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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행록(西行錄)
  • 1823년(계미)
  • 4월(四月)
  • 11일(十一日)

서행록(西行錄) / 1823년(계미) / 4월(四月)

자료ID HIKS_OB_F9008-01-202010.0011.0002.TXT.0011
11일
이른 아침에 정 진사(丁進士)의 사관(舍館)에 갔다. 박종수(朴宗壽)삼청동(三淸洞)에 가서 판서(判書) 이헌기(李憲綺)주 16)를 들어가 뵈었다. 먼저 한포재(寒圃齋)주 17) 선생의 서원을 건립하는 일에 대해 말을 꺼내니, "본손(本孫)이 선조(先祖)의 서원 건립을 주선하는 것은 매우 온당한 일이 아닙니다."라고 답하였다. 다음에 말한 우리 선조의 사액(賜額)을 청한 일은 대사(大事)가 속히 이루어져 갑자기 쉽지 않다고 하였으므로 이번 길에 예조에 올려 재록하려는데, 부족한 것은 대감(大監)이 예조 판서로 있을 때 일을 하는 것이 구차하지 않고, 이번에는 구차한 계책이 많이 있다 하니 답하기를, "아무 때에 재록(載錄)하는 것도 다행입니다. 이는 사액(賜額)을 청하는 계제(階梯)이니 더욱 다행한 일입니다."라고 하였다.
아래 사랑(舍廊)으로 가서 그의 아우 한림(翰林) 헌위(憲緯)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는 길에 재동(齋洞)임실(任實) 종인(宗人) 주인집에 들러 예조에 소장 올리는 일을 논의하였는데, "소장을 써 줄 사람이 없어서 애초에 성사가 안됐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급히 묘동(廟洞)귀환(龜煥) 주인집에 가서 상의하였는데 또한 걱정스럽다고 하면서, "아무쪼록 상의하기로 약속하였으니 반드시 소장을 얻어야 일이 성사될 수 있을 것입니다. 부디 흘려 듣지 마십시오."라고 하였다. 온 힘을 다해 석사에게 주선하는 방도에 대해 누누이 부탁하려고 하였으나, 석사가 출타하여 만나지 못하였다.
저물녘에 경주인(京主人) 집에 가서 경주인과 상의해 보니 '어찌할 방법이 없다. 오늘 내일 사이에 곧장 강문명(姜文明)을 찾아가 2백여 냥의 돈을 받아 올라오는 길에 그 중 50냥을 떼어 쓰는 것이 좋겠다.' 하고, '나머지 액수는 경주인의 이름으로 보증하여 일을 처리하겠다.' 하였다. 이에 급히 재동(齋洞)으로 가서 여해(汝海)와 상의하였더니 그러면 안 된다고 하였으므로 저녁에 경주인 집으로 돌아왔다. 일이 급박하게 되었는데 끝내 변통할 방도가 없으니, 이를 장차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동행과 그대로 주인집에 머물렀다.
주석 16)이헌기(李憲綺)
1774~1824.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1822년 대사헌, 예조판서·수원부유수·우참찬·장례원제조를 지냈다.
주석 17)한포재(寒圃齋)
이건명(李健命, 1663~1722)의 호이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중강(仲剛)이다. 좌의정을 지냈으며, 1721(경종1)에 왕세제 책봉을 주청하여 실현하였으나, 신임사화 때 유배되었다가 사사(賜死)되었다. 노론사대신(老論四大臣)의 한 사람이다. 저서로 시문과 소차(疏箚)를 모은 《한포재집(寒圃齋集)》 10권이 전한다.
十一日
早朝往進士舍館。 與朴宗壽, 往三淸洞, 入謁判書 憲綺。 先言寒圃齋先生建院事, 則答曰: "以本孫其先祖建院, 周旋極未安。 " 次言生之先祖請額事, 則大事速成, 猝難不易云, 故今行呈禮曹載錄, 而所欠者, 大監 禮判時做事, 則不爲苟且, 今番多有苟且之計, 則答曰: "某時載錄, 亦可幸矣, 此則請額之陛梯也, 幸幸。"云矣。 往下舍廊, 其弟翰林 憲緯暫敍。 來路入齋洞 任實宗人主人家, 論其呈禮曹事, 無入手之地, 則初不成事云, 故急往廟洞 龜煥主人家相議, 亦爲悶慮云, "約以某條相議, 必得狀後事可成, 幸勿泛聽。" 與碩士, 極力周旋之道, 累累言托, 碩士出他不見。 乘暮來京主人家, 與京主人相議, 則亦無奈何, 而今明間, 直訪姜文明, 持二百餘兩錢, 上來之道, 厥錢中五十兩, 推用爲可云云, 餘數則以京主人名爲證處事云云。 故急往齋洞, 與汝海相議, 則不然云, 故乘暮還京主人家。 事成急迫, 而終無變通之道, 此將奈何? 與同行仍留主人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