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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행록(西行錄) / 향산일기 / 10월(十月)

자료ID HIKS_OB_F9008-01-202010.0017.0001.TXT.0004
22일
눈이 올 듯한 기미가 있어 아침을 먹은 뒤에 급히 가마에 올라 안심사(安心寺)에 이르렀다. 안심사는 바로 보현사의 본찰(本刹)로, 고금(古今) 대사(大師)들의 부도가 모두 이 절의 뒤에 있었다. 부도는 상중하 3줄로 늘어서 있는데, 한 줄에 10여 개의 부도를 세워 놓기도 하였다. 가장 이름이 알려진 사람의 부도에는 반드시 석비(石碑)가 있었다. 상원암 뒤편을 올려다보니 일천 봉우리가 하늘에 솟아 있고 석벽이 줄지어 서 있어 제법 중향성(衆香城)주 7)과 흡사하였다,
눈이 이미 내리기 시작하였으므로 급히 가마에 올랐다. 비탈길 잔교(棧橋)의 가장 위험한 곳에서는 가마를 멈추고 걸어서 갔다. 10여 리를 가니 길은 끊어지고 가파른 절벽인데 위에 쇠줄이 있어 아래로 6~7장 드리워져 있었다. 이에 승도들에게 먼저 올라가게 하고 나는 맨 나중에 줄을 잡고 올라갔다. 몇 걸음도 못 가서 다시 쇠줄이 있고 아래로 10여 장 드리워져 있으니 그 위태로운 상황을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간신히 위로 올라가니 석대(石臺)가 늠름하게 우뚝 솟아 있었다. 이름은 '인호대(引虎臺)'라고 하는데, 이곳에 앉아 있으니 상원암(上院庵)주 8)의 용연폭포(龍淵瀑布)주 9), 대야폭포(大也瀑布), 용각석(龍角石)과 암자 뒤의 늘어선 석각(石角)을 하나하나 상세히 알 수 있었다.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두루 살펴보았는데, 아래를 내려다보니 땅이 보이지 않고 좌우로 깎아놓은 듯한 모습이 마치 풍악의 백운대(白雲臺)와 비슷하였다. 그러나 그 크고 작은 차이와 기이한 자취가 백중의 형세라 말할 수 없다. 기 대사(機大師)주 10)의 시에 차운하였다.

서쪽 변방의 산천 별안간에 지나가니(西塞山川瞥眼過)
묘향산의 진경 찾으려는 숙원 오래 되었네(尋眞宿債妙香多)
구름이 걷히니 형악이 선경을 드러내고(雲開衡岳探仙境)
눈이 개니 용문이 기녀의 노래 들려주네(雪霽龍門聽妓歌)
쇠줄에 바람 울어 아슬아슬하나 어찌할 수 없고(鉄索風鳴危莫奈)
잔교에 빙판이 미끄러워 위태로우나 어찌하랴(石棧氷滑險如何)
돌아와 한밤중에 등잔불 피우고 앉았는데(歸來夜半挑燈坐)
다행히 고승이 있어 졸구로 화답하네(幸有高僧拙句和)

이어 인호대 위에서 수십 보를 걸어 깎아지른 벼랑을 따라 앞으로 나아갔는데, 그 깎아지른 벼랑은 비탈지듯 산에 의지하여 한 갈래 돌길이 있었다.
마침내 상원암(上院庵)으로 들어가 풍경(風景)을 두루 살펴보니, 사방의 석벽(石壁)과 계단 아래 폭포(輻布)는 명승지라 할만 했다. 다만 바위 빛깔이 그다지 깨끗하지 않고 폭포의 흐름도 웅장하지 않으니 이것이 흠이었다. 왼쪽에 있는 용각(龍角)은 대개 그 거석(巨石)이 10여 장(丈)이나 우뚝 서 있었는데, 위에는 두개 돌이 똑바로 서 있어 그 형상이 마치 용의 뿔과 같았기 때문에 그렇게 일컫는 것이다. 이때 쌓인 눈이 녹지 않은데다가 또 한창 눈이 내리고 있어 곧바로 내원암(內院庵)으로 갈 수 없었다. 또 낙엽이 길을 뒤덮고 그 위로 눈이 쌓이니, 만약 한 발짝이라도 헛디디면 위태로움을 이루 말할 수가 없다고 하였으므로 도로 내려왔다. 삼연(三淵)의 시에 차운하였다.

세 갈래 폭포는 온종일 쏟아져 내리는데(三道飛泉盡日舂)
불국의 첩첩산중에주 11) 들어와 앉았네(坐來佛國亂山中)
만겁의 석대 신령한 범이 꿇어앉은 듯(臺留萬劫蹲靈虎)
천 길 폭포수 성난 용이 일어난 듯하네(瀑落千尋起怒龍)
층층바위는 신군주 12)의 자취 굳게 닫고(層巖牢鎖神君跡)
쌓인 눈은 속객의 자취 깊이 봉하였네(積雪深封俗客蹤)
웃으며 묻노니 연하는 어느 누가 관장하는가(笑問烟霞誰管領)
노승은 말없이 종을 울릴 뿐이라(老僧無語自鳴鍾)

곧바로 향로전(香爐殿)으로 들어가 서산대사(西山大師)의 옥시(玉匙),주 13) 갈건(葛巾), 장삼(長衫)을 두루 보다가 관음전(觀音殿)으로 돌아와 앉아 요기하였다. 또 바로 견여(肩輿)를 타고 내원암(內院庵)으로 올라가 향산운사(香山雲舍)를 보았는데, 이는 곧 퇴계(退溪)의 친필(親筆)이다. 또 사암(思庵)의 시율(詩律)이 있었다. 마침내 절구 한 수를 읊었다.

사암이 시와 퇴계가 직접 쓴 글씨(思庵之律退溪筆)
고요함 속에 어찌 이처럼 보배를 얻을 수 있으랴(靜也何能得此珍)
당시의 충의가 오래토록 나무처럼 서 있고(忠義當年多樹立)
성조에서 인재를 배양함 또한 산인이네(聖朝培養亦山人)

묘향산의 경치로는 상원암(上院庵)과 이 암자가 가장 빼어났다. 암자 위에는 금강굴(金剛窟)이라는 석굴(石窟)과 서산(西山)이 수도(修道)하던 두어 칸의 초당이 있다. 인하여 벽에 쓰인 시에 차운하였다.

오래되고 기이한 바위 굴에(古奇巖竇屋)
신명의 가호로 대사가 거처하였다네(神護大師居)
이두석주 14)에게 말을 건네 보고 싶으나(欲語螭頭石)
패엽서주 15)에 이끼의 흔적만 남아 있네(苔痕貝葉書)

확 트인 그윽한 경치가 상원암에 못지않은데, 이 암자가 바로 서산(西山)이 오래 머물렀던 곳이다. 서산의 시에도 차운하였다.

적막하여 산이 졸고 있는 듯한데(寂寞山如睡)
도도나무주 16) 위에 새벽닭 소리 들려오네(桃都廳曉鷄)
서산대사 참 선정에 들어가니주 17)(西山眞入定)
명성과 절조 법왕주 18)과 나란하네(名節法王齊)

임진년의 거의(擧義)주 19)도 이 암자에서 있었으니 이는 비단 지역이 좋을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충의도 여기에 완연히 드러난 듯하였다. 그러나 천석(泉石)은 상원(上院)에 미치지 못하였다. 그 밖의 단군굴(檀君窟)과 단군대(檀君臺)주 20)는 특별히 기이한 모습은 없었지만, 다만 우적암(牛跡巖) 위에 소의 흔적이 완연한데다가 송아지의 자취도 있으니 참으로 괴이하였다. 대개 그 산이 비록 기이한 풍경은 없었지만, 겹겹이 포개진 병풍과 같이 무수히 둘러싸여 있어 몇 리도 확 트인 곳이 없었고, 입석(立石)도 그다지 흥미로운 것이 없었다. 풍악(楓岳)으로 말하자면, 두류산(頭流山)과 백중(伯仲)의 형세라고 말할 수 없으니, 조금 낫더라도 새로 흥미로울 것이 없었다. 쌍계(雙溪)와 천석(泉石)의 아름다움은 다만 서북쪽 변방에 자리하여 우리나라의 보장의 형세가 되었으며, 또 남쪽으로 수백 리를 뻗어 평양 천 년의 도읍이 되었으니, 그 기세의 웅건하고 광대함은 극에 달하였다고 할 만하다.
장차 묘향산을 나가며 절구 한 수를 읊었다.

눈이 가득 덮인 때 향악의 진경 찾으니(香岳尋眞雪滿時)
강산은 온통 옥빛으로 들쭉날쭉하여라(江山一色玉參差)
이천 리 밖 호남에서 온 나그네(二千里外湖南客)
이곳에 다시 올 날 기약할 수 없구나(此地重來未可期)

안심사, 다야폭, 인호대, 상원암, 산주폭, 용연폭, 천신폭, 용각석, 불영대, 조원암, 내보현, 보발암, 단군굴, 단군대, 만폭동, 우족대, 강선대, 금강굴, 사리각, 내원암, 무릉폭, 견불암, 불지암, 천주석, 국진굴, 극락전, 영산전, 대장전, 대웅전, 만세루, 금화봉, 설령.
주석 7)중향성(衆香城)
금강산의 내금강 마하연(摩訶衍) 뒤를 병풍처럼 에워싸고 있는 하얀 바위 봉우리들을 일컫는 명칭이다.
주석 8)상원암(上院庵)
평안북도 향산군 향암리 묘향산(妙香山)에 있는 절로, 고려 시대에 창건됐다고 한다. 상원암 상량문에 의하면 1580년(선조13) 중창했다고 하며, 상원암 불량비(佛糧碑)에 의하면 1794년(정조18) 대대적으로 보수했다고 한다.
주석 9)용연폭포(龍淵瀑布)
묘향산 상원동 등산길 산주폭포의 왼쪽에 있는 폭포로, 길이가 105m로서 북한에서 가장 긴 누운폭포이다. 묘향산의 법왕봉(法王峰, 1,391m)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직경 3m, 깊이 1.5m 되는 용소에 찼다가 넘치는 모습이 용의 비늘 모양을 닮았다. 사람들은 이것을 신비화하여 용소에서 용이 올라가면서 물이 넘친다는 의미로 용연폭포라고 하였다.
주석 10)기 대사(機大師)
언기 대사(彦機大師, 1581~1644)로, 속성(俗姓)은 장씨(張氏), 본관은 죽주(竹州), 호는 편양당(鞭羊堂), 법랍(法臘)은 53세였다. 서산 대사(西山大師)의 법사(法嗣)로 금강산과 묘향산 등에 주로 거주하였다. 《白洲集 卷18 鞭羊堂彥機大師碑》 한편 신익성(申翊聖)의 《낙전당집(樂全堂集)》 권7 〈유금강소기(遊金剛小記)〉에는 "기공이 천덕암에 거주한다.[機公居天德菴]"라고 하였다. 11세에 출가하여 휴정(休靜)의 제자인 현빈(玄賓)에게 계(戒)를 받은 뒤, 금강산에서 교학과 함께 참선을 했다. 임진왜란이 끝날 무렵, 묘향산 휴정의 밑에서 선 수행을 했고, 이후 휴정의 법(法)을 이어받았다. 그 뒤 남쪽으로 돌아다니면서 고승들에게 깨달음을 점검받았으며, 금강산 천덕사(天德寺), 구룡산 대승사(大乘寺), 묘향산 천수암(天授庵) 등에서 선과 교를 함께 가르쳐 명성을 떨쳤다
주석 11)첩첩산중에
원문의 '난산(亂山)'은 높낮이가 가지런하지 않게 여기저기 어지러이 솟은 산봉우리를 말한다.
주석 12)신군
신군(神君)은 도가(道家)의 신(神)을 말한다. 《史記 封禪書》
주석 13)옥시(玉匙)
옥시금약(玉匙金鑰)의 준말이다. 《황정경(黃庭經)》에, "옥시와 금약이 저대로 완고하다.[玉匙蘥身完堅.]"라 했고, 그 주에, "옥시는 이[齒]요 금약은 혀라. "라고 하였다.
주석 14)이두석
원문은 '이두(螭頭)'는 종이나 솥, 궁궐의 섬돌, 비석 머리 등에 장식하는 뿔 없는 용의 형상으로, 벽사와 수호의 의미가 있다.
주석 15)패엽서
패엽서(貝葉書)는 불서(佛書) 또는 불경(佛經)을 이른다. 고대 인도에서 패다라(貝多羅) 나무의 잎에 불경을 쓴 데서 유래하였다.
주석 16)도도나무
원문의 '도도(桃都)'는 전설에 나오는 나무 이름이다. 《현중기(玄中記)》에 의하면 "동남쪽에 도도산이 있고 그 위에 큰 나무가 있어 도도라 이름하는데, 가지끼리 서로의 거리가 삼천 리나 되고, 그 위에는 하늘 닭 한 마리가 있다. 아침 해가 떠올라 햇살이 이 나무를 비추면 하늘 닭이 울고 뭇 닭이 일제히 따라 운다.[東南有桃都山, 上有大樹, 名曰桃都, 枝相去三千里, 上有一天鷄, 日初出, 光照此木 天鷄則鳴, 群鷄皆隨之鳴.]"라고 하였다. 《太平御覽 卷918》
주석 17)선정에 들어가니
원문의 '입정(入定)'은 불교 용어이다. 중이 고요히 앉아 마음을 수렴하여 잡념을 일으키지 않고 마음을 한 곳에 고정시키는 것을 입정이라고 한다.
주석 18)법왕
법왕(法王)은 부처님은 법문의 주인이며, 중생을 교화함에 자유자재하다는 뜻으로 본래는 부처님을 지칭한 말이었으나 진리를 깨달은 높은 스님에게도 쓴다.
주석 19)임진년의 거의(擧義)
1592년(선조25)에 왜적이 침입하자 절에 있던 73세의 서산대사(西山大師)는 전국에 격문을 보내 의승(義僧)이 일어나도록 독려하였다. 자신도 묘향산을 중심으로 의승을 모아 평양전투에 직접 참가하였다.
주석 20)단군굴(檀君窟)과 단군대(檀君臺)
단군굴은 묘향산 향로봉 남쪽에 위치한 아란봉 아래에 있는데, 세상에서는 단군이 나라를 다스리며 머문 곳이라고 한다. 단군대는 두타봉 서쪽에 위치하며 단군굴에서 산정상으로 1리 정도 떨어져 있다. 주변의 높고 험한 봉우리가 단군대를 호위하듯 에워싸고 있어서 세상에서는 단군의 강림처로 전한다.
二十二日
有雨雪之意, 食後遂急上輿, 至安心寺。 安心卽此寺本刹, 而古今大師之浮屠, 皆在此寺之後。 列上中下三行, 而一行或立十餘浮屠, 而最所知名者, 則必有石碑矣。 仰觀上院之後, 千峯揷天, 石壁列立, 頗似衆香城矣。 雪已作之, 遂急上輿。 其磴路棧橋之最危處, 息輿徒步。 行十餘里, 路絶壁立, 上有鉄索, 下垂六七丈。 於是使僧徒先上, 余卽最後緣索而上。 不及數步, 更有鉄索, 下垂十餘丈, 其危凜不可言。 艱辛緣上, 則有石臺赳起, 名曰引號臺, 坐此則上院庵、龍淵瀑、大也瀑、龍角石及庵後列立之石角, 一一可詳矣。 徘徊周觀, 則下瞰無地, 左右如削, 彷彿若楓岳之白雲臺, 而其大小之殊, 奇異之跡, 不可謂伯仲矣。 次大師韻, "西塞山川瞥眼過, 尋眞宿債妙香多。 雲開衡岳探仙境, 雪霽龍門聽妓歌。 鉄索風鳴危莫奈, 石棧氷滑險如何。 歸來夜半挑燈坐, 幸有高僧拙句和。" 因自臺上行數十步, 從削崖而前, 盖其削壁依山如坂, 有一條磴路。 遂入上院庵, 周觀風景, 則其四面石壁, 及階下瀑布, 可謂名區, 而但其石色不甚潔白, 瀑流亦不雄壯, 是可欠也。 左有龍角, 盖其巨石屹立十餘丈, 上有兩石直立, 狀如龍角故云爾。 是時積雪未消, 且時方雪來, 萬無直向內院之路。 且落葉塞路, 上覆積雪, 若失一足, 則危不可言云, 故還爲下來。 次三淵韻, "三道飛泉盡日舂, 坐來佛國亂山中。 臺留萬劫蹲靈虎, 瀑落千尋起怒龍。 層巖牢鎖神君跡, 積雪深封俗客蹤。 笑問烟霞誰管領, 老僧無語自鳴鍾。" 直入香爐殿, 遍觀西山大師玉匙及袈葛巾長衫, 還坐觀音殿療飢。 又卽肩輿上內院, 見香山雲舍, 是卽退溪親筆。 又有思庵詩律。 遂吟一絶, "思庵之律退溪筆, 靜也何能得此珍。 忠義當年多樹立, 聖朝培養亦山人。" 此山之景, 上院及此庵, 最爲名勝。 上有石窟, 名謂金剛窟, 數間菴, 卽西山修道之處也。 仍次壁上韻曰, "古奇巖竇屋, 神護大師居。 欲語螭頭石, 苔痕貝葉書。" 通爽幽夐, 不下於上院, 而此菴卽西山久留之所。 又次西山韻曰, "寂寞山如睡, 桃都廳曉鷄。 西山眞入定, 名節法王齊。" 且壬辰擧義, 亦於此菴, 非特地之爲好, 其人之忠義, 如宛見於此矣。 然而泉石不及於上院, 而其他檀君窟、檀君臺, 別無奇異之景, 但牛跡巖上有牛跡宛然, 且犢牛之跡, 是可怪也。 盖其爲山, 雖無奇景怪態, 而恰似屛幛之疊重, 回抱無數, 無數里通爽之處, 且立石甚無興味。 若論於楓岳, 則不可謂伯仲於頭流, 則稍勝而無新興。 雙溪泉石之美, 但居西北極邊, 爲吾東保障之勢。 且南走數百里, 爲平壤千年之都, 其氣勢之雄健磅礴, 可謂極矣。 將出香山吟一絶曰, "香岳尋眞雪滿時, 江山一色玉參差。 二千里外湖南客, 此地重來未可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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