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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행록(西行錄) / 1811년(신미) / 중춘(仲春)

자료ID HIKS_OB_F9008-01-202010.0009.0001.TXT.0001
중춘
아! 이는 선고(先考) 절와부군(節窩府君)주 1)께서 우리 집안의 보첩(譜牒)과 선조 충강공(忠剛公)의 시호(諡號)를 청하는 일로 서행(西行)한 것을 기록한 일기(日記)이다.
아! 선조가 아름다운 행적을 남겼는데도 자손이 그것을 기술하지 않는다면 이는 자기 선조를 잊어버린 것이요, 선조가 아름다운 행적이 없는데도 자손이 거짓말을 꾸며서 치켜세운다면 이는 자기 선조를 기만한 것이다. 잊어버린 것과 기만한 것이 비록 성격은 다르다 할지라도 불의(不義)의 나락에 떨어지는 것은 매한가지이다. 그러므로 문인(文人)이나 학사(學士)들이 그 선조의 덕을 스스로 기술한 것은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태사공(太史公) 사마천(司馬遷)은 스스로 그 세가(世家)의 실보(實譜)를 기술하여 선열(先烈)을 잊지 않았으며, 주자(朱子) 또한 위옹(韋翁)주 2)의 행록(行錄)을 기술하되 선조의 뜻을 기만하지 않았으니 후세 사람들이 이를 훌륭하게 여겼다. 불초가 비록 옛사람의 만분의 일이라도 감히 바랄 수는 없지만 어찌 감히 거짓말로 꾸며 선조의 덕을 기만하겠는가.
아! 우리 선고(先考)께서는 충효 집안의 명성을 잘 따라 선업을 빛내고 후손을 위하는 것으로 자신의 책무를 삼아 10여 년 동안 서울을 오르내리는 것이 거의 수십 차례였는데, 시호를 내려 주는 은전(恩典)이 특별히 내려 백대(百代)의 보첩(譜牒)이 능히 완성되었다.
아! 진실로 우리 선조의 순수한 충성과 아름다운 절의가 대범하고 특출한 것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조정의 은전을 받을 수 있었겠는가. 또한 우리 선고(先考)의 선조를 위한 성의(誠毅)가 지극한 것이 아니었다면 또한 어찌 그 일을 이룰 수 있었겠는가. 다만 선인(先人)이 뜻을 두었으나 아직 이루지 못한 것이 남아 있다. 이는 근대(近代) 양세(兩世)에 시호(諡號)를 청하는 일로 여러 차례 상언(上言)을 올렸는데 끝내 은전을 받지 못하였다. 이 때문에 통탄스럽기 그지없지만, 깊이 생각해보건대 한 집안의 대사가 동시에 이루어진다는 것이 일의 형편상 끝내 쉽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혹 시운이 돌아오지 않아서 그러한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아! 일의 전말이 여기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으니, 불초(不肖)가 감히 덧붙일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건대 위의 기록은 햇수에 따라 기록되어 있어 혹은 물에 잠겨 자획(字畵)을 판별하기도 어렵고 혹은 먼지 속에 파묻혀 문리(文理)를 이해하기도 어려워 세월이 오래되면 장차 유실(遺失)되고 훼손되는 결과를 면치 못할 것 같았다. 그러므로 감히 이를 수집하고 베껴 써서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 우리 집안의 유물주 3)로 만들고, 장차 우리 선고(先考)의 자손 된 자들로 하여금 그 일을 생각하여 척연(惕然)히 계술(繼述, 선대의 사업을 계승)하게 하고 이 책을 열람하여 출연(怵然)히 느끼고 사모하여 백세(百世)토록 실추되지 않게 한다면 또한 어찌 선조를 계승하고 후손에게 복록을 물려주는 도리가 아니겠는가. 이에 감히 외람됨을 잊고 대강의 전말을 서술하였다.

숭정기원 후 네 번째 신미년(1811, 순조11) 중춘에 불초고(不肖孤) 석년(錫年)이 피눈물을 흘리며 삼가 쓰다.


서행록(西行錄) ③ - 송석년(宋錫年)
주석 1)절와부군(節窩府君)
송지행(宋志行)을 가리킨다. 부군(府君)은 죽은 아버지나 남자 조상을 높여 이르는 말이다.
주석 2)위옹(韋翁)
주자의 부친인 위재(韋齋) 주송(朱松, 1097~1143)으로, 남송 고종 때의 문신이자 학자이다. 위재는 호이고 자는 교년(喬年), 시호는 헌정(獻靖)이다. 남송 고종 때 이부랑(吏部郞)의 벼슬을 지냈으나 간신 진회(秦檜)가 주도하는 금나라와의 화의에 반대하다가 폄적되었다. 저서로 《위재집(韋齋集)》 등이 있다.
주석 3)청전(靑氈)
대대로 전승된 가업(家業)이나 한 유물을 가리킨다. 진(晉)나라 왕헌지(王獻之)가 누워 있는 방에 도둑이 들어와서 물건을 모조리 훔쳐 가려 할 적에, 그가 "도둑이여, 그 푸른 모포는 우리 집안의 유물이니, 그것만은 두고 가는 것이 좋겠다.[偸兒! 靑氈我家舊物, 可特置之.]"라고 하자, 도둑이 질겁하고 도망쳤다는 고사가 있다. 《晉書 卷80 王羲之列傳 王獻之》
仲春
嗚呼! 此先考節窩府君, 爲吾家譜牒與先祖忠剛公請諡事, 西行錄日記也。 噫!, 先祖有美實, 而子孫不述焉, 則是忘其先也; 先祖無美實, 而子孫飾虛辭稱道之, 則是誣其先也。 忘與誣雖殊, 其陷於不義則一也。 是故文人學士, 自述其先德者, 不可殫記。 太史自述其世家實譜, 而不忘其先烈, 朱夫子亦述其韋翁行錄, 而不誣其先志, 後世韙之。 不肖雖不敢望古人之萬一, 而安敢飾虛辭誣先德也? 嗚呼! 吾先考克遵忠孝家聲, 以光先裕後爲己責, 十餘年間, 上下京洛將至數十度, 而贈諡之恩典特蒙, 百代之譜牒克成。 噫! 苟非吾先祖精忠姱節磊落偉卓, 安能蒙朝家之全? 亦非吾先考爲先誠毅之極, 亦安能就其事乎? 但先人之有志, 未就者存焉。 近代兩世請諡事, 累呈上言, 終未蒙恩典。 庸是爲痛遺恨, 盖深竊想一家之大事, 同時幷成, 事勢之終未易而然歟? 抑或運會之不迴而然歟? 嗚呼! 事之顚末, 詳記於是錄, 則非不肖所敢贅者, 而竊恐右錄隨年隨記, 或水沈而字畵難辨, 或塵埋而文理難曉, 歲久年深, 將未免遺失而毁傷, 故敢此收集謄, 合爲一卷, 以爲吾家之靑氊, 將使爲吾先考之子孫者, 想其事而惕然繼述, 覽是編而怵然感慕, 以至百世而不墜, 則亦豈非承先貽後之道也耶? 玆敢忘猥, 略敍顚末。
崇禎紀元後, 四辛未之仲春, 不肖孤 錫年, 泣血謹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