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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행록(西行錄)
  • 1821년(신사)
  • 3월(三月)
  • 16일(十六日)

서행록(西行錄) / 1821년(신사) / 3월(三月)

자료ID HIKS_OB_F9008-01-202010.0010.0003.TXT.0017
16일
태평동(太平洞)의 송 진사(宋進士) 집에 가서 《장릉지(莊陵誌)》주 42)를 보고 싶다고 누누이 부탁하였더니, 다른 곳에서 구해 오겠다고 하기에 오후에 다시 오기로 약속하였다. 삼청동(三淸洞)승지 이헌기(李憲綺) 집으로 갔으나 승지가 궐내로 들어가 만나지 못하고, 그 아우인 주서(奏書) 헌위(憲緯)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호동(壺洞)의 남상(南相) 집에 갔으나 남상(南相)도 입궐하여 만나지 못했다. 돌아오는 도중에 길에서 공서(公瑞)를 만나 잠깐 이야기하다가 오후에 나오겠다고 하기에 좋다고 답하였는데, 종각에 와서 기다려도 끝내 오지 않았다. 오는 길에 태평동에 들렀더니 진사가 《장릉지》를 얻어 오라고 종씨(從氏)의 집에 노복을 보냈는데, 잃어버려서 없다고 답하였다니 한탄스럽다. 곧바로 나와 주인집으로 갔는데, 공서(公瑞)가 찾아왔다가 우리들이 없어서 도로 들어갔다고 하니, 한탄스럽다.
주석 42)장릉지(莊陵誌)
단종이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긴 뒤 강원도 영월로 추방되어 죽기까지의 사실과 숙종 때 복위된 과정을 기록한 책이다. 1711년에 박경여(朴慶餘)와 권화(權和)에 의해 목판본 4권 2책으로 처음 간행되었다. 이 책은 1711년(숙종37) 당시 영월부사 윤순거(尹舜擧)가 편찬한 《노릉지(魯陵誌)》 2권을 구지(舊誌)라 하고, 그 뒤 박팽년(朴彭年)의 9세손 경여가 권화와 함께 속지(續誌) 2권을 증보해 《장릉지》라고 개제하였다. 구지인 《노릉지》는 노산군(魯山君)의 능호(陵號)에 따른 것이고, 구지와 속지를 합편, 개제한 《장릉지》는 노산군이 숙종 때 단종으로 복위된 뒤의 능호인 장릉(莊陵)에 따른 것이다.
十六日
太平洞 進士家, 以《莊陵誌》得見之意, 累累言托, 卽求得他處云, 故以午後更來爲約。 往三淸洞 承旨 憲綺家, 則承旨入闕內, 不得相面, 與其弟奏書憲緯暫敍。 往壺洞 家, 則亦入闕, 不得相面, 而來路逢公瑞於路上, 暫話以午後出來爲言, 故答以好矣, 而來待鍾閣, 終不來, 故來路入太平洞, 則進士以《莊陵誌》得來之意, 專爲送奴於其從氏家矣。 答以見失不在云, 可歎, 而卽爲出來主人家, 則公瑞出來, 以吾輩之不在, 還爲入去云, 可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