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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행록(西行錄)
  • 1823년(계미)
  • 3월(三月)
  • 30일(晦日)

서행록(西行錄) / 1823년(계미) / 3월(三月)

자료ID HIKS_OB_F9008-01-202010.0011.0001.TXT.0009
30일
아침을 먹은 뒤에 빗줄기가 약간 누그러졌기에 길을 나서 정오에 오촌(鰲村)으로 들어갔다. 장석(丈席)을 들어가 뵙고 그 내부인(內夫人)의 상(喪)을 위로한 뒤 물러나 상제(喪制)주 7)에게도 또한 위로하였다. 장석(丈席)의 건강이 근래에 더욱 악화되어 몇 년 사이에 모습이 더욱 쇠약해지니 걱정스러웠다.
잠시 쉬고 나서 행랑으로 나와 점심을 먹은 뒤에 실기(實記) 한 권과 가지고 온 약간의 물건을 드렸다. 장석(丈席)이 먼저 세충사(世忠祠)주 8)에 관한 일을 말씀하셨다. 지난번 흥양(興陽)송원(宋)이 왔을 때 한 말이 있었는데, 육(六)자를 세자(世字)로 고치라는 뜻의 편지였다고 하였다. 내가 "출발하기 며칠 전에 편지를 살펴보았습니다."라고 답하자 장석께서,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육충사(六忠祠)로 하지 않는 것이 좋겠네."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하교하신 대로 시행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대로 묵었다.
저녁을 먹은 뒤에 임실(任實) 종인 두 사람도 왔다. 행랑에 한 객이 머물고 있기에 거주하는 곳을 물었더니 같은 도에 사는 광양(光陽)박정일(朴楨一)이라 하였다. 그를 만난 반가움은 다른 사람을 만난 반가움과 달리 더욱 컸다. 그대로 함께 머물렀다. 30리를 갔다.
주석 7)상제(喪制)
부모나 조부모가 세상을 떠나 상중에 있는 사람을 말한다.
주석 8)세충사(世忠祠)
전라남도 고흥군 대서면 화산리에 여산송씨 송간(宋侃)을 주벽으로 송대립(宋大立), 송심(宋諶), 김시습(金時習) 등 11위를 향사하는 사우(祠宇)인 서동사(西洞祠)의 이전 명칭으로, 1785년 최초 건립 당시 운곡사라는 이름으로 창건되었다. 이후 1796년 송간의 유거지인 동강면 마륜리 서대동에 운곡사 강당을 옮겨 세충사로 개칭하였으며, 1801년(순조1) 송건, 송순례, 송희립을 추배하여 일문 육충사(一門 六忠祠)라 이름하였다. 이후 1833년 세충사, 1846년(헌종12)에 매월당 김시습을 함께 봉안하면서 서동사로 칭하였고, 1868년 서원철폐령 때 훼철되었다가 1956년 지금의 자리에 다시 지으면서 재동서원(齋洞書院)이라 하였다.
晦日
食後雨勢稍歇, 故發程午時入鰲村, 入謁丈席, 致慰其內夫人喪, 退與喪人亦致慰, 丈席氣候近以添重, 數年之間, 衰象漸甚悶悶。 暫憩後, 出來廊底, 午飯後, 入納實記一卷與持來略干物。 丈席先言以世忠祠之事, 頃者興陽 來到, 有云云說話, 以六字改世字之意折簡矣, 故余答曰: "臨發前數日奉覽矣。" 丈席曰: "與人相話, 不可以六忠祠爲可"云, 故答曰: "依敎施行矣。" 仍爲留宿。 夕飯後, 任實宗二人亦來。 廊底留一客, 故問其所居, 則乃同道光陽 朴楨一也。 其喜與他有別, 幸幸。 仍爲同留。 行三十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