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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행록(西行錄) / 1821년(신사) / 3월(三月)

자료ID HIKS_OB_F9008-01-202010.0010.0001.TXT.0001
3월
지난 경신년(1820, 순조20) 3월, 나는 아버님을 모시고 상경하여 서울에서 몇 달을 머물다가 왔다. 금년 신사년(1821, 순조21)에 서재(西齋)주 1) 선조의 행록(行錄)을 개간하기로 해서 오촌(鰲村) 장석(丈席)주 2)의 서문을 받아 오도록 문중(門中)에서 나와 이찬(而贊)에게 위임하였다. 그래서 지금 호행(湖行)에 필요한 행장을 꾸려서 경성(京城)으로 갈 계획이다.
주석 1)서재(西齋) 선조
송간(宋侃, 1405~1480)으로, 본관은 여산(礪山), 호는 서재(西齋)이다. 세종·문종·단종의 3조를 섬겨 벼슬이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이르렀다. 1455년 왕명으로 남방을 순시하고 돌아오다가 단종이 영월로 쫓겨 갔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영월에 가서 복명하고, 고향 여산으로 돌아가 두문불출하였다. 단종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깊은 산속에 들어가 삼년상을 마치고, 흥양(興陽) 마륜촌(馬輪村) 산정(山亭)에 숨어 지냈다. 10여 년 뒤에 가족이 찾아냈으나 항상 술에 만취하여 산천을 돌아다니며 대성통곡하므로 모두들 미쳤다고 하였다. 그러다가 생애를 마쳤는데, 지금도 그곳을 서재동(西齋洞)이라 한다. 《일성록》 정조 17년 계축(1793) 12월 21일에 충강(忠剛)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주석 2)오촌(鰲村) 장석(丈席)
송치규(宋穉圭, 1759~1838)로,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기옥(奇玉), 호는 강재(剛齋)이며, 송시열(宋時烈)의 6대손이다. 순조 때 이조참판까지 올랐으나 모두 사퇴하였고, 현종 때 정헌 대부에 올랐다. 천성이 온순하고 의리에 투철하여 그가 죽자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으며, 문인 100여 명이 상복을 입고 상여를 따랐다. 이이, 김장생의 학문을 계승하여 '이기일원론'을 주장하였으며, 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송치규의 온순한 성정에 스승인 김정묵이 호를 강재라 지어 주었다고 하는데, 51세 때 회덕의 오촌으로 이사를 가고 난 다음에는 오촌을 자신의 호로 사용한 듯하다. 저서로 《강재집(剛齋集)》이 있다.
三月
庚申三月, 余陪親上洛, 留數月而來矣。 今年辛巳, 西齋先祖行錄, 將欲開刊, 而受弁卷之文於鰲村丈席之意, 門中屬余及而贊, 故今將治發湖行, 仍向京城計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