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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행록(西行錄)
  • 1839년(기해), 영행일기
  • 3월(三月)
  • 19일(十九日)

서행록(西行錄) / 1839년(기해), 영행일기 / 3월(三月)

자료ID HIKS_OB_F9008-01-202010.0016.0001.TXT.0008
19일
○밥을 먹기 전 재복(齋服, 재계할 때 입는 옷)을 입고, 서원 마당으로 들어갔다. 먼저 참배를 한 뒤에 들어가서 봉심(奉審)을 하니 위패는 -결락- 가장 높고 컸다. 하얗게 칠한 면에 "유명수군 -결락- 조선국 삼도통제사영의정 -결락- -결락- 공 신위(有明水軍【缺】 朝鮮國三道統制使領議政【缺】 【缺】 公神位)"라고 쓰여있었다. 사우에는 '충렬사'라고 편액이 걸려 있었다. 참배한 뒤에 묘정비(廟庭碑)를 구경하였다. 묘각은 -결락- 문 안에 있었다. 묘문은 우암(송시열(宋時烈)) 선생이 짓고, 동춘당(송준길(宋浚吉)) 선생이 글씨를 썼다. 이 비문에는 마땅히 우리 방계 6대조 수사공(水使公)주 7)의 사적이 들어가야 하는데, 수사공의 사적이 오롯이 빠진 것은 필시 글을 청한 사람이 수사공의 사적을 몰라서 글을 부탁할 적에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실로 우리 송씨에게는 크게 흠이 되는 일이다. 승방으로 나와 아침을 먹은 뒤에 《심원록(審院錄)》에 이름을 적고, 사적 책과 홀기(笏記)를 찾으니, 책은, 승려 말로는 "서원에 있는 서책은 모두 함 안에 보관되어 있는데 승려가 열쇠를 가지고 출타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자세히 보지 못하였으니, 흠사(欠事)이고 흠사이다.
그길로 강당 문루에 이르니 '청해루(淸海樓)'라는 현판이 있었고 또 중수기문(重修記文)이 걸려 있었다. 또 여러 사람이 읊은 시문이 많았으나, 갈 길이 바쁠 뿐만 아니라 눈이 어두운 관계로 상세히 볼 수 없어 안타까울 뿐이었다. 서원 터를 두루 돌아보니 지형이 녹도(鹿島)의 쌍충사(雙忠祠) 터와 흡사하였다. 주산(主山)과 안산(案山)에는 소나무가 울창하고 집들이 즐비하였는데 모두 서원의 소유물이었다. 참으로 명승지라고 이를 만하였다. 앞바다에는 세곡(稅穀)을 실은 조군선(漕軍船)이 많이 정박해 있었는데 차례차례 들어와 그 수가 20여 척에 달하였다. 이 또한 장관이었다.
서원 옆에 또 하나의 비각이 있어서 들어가서 보니, 앞면에 큰 글자로 "자암 선생주 8) 적려 유허비(自菴先生謫廬遺墟碑)"라고 쓰여 있었다. 뒷면에도 비음이 새겨져 있었으나 상세히 볼 수 없었다. 서원 아래는 또 남해하동 두 읍과 영남 좌도(左道)우도(右道)의 조운선(漕運船)이 이곳에 모여 실어간다고 하였다. 이렇게 빼어난 경치를 일찍 보지 못한 것이 한이었다. 거기서 잠시 쉬었다가 처음에는 이곳에서 방향을 바꿔 진주로 갈 계획이었다. 그러나 노자가 부족할 뿐 아니라 내기학윤이 도로 내려가겠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함께 갔다. 나루 앞에 이르러 김종이(金宗頤), 학윤과 헤어졌다. 돈탁(敦托) 나룻가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내기와 함께 조진(助津) 나룻가로 들어갔다. 노량에 있을 때 다음과 같이 시 1수를 읊었다.

지팡이 나란히 짚은 서너 길손이(聯笻三四客)
오롯이 노량의 사당에 도착하였네(專到露梁祠)
층계 사이 자리에서 공경히 참배하고(敬拜階間席)
탁상 위의 신위(神位)에 봉심하였네(奉審卓上位)
충심으로 임금을 지탱하였고(忠心撑北極)
씩씩한 기상은 남쪽 지역을 덮었네(壯氣盖南陲)
당시의 일을 추모하자니(追慕當時事)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네(不覺涕泗洟)
주석 7)수사공(水使公)
송희립(宋希立, 1553년~1623)이다. 송간(宋侃)의 6대손으로, 자는 신중(信仲)이고, 호는 삼규당(三規堂)이며, 본관은 여산(礪山)이다. 전남 고흥군 동강면 마륜리에서 태어났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녹도(鹿島) 만호 정운(鄭運)의 군관으로서 영남지역에 원병파견을 주장하였다. 지도(智島) 만호가 되어 형 송대립(宋大立)과 함께 이순신의 휘하에서 활약하였다. 남해 관음포 앞바다에서 명나라 진린 제독을 구출하는 과정에서 송희립은 중상을 당하고 이순신은 전사했다.
주석 8)자암 김 선생
김구(金絿, 1488~1534)이다. 자는 대유(大柔), 호는 자암(自庵)ㆍ삼일재(三一齋), 시호는 문의(文懿), 본관은 광산(光山)이다. 1511년에 별시 문과에서 을과로 급제한 뒤 좌승지ㆍ홍문관부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1519년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개령(開寧)에 유배되었다가 수개월 뒤에 남해로 이배되었다. 남해에 이배된 지 13년 만에 임피(臨陂)로 다시 옮겼다가, 2년 뒤에 풀려나와 고향인 예산으로 돌아왔다. 저서로 《자암집(自庵集)》이 있다.
十九日
○食前着齋服, 而入院庭。 先爲瞻拜後, 入奉審, 則位牌【缺】 取爲高大。 粉以塗面, 書之以有明水軍【缺】 朝鮮國三道統制使領議政【缺】 缺公神位。 祠宇扁以忠烈祠。 參謁後, 玩廟庭碑。 碑閣在【缺】 門內。 而碑文則尤菴先生撰, 同春先生書之。 此碑文當入我傍六代祖水使公事蹟, 而專沒水使公事蹟者, 必請文之人不知水使公之事蹟, 不告於請文時故也。 實如我宋之大欠事也。 出來僧房朝飯後, 書名《審院錄》, 推尋事蹟冊與笏記。 冊則僧曰: "院中所在書冊盡藏櫃中, 而開金僧將佩去出他云。" 故不得詳玩, 欠事欠事。 仍上講堂門樓, 則扁以淸海樓, 又揭重修記文。 又多諸人題咏, 而非但行忙, 以眼昏之致, 不得詳玩, 可歎耳。 周觀院基址, 則地形洽似鹿島雙忠祠基地矣。 主山與案山, 松楸鬱密, 村家櫛比, 而皆院中所有物。 眞可謂名勝之地。 前洋多泊載稅漕軍船, 次次入來, 其數至於二十餘隻。 此亦壯觀也。 院傍, 又有一碑閣, 故入玩, 則前面大字書自菴先生謫廬遺墟碑。 後面, 又刻碑陰, 而不能詳玩。 院下, 又有南海河東兩邑及嶺南左右道漕船, 來會此處, 載去云爾。 如此勝景, 恨未早見也。 仍爲暫憩, 初意, 則自此轉向晋州計矣。 非但路資之不足, 乃記學允還爲下去爲言, 故不得已同行。 到津前, 與金宗頤學允分袂。 而相會于敦托津頭爲約, 與乃記助津頭。 當在露梁時, 吟一首曰: "聯笻三四客, 專到露梁祠。 敬拜階間席, 奉審卓上位。 忠心撑北極, 壯氣盖南陲。 追慕當時事, 不覺涕泗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