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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문(1)(三稿合部序 【一】)

금성삼고(錦城三稿) / 금성삼고 / 서문(序)

자료ID HIKS_OB_F9008-01-240502.0001.0001.TXT.0001
서문(1)
금성 나씨(錦城羅氏)의 가숙(家塾)주 1)에서 새로 간행한 《소포유고(嘯浦遺稿)》에 금암(錦巖)주 2)과 금봉(錦峰)주 3)의 약간의 유고를 덧붙여 한 부로 합편하였으니, 금암의 증손 상사(上舍) 나두동(羅斗冬)주 4) 씨가 실로 수집한 것이다. 소포(嘯浦)주 5)의 현손 나만운(羅晩運)과 금봉의 증손 나두흥(羅斗興)이 그와 함께 오래도록 전해지기를 도모하고는 소백산(小白山) 아래로 편지를 보내어 나주 6)에게 서문을 부탁하였다. 나주(羅州)는 내가 태어난 곳이고, 금암은 내 선비(先妣)의 할아버지이니 내가 이에 어찌 감격하지 않겠는가? 그러니 장차 행여 글재주가 없다고 바로 사양하여 그만둘 수 있겠는가?
생각건대 외고조 금호공(錦湖公)주 7)은 행실로 이름이 났고, 그의 장자 휘 덕명(德明)은 자가 극지(克之)로 금오랑(金吾郞) 벼슬에 나아갔다가 곧바로 그만두고 호수나 바다를 방랑하였으니 뛰어나고 걸출한 사람이었다. 이분이 소포이다. 차남의 휘는 덕준(德俊)이고 자는 대지(大之)이며 벼슬은 지현(知縣)이었다. 셋째의 휘는 덕윤(德潤)이고 자는 유지(有之) 또는 성지(誠之)이며 벼슬은 전중(殿中)이었다. 모두 곤재(困齋) 정개청(鄭介淸)주 8)의 제자가 되어 독실히 배우고 힘써 행하였다. 금암과 금봉은 그들의 호이다.
소포는 시격이 매우 빼어나서 당세에 명성이 있었으나 지금 남아 있는 시는 단지 고율(古律)·절구(絶句)·근체(近體)·장편 총 50여 수와 부(賦) 2편, 서(書) 3편, 소(疏) 1편뿐이다. 금암과 금봉은 사문(斯文)을 강론하고 연마하여 저술한 글이 마땅히 또한 적지 않을 텐데, 금암은 소(疏) 1편, 서(書) 1편, 자식을 경계하는 글 2편뿐이고, 금봉은 소(疏) 1편, 서(書) 7편, 〈五賢祠揭虔文(오현사게건문)〉 1편,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주 9)의 시에 차운한 시 1수뿐이다.
대개 기축옥사(己丑獄事) 때 형제가 멀리 떨어진 북쪽 지역으로 함께 유배되었고, 이윽고 또 임진왜란이 일어나 위급한 상황에서 삼천리를 떠돌아다녔으니, 6, 7년 동안 병란으로 어수선한 가운데 평소에 지은 글이 망실되어 이미 모두 사라졌을 터이다. 소포는 만력(萬曆) 경술(庚戌 1610)년에 죽었고, 금암이 죽은 것은 소포보다 6년 전이었으며, 금봉이 가장 뒤에 죽었으니 지금으로부터 102년 전이다. 그의 시문은 겨우 백 분의 일만 남았으나 백여 년 뒤에라도 수습하였으니, 장차 후세에 완전히 민멸되는 데는 이르지 않을 것이다. 아! 이는 참으로 감격스러우면서 또한 다행스러운 일이다.
대체로 고금 사람들의 문집이 세상에 간행되어 많은 것은 수십 권, 작은 것은 한두 권이나 더러는 흩어지고 남은 몇 편의 글귀에 불과하여 유사(遺事) 사이에 덧붙여 전해질 뿐이다. 그 시를 외우고 그 문을 읽어 그 사람을 살피고 그 시대를 논하고자 한다면 수십 권도 넉넉한 것이 아니지만, 또한 두어 편도 부족한 것은 아니다. 만일 세상에서 세 현인의 주옥 같은 책 한 권을 보배로 여긴다면 그 사람의 평생을 상상해 보는 데 또한 충분하니, 어찌 반드시 많은 것만 귀하다고 하겠는가? 한 점의 고기로 큰 솥의 고기 맛을 알 수 있다는 것주 10)이 진실로 여기에 있다.
이 유고를 살펴보니 대체로 소포의 말은 기개가 있어 남에게 구속을 받지 않으며, 금암의 말은 간절하고 진실하면서 차례가 있고, 금봉의 말은 곧고 정확하면서 구차하지 않은데, 효제(孝弟)를 근본으로 삼음은 똑같았으니 어찌 한 기운으로 태어나 한 가정에서 얻어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또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 곤재 정개청,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동강 김우옹, 구암(久庵) 김취문(金就文)주 11),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주 12), 다산(茶山) 목대흠(睦大欽)주 13), 목승선(穆承宣) 등에게 보낸 편지를 보니 여러 현인들이 그 사람됨을 덕망있다 여기고, 논변한 것은 의리에서 나오지 않음이 없으니 어찌 등한시 할 수 있겠는가?
아! 기축옥사 때 조정 대신은 논할 것도 없고, 초야에서 학문에 전념하던주 14) 선비조차 꾸며낸 죄주 15)로 함께 죽임을 당하였다. 재앙의 그물에 걸린 나머지 금봉이 먼저 을미(乙未 1595)년에 선혈을 뿌려주 16) 수천 언(數千言)의 상소를 올려 죽은 스승주 17)을 위하여 원통함을 변론하고 아울러 그 당시 억울한 자들을 언급하여 간사한 자들이 기회를 틈타 모함한 상황을 모두 서술하였다. 계속해서 소포의 병신(丙申 1596)년 상소는 하늘의 뜻을 돌리고 인심을 결속시키는 도리를 말하여 구천의 원통함을 풀어주도록 거듭 반복하였고, 이어 분발하여 오랑캐를 막자는 계책을 올렸다. 또 이어서 금암의 기해(己亥 1599)년 상소가 있었으니 말이 더욱 격렬하고 간절하였다. 이는 사제 간의 의리로 마땅히 행한 일일 뿐만 아니라 시비(是非)의 소재가 세도(世道)와 관계되는 일이니, 귀신에게 질정해보아도 의심이 없을 것이다. 훗날 기축년의 사건에 대해 알고자 하는 자는 이 세 상소를 읽고 반드시 감개(感慨)하여 탄식할 것이다. 아울러 글을 써서 《소포금암금봉삼고합부(嘯浦錦巖錦峰三稿合部)》의 서문으로 삼는다.

숭정(崇禎) 정축 후 85년 임인(壬寅 1722)년 4월 초하루 외후손 3세손 팔계(八溪) 정중원(鄭重元)이 삼가 쓰다.
주석 1)가숙(家塾)
글방을 의미한다. 《예기(禮記)》 〈학기(學記)〉에 "옛날에 교육기관으로 가(家)에는 숙(塾)을 두고, 당(黨)에는 상(庠)을 두고, 술(術)에는 서(序)를 두고, 국(國)에는 학(學)을 두었다.〔古之敎者, 家有塾、黨有庠、術有序、國有學.〕"라고 하였다.
주석 2)금암(錦巖)
나덕준(羅德峻. 1553~1604)의 호를 말한다. 자는 대지(大之), 호는 금암이다.
주석 3)금봉(錦峰)
나덕윤(羅德潤, 1557~1621)의 호를 말한다. 자는 유지(有之)·성지(誠之), 호는 금봉이다.
주석 4)나두동(羅斗冬)
1658~1728. 자는 간이(幹而), 호는 약헌(藥軒)이다. 부친은 중직대부(中直大夫) 행의금부도사(行義禁府都事) 나진(羅𥘼)이다. 저서로 《약헌유고(藥軒遺稿)》, 《의예집록(疑禮輯錄)》, 《사예요람(四禮要覽)》, 《동사(東史)》 등이 있다.
주석 5)소포(嘯浦)
나덕명(羅德明, 1551~1610)의 호를 말한다. 자는 극지(克之), 호는 소포·귀암(龜菴)이다.
주석 6)
정중원(鄭重元, 1659~1726)을 말한다. 본관은 초계(草溪), 자는 선장(善長), 호는 천천옹(喘喘翁)으로, 1678년 진사에 합격하였다. 정희량(鄭希亮)의 아버지이다.
주석 7)금호공(錦湖公)
나사침(羅士忱, 1525~1596)을 말한다. 자는 중부(仲孚), 호는 금호이다. 1555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음직으로 경기전 참봉(慶基殿參奉)과 이성 현감(尼城縣監)을 지냈다.
주석 8)정개청(鄭介淸)
1529~1590. 본관은 고성(固城), 자는 의백(義伯), 호는 곤재이며, 나주 출신이다. 예학과 성리학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 당시 호남지방의 명유로 알려졌다. 저서로 《우득록(愚得錄)》이 있다.
주석 9)김우옹(金宇顒)
1540~1603.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숙부(肅夫)이고, 호는 동강(東岡), 직봉포의(直峰布衣)이다. 조식(曺植)의 문인이다.
주석 10)한 점의 …… 것
《회남자(淮南子)》 〈설림훈(說林訓)〉에 "한 점의 고기를 맛보고서 온 솥의 고기 맛을 안다.[嘗一臠肉, 而知一鑊之味.]"라고 한 내용을 인용한 것이다.
주석 11)김취문(金就文)
1509~1570. 본관은 선산(善山), 자는 문지(文之), 호는 구암(久菴),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벼슬은 대사간에 이르렀으며 청백리에 녹선(錄選)되었다. 저서에 《구암집》이 있다.
주석 12)정경세(鄭經世)
1563~1633.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경임(景任), 호는 우복(愚伏), 시호는 문장(文莊)이다. 예학에 조예가 깊었다. 저서로 《우복집》, 《상례참고(喪禮參考)》, 《주문작해(朱文酌海)》가 있다.
주석 13)목대흠(睦大欽)
1575~1638. 본관은 사천(泗川), 자는 湯卿, 호는 다산(茶山)ㆍ죽오(竹塢)이다. 1605년 별시 문과에 급제한 뒤, 예조 참의ㆍ강릉 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저술로 《다산집》이 있다.
주석 14)학문에 전념하던
원문의 '장수(藏修)'는 장수유식(藏修遊息)의 준말로 늘 학문에 전념함을 뜻한다. 《예기(禮記)》 〈학기(學記)〉에 "군자는 학문에 대해서 학교에 들어가서는 학업을 닦고, 학교에서 물러나 쉴 때에는 기예를 즐긴다.[君子之於學也, 藏焉修焉息焉游焉.]"라고 하였다. 장(藏)은 늘 학문에 대한 생각을 품고 있는 것이요, 수(修)는 방치하지 않고 늘 익히는 것이다. 식(息)은 피곤하여 쉬며 함양하는 것이고, 유(遊)는 한가하게 노닐며 함양하는 것이다.
주석 15)꾸며낸 죄
원문의 '나직(羅織)'은 죄가 없는 사람에게 죄를 있는 것처럼 꾸며 만드는 일을 말한다. 송나라 소식(蘇軾)의 〈재걸군찰자(再乞郡札子)〉에 "그 말을 살펴보건대 모두 나직(羅織)한 것들이니, 없는 것을 있다고 합니다.[考其所言 皆是羅織 以無爲有]"라고 하였다.
주석 16)선혈을 뿌려
원문의 '역혈(瀝血)'은 상소를 올려 간곡하게 호소하는 것을 가리킨다. 한유(韓愈)의 시 〈귀팽성(歸彭城)〉에 "간을 파내어 종이를 만들고, 선혈을 뿌려서 글을 쓰네.[刳肝以爲紙 瀝血以書辭]"라고 하였다. 《五百家注昌黎文集 卷2》
주석 17)죽은 스승
정여립 모반 사건으로 유배 중에 죽은 정개청을 말한다.
三稿合部序 【一】
錦城羅氏家塾, 新刊嘯浦遺稿, 附以錦巖錦峰若干稿, 合成一部, 錦巖曾孫上舍斗冬氏實收輯之. 嘯浦玄孫晩運, 錦峰曾孫斗興, 與之同圖所以壽其傳者, 走書小白山下, 屬重元序之. 羅吾自出也, 錦巖吾先妣之王父也, 重元於此, 烏可不爲之感. 且幸直讓以不文而止乎. 粤惟外高祖錦湖公, 以行誼聞, 其長子, 諱德明, 字曰克之, 筮任金吾郞, 旋已之, 放迹湖海, 卓犖傑魁人也. 是爲嘯浦. 第二諱德俊, 字曰大之, 官知縣. 第三諱德潤, 字曰有之, 亦曰誠之, 官殿中. 俱爲困齋鄭氏弟子, 篤學力行, 錦巖錦峰其號也. 嘯浦詩格超逈, 有聲當世, 今其遺什, 只有古律絶句近體長作, 摠五十餘首, 及賦二書三疏一而已. 錦巖錦峰, 講磨斯文, 所著於文字間者, 宜亦不少, 而錦巖疏一書一戒子文二而已, 錦峰疏一書七五賢祠揭虔文一次東岡韻語一而已. 蓋當己丑禍, 兄弟竝投極北絶域, 已又有龍蛇寇亂, 三千里流離顚沛之際, 六七年兵革搶攘之中, 平日文字亡失, 固已盡矣. 嘯浦以萬曆庚戌歿, 錦巖之歿先六年, 錦峰最後歿, 距今百有二年. 其詩文之僅存十一於千百者, 得追拾於百餘年之後, 將不至全泯于來世. 嗚呼! 此誠可感, 亦可幸也. 凡古今人文集行于世, 多者累數十卷, 小者一二卷, 或不過零章瑣篇, 附傳遺事間焉耳矣. 至於頌其詩讀其文, 以觀其人論其世, 則不以累十卷而有餘, 亦不以數篇而不足. 如世所珍三賢珠玉一卷, 其人平生, 亦足想見, 奚必多之爲貴哉. 一臠可以識大鼎之味, 信乎其有是也. 試以斯稿, 槪之嘯浦之言, 倜儻自奇, 錦巖之言, 懇實有倫, 錦峰之言, 貞確不苟, 其本之以孝弟則一也, 庸非共氣而生得乎家庭者爲然歟. 且觀書翰所與若梧里困齋鶴峯東岡久庵漢陰愚伏茶山睦承宣, 諸賢德其人, 而所論卞無非出於義理, 是豈可以等閑視也. 噫嘻! 己丑之獄, 亡論朝紳, 卽林下藏修之士, 竝被羅織而死. 當禍網之餘, 先有錦峰乙未疏瀝血數千言, 爲亡師訟寃, 竝及一時群枉, 備盡奸人乘機陷害狀. 繼而有嘯浦丙申疏, 言回天意結人心之道, 申申於雪寃泉壤, 仍獻勵志禦戎策. 又繼而有錦巖己亥疏, 言益激切. 此非特師生之義, 所宜爲也, 是非所在關係世道, 可以質諸鬼神而無疑. 後之欲知己丑事者, 於此三疏, 其必有感慨而喟然者矣. 竝書之以爲三稿合部序.
崇禎丁丑后八十五年壬寅孟夏初吉, 外後屬三世孫八溪鄭重元謹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