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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행록(西行錄) / 1831년(신묘) / 10월(十月)

자료ID HIKS_OB_F9008-01-202010.0014.0001.TXT.0001
1일
충청도 공주(公州)계룡산(鷄龍山) 동학서원(東學書院)주 1)은 포은(圃隱) 정 선생(鄭先生, 정몽주(鄭夢周)), 목은(牧隱) 이 선생(李先生, 이색(李穡)), 야은(冶隱) 길 선생(吉先生, 길재(吉再)) 및 단종조 삼상(三相)주 2)과 육신(六臣)주 3)의 영령이 모셔진 곳이다. 우리 선조 충강공(忠剛公)주 4)을 이 서원에 배향할 생각으로 화양서원(華陽書院)과 돈암서원(遯巖書院) 두 서원에서 동학서원에 통문을 보냈고, 동학서원도 흥양 향교(興陽鄕校) 에 통문을 보냈다. 그러므로 향교에서 지난번 통문에 답을 하였고, 우리 문중 또한 일이 되어가는 상황을 가서 알아보라는 뜻으로 나와 윤경(允卿), 이찬(而贊)을 보냈다. 그러므로 10월 1일에 두 사람이 출발하여 낙안고읍(古邑)주 5) 마을 앞에 이르러 윤경이찬고읍으로 들어가고, 나는 혼자 죽판(竹坂)의 김 곡성(金谷城) 집으로 왔다. 곡성정등문(旌門登)에서 이곳으로 와서 우거한 사람이다. 내외가 그지없이 정성껏 대접해 주었다. 이것은 실로 오랜 이웃의 정의이니 참으로 고마웠다. 밤에 절구 1수를 다음과 같이 읊었다.

이번 일로 초겨울에 먼 노정에 올랐으니(這事初冬啓遠程)
선조를 위한 깊은 뜻 이 행차에 달려있네(爲先深意在斯行)
우리 선조의 높은 충정과 참된 행실이 아니면(若非吾祖危忠實)
어떻게 호남의 유현이 예악을 이루었겠는가(胡奈儒樂禮成)
주석 1)동학서원(東學書院)
본래 동학사(東鶴寺)였다. 신라 때 창건되어, 고려 초에 도선(道詵) 국사가 중창하였다. 고려의 건국 공신 유차달(柳車疸)이 박혁거세의 사당을 봉안하고 동학사라고 하였다. 1457년(세조 3) 김시습(金時習) 등이 초혼각(招魂閣)을 세워 단종(端宗)에 대한 제사를 봉행하였다. 1814년(순조 14)에는 주지 월인(月印)이 왕실의 지원을 받아 전각을 중수하고 세조의 초혼기를 봉안하기 위해 혼록봉장각(魂錄奉藏閣)을 새로 지었다. 왕실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었으므로 유자(儒者)들이 강제적으로 절의 간판을 내리고 동학서원(東學書院)으로 바꿨다. 1836년(효종 2) 서원을 관리하던 유생들 사이에 다툼이 일어나자 서원을 몰수하여 다시 사찰로 환원시켰다.
주석 2)삼상(三相)
계유정난 때 죽은 정승 삼상신(三相臣)으로 황보인(皇甫仁)ㆍ김종서(金宗瑞)ㆍ정분(鄭苯)을 가리킨다.
주석 3)육신(六臣)
병자년(1456, 세조2) 단종 복위 사건으로 죽은 박팽년(朴彭年)ㆍ성삼문(成三問)ㆍ하위지(河緯地)ㆍ이개(李塏)ㆍ유성원(柳誠源)ㆍ유응부(兪應孚)를 말한다.
주석 4)충강공(忠剛公)
송간(宋侃, 1405~1480)이다. 호는 서재(西齋)이며, 본관은 여산(礪山)이다. 세종ㆍ문종ㆍ단종의 3조를 섬겨 벼슬이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이르렀다. 단종이 영월로 쫓겨갔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돌아가 두문불출하다가 단종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깊은 산 속에 들어가 3년상을 마치고, 전라남도 고흥군 동강면 마륜리에서 은거하였다.
주석 5)고읍(古邑)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 고읍리이다. 옛날에는 낙안 현에 속하였다.
一日
忠淸道公州鷄龍山東學書院, 卽圃隱先生、牧隱先生、冶隱先生曁端廟朝三相、六臣妥靈之所也。 以吾先祖忠剛公配享是院之意, 華陽、遯菴兩院發通于學院, 學院, 亦以發通于興陽鄕校。 故校中頃以答通, 吾門中, 亦以余及允卿而贊, 往探事機之意起送。 故十月之初吉, 仍與兩人發程, 抵樂安古邑村前, 允卿而贊入于古邑, 余則獨來竹坂谷城家。 谷城卽自旌門登來寓此土者。 而內外款待不已。 此實舊隣之誼也, 可感可感。 夜吟一絶曰: "這事初冬啓遠程, 爲先深意在斯行。 若非吾祖危忠實, 胡奈儒樂禮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