事是任無鉅細, 必宣著後已末. 乃懼話言之寄赫蹄者, 日就陻沒, 居然使殘篇囓簡, 壽之棗而貴之楮, 要內從鄭寢郞重元弁其端. 鄭君素富家學, 以自出序列, 始卒以倜儻懇實貞確, 欽其言如其行. 以黨禍寇難, 慨其文之亡失殆盡. 以爲亡師訟寃, 兼伸群枉, 備陳己丑奸人乘機陷害狀. 益激昻, 其鼎峙三疏, 辭嚴意正, 世道所關, 神理可質, 噫噫! 豈但是哉. 浦翁拜先壟詩, 勵志禦戎策, 孝範忠模, 義貫神明, 巖翁誡子文, 峰翁祭兄文, 義方友悌, 道盡倫類, 亡論大鼎一臠吉光片羽. 卽蜀道詩之泣鬼神, 過江文之敵公卿, 祗藝焉耳. 吾人事業, 不在文章功名, 不必區區軒輊其間. 唯時不幸, 早墜禍網, 終沈下僚, 使競爽才學, 皆不克展其一二, 覽斯文者, 其亦有餘感也. 余於二君, 友而畏之, 則悅是擧也. 敢藉手不腆一言, 粗效晩生餐風味道之景懷焉.
崇禎後再癸卯十月上浣驪興閔昌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