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역/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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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행록(西行錄)
  • 1823년(계미)
  • 4월(四月)
  • 4일(初四日)

서행록(西行錄) / 1823년(계미) / 4월(四月)

자료ID HIKS_OB_F9008-01-202010.0011.0002.TXT.0004
4일
일찍 출발하여 이천(泥川) 중저(中底) 주막에 이르러 임실한용(韓瑢)을 만나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아침을 먹었다. 화성읍(華城邑)에 이르러 점심을 먹었다. 갈산(葛山) 어귀에서 어떤 한 사람이 부르기에 돌아보니 바로 남원(南原)의 현대(顯大) 이문욱(李文旭)이었다. 이어 말에서 내려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가 문욱에게 말을 타게 했다. 과천(果川) 읍내에 이르러 잠시 쉬다가 남태령(南泰嶺)주 10) 아래에 이르러 당동(唐洞) 신준(申俊) 종형제를 만났는데, 과거에 응시하였다가 낙방하고 고향에 내려가는 길이었다.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가 피차의 갈 길이 바쁘기에 집에 편지를 써서 보내지는 못하고, 단지 무사히 올라왔다는 소식만 말로 전하고 서로 헤어졌다.
고개를 넘을 때 동행하는 마상객(馬上客)에게 살고 있는 곳과 성명을 물었더니, 한 사람은 충청도 문의(文義)주 11)덕지(德地)에 사는 범석(範錫) 오성홍(吳聖洪)이며, 또 한 사람은 금구(金溝) 백일(白日)에 사는 위팔(渭八) 강원달(姜元達)이라 하였다. 이에 통성명을 하고 보니 석사도 오촌(鰲村)으로 들어가는 집안사람이었다. 나중에 서로 찾아가기로 약속하고서 그대로 동행하였다. 승방(僧房) 주막에 이르러 임실(任實) 동행과 두 길손은 뒤쳐지고, 나는 길을 재촉하여 나루터에 이르러 즉시 나루를 건넜다.
저녁에 청파(靑坡)박영대(朴永大) 집에 이르니 낙안 형님이 오늘 오전에 먼저 들어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또한 무사히 올라왔으니 다행스럽고 다행스러웠다. 주인 내외(內外) 모두 별 탈이 없고, 동향(同鄕)에서 함께 온 이들도 별 탈 없이 올라와 성안으로 들어갔다고 하였는데, 즉시 얼굴을 보지 못한 것이 한탄스러울 뿐이다. 그대로 묵었다. 110리를 갔다. 밤에 비가 내렸다.
주석 10)남태령(南泰嶺)
서울에서 과천을 지나 수원으로 가던 길로서 삼남대로의 첫 번째 큰 고개이다. 이 고개의 원래 이름은 호현(狐峴 여우재)이다. 정조대왕이 사도세자 묘를 참배하러 가는 도중에 이 고개 이름을 물었을 때 '여우고개'라는 이름을 거명하지 못했는데, 과천 아전이 '남태령'이라고 대답하였다고 하여 '남태령'으로 개명되었다고 한다.
주석 11)문의(文義)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구 청원군 문의면) 지역의 옛 지명이다.
初四日
早發抵泥川 中底酒幕, 逢任實 韓瑢, 暫話朝飯。 抵華城邑中火。 抵葛山前, 有一人呼之故顧見, 則乃南原 顯大 文旭也, 仍爲下馬暫話, 使文旭騎馬, 至果川邑內暫憩, 至南泰嶺下, 逢唐洞 申俊從兄弟, 以落榜擧子下鄕人也。 暫話彼此行色忙迫, 故不得付書於家中, 只以無事上來之意, 口傳相分。 越嶺之際, 與同行以馬上客, 問其所居與姓名, 則一則忠淸道 文義 德地範錫 聖洪也, 一則金溝 白日渭八 元達也。 仍爲通姓名, 碩士亦爲入鰲村門庭之人也。 有後日相訪之約, 仍爲同行。 抵僧房酒幕, 任實同行與二客落後, 余則促行抵津頭, 卽爲越津。 暮抵靑坡 朴永大家, 則樂安兄主, 今日午前先爲入來留待矣。 亦爲無事上來, 幸幸。 主人內外俱無故, 同鄕同行, 亦爲無故上來, 入去城內云, 不卽相面, 可歎耳。 仍爲留宿。 行百十里。 夜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