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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행록(西行錄)
  • 1823년(계미)
  • 9월(九月)
  • 29일(二十九日)

서행록(西行錄) / 1823년(계미) / 9월(九月)

자료ID HIKS_OB_F9008-01-202010.0011.0004.TXT.0029
29일
아침을 먹기 전에 출발하려고 하니 송민수(宋民洙)가 돈 1전 5푼으로 아침밥을 사먹으라고 주었다. 노자가 부족하였기 때문에 다시 동(銅) 1관(貫)을 빌려 쓰기를 청하니, 송약수(宋若洙)가 한 젊은 종인(宗人)을 불러와 돈 2전을 가지고 오라 하면서 한 자리의 술값이나 하라며 도움을 주었다. 아침에 전성철(全聖哲)의 집에 이르러 아침을 먹은 뒤에, 유석하(柳錫夏)영윤(永允)을 데리고 함께 서문(西門) 안의 송덕진(宋德瑨) 집에 갔다. 그 사람은 바로 여산송씨(礪山宋氏)로 부내(府內)에 살고 있을 때 나주(羅州) 주인이 되었는데, 영저(營底)에서도 권세 있는 사람이었다. 그 사람은 예방 영리(禮房營吏)주 80)정읍(井邑) 이동환(李東煥)과 주객(主客) 사이의 친분이 있었기 때문에 몇 자 써주기를 청하자, 송덕진이 그의 가동(家僮, 어린 사내 종)을 불러 우리 두 사람을 영청(營廳)에 데리고 가서 예리(禮吏)에게 편지를 전하니 아전이 찾아내었다. 지난번 상경했을 때에 육충사(六忠祠) 열록(列錄)을 기록해 두었다가 《사원록(祠院錄)》에 재록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위의 기록은 아직도 선화당(宣化堂)에 있고 아직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 예리가, "안에서 나오는 날을 기다렸다가 착실히 기록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기록을 직접 보지 못하고 돌아오니 마음이 매우 답답하였다.
장흥(長興) 벽사(碧沙)의 역리(驛吏) 김방업(金邦業)은 재작년 오촌(鰲村)으로 가는 길에 마침 낙안 도중에서 만나 그대로 길동무하며 간 영저(營底)의 사람이다. 나와 정이 있어 육충사(六忠祠) 재록하는 일을 편지로 부탁하였는데, 그 조용한 때를 이용해서 예리(禮吏)에게 부탁해 줄 것을 신신당부하여 말했다. 돌아올 때 또 송덕진(宋德瑨)을 만나 다시 편지로 부탁하고는 그대로 출발하여 남문 밖에 이르러 점심을 먹고 정자동(亭子洞)에 이르러 묵었다. 25리를 갔다.
주석 80)예방 영리(禮房營吏)
예방은 조선 시대 지방관서에서 예전(禮典) 관계의 실무를 맡아보던 부서 또는 그 일에 종사하던 향리를 말하고, 영리(營吏)는 행정 실무에 종사하던 말단 관리를 말한다.
二十九日
食前欲爲離發, 則民洙以一戔五分錢, 買食朝飯之意給之。 路貰不足, 故更請一貫銅貸用, 若洙招來一少宗人, 二戔錢持來云, 而惠以一時之酒債矣。 朝到聖哲家朝飯後, 與携錫夏永允, 偕往西門內宋德瑨家。 其人卽礪山之宋, 而居在府內時, 爲羅州主人, 而營底之有權者也。 其人與禮房營吏 井邑 李東煥, 主客相親之間, 故請以數字書, 則其人呼其家僮, 陪我二人往于營廳, 傳書于禮吏, 吏搜出。 頃者上時, 書托六忠祠列錄, 欲載《祠院錄》矣。 右錄尙在宣化堂, 姑未出來, 故其吏言, "內待後出來之日, 着實載錄。"云, 故未得親見載錄而歸, 心甚㭗㭗。 與長興 碧沙驛吏金邦業, 卽再昨年鰲村之行, 適逢樂安路中, 仍爲作伴於營底之人也。 與我有情故, 書托六忠祠載錄事, 而乘其從容時, 言屬禮吏之意, 申申言之。 來時又見宋德瑨, 更爲書托, 而仍以發行, 抵南門外中火, 抵亭子洞留宿。 行二十五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