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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행록(西行錄)
  • 1800년(경신)
  • 3월(三月)
  • 17일(十七日)

서행록(西行錄) / 1800년(경신) / 3월(三月)

자료ID HIKS_OB_F9008-01-202010.0008.0001.TXT.0016
17일
주인이 마필을 사고자 하는 뜻이 있었으므로 새벽에 매매를 하였다. 노량(露梁)까지 걸어서 육사묘(六死墓)주 2)를 배알하였는데, 단지 성(成)·박(朴)·이(李)·유(兪) 네 선생의 표갈(表碣)만 있고, 하(河)·류(柳) 두 선생의 묘에 표석(表石)이 없어주 3) 자세히 알 수 없으니, 한탄스럽다. 다만 묘의 모습이 무너져서 겨우 몇 줌의 배토(杯土)만이 무덤을 덮고 있는데, 사초를 개수하고 영축(營築)할 사람이 없었다. 삼가 생각건대, 육신(六臣)의 절의는 만고토록 세울 강상(綱常)이라 할 만한데도 수호할 사람이 없어 장차 매몰되어 징험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길 가는 사람들의 탄식과 지사(志士)들의 눈물을 어찌 다 말할 수 있겠는가.
나루터에 이르러 앞다투어 강을 건널 때 멀리 언덕 위를 바라보니 팔아 버린 말이 나루에 와서 서 있었는데, 이는 필시 물리려는 계책인 것이다. 선공(船工)을 재촉하여 급히 강을 건넜다. 우연히 사두(沙頭)에서 고마(雇馬)를 얻어 짐을 싣고 말을 타고서 채찍을 재촉하여 청파(靑坡) 송상원(宋尙源)의 집에 이르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말을 끌고 찾아와서 곤란한 말을 하고 도로 물렸다. 아침을 먹은 뒤에 차동(車洞)팔선(八仙) 집에서 머물러 있다가 동행하여 들어가 영감(令監)을 만났는데, 온 집안이 무탈하였다.
주석 2)육사묘(六死墓)
1456년(세조2) 단종 복위운동(端宗復位運動)을 하다가 순절한 사육신묘(死六臣墓)로, 서울 동작구 노량진에 있다. 사육신은 '성삼문·하위지·이개·유성원·박팽년·유응부' 등 여섯 명의 충신을 일컫는 말이다. 이들은 함께 거사를 계획했던 김질의 배신으로 체포되어 가혹한 고문을 당한 뒤 죽음을 당했지만, 숙종 대에 이르러 복권되었다.
주석 3)하(河)·류(柳)……없어
하위지(河緯地)와 유성원(柳誠源)을 말한다. 사육신묘는 원래 박팽년(朴彭年)·유응부(兪應孚)·이개(李塏)·성삼문(成三問)의 묘만 있었고, 하위지(河緯地)와 유성원(柳誠源)의 묘는 없었는데, 서울시에서 1977~1978년까지 사육신 묘역의 정화 공사를 할 때, 하위지와 유성원의 가묘(假墓)를 추봉(追封)하여 사육신의 묘를 모두 갖추게 되었다.
十七日
曉頭主者有願買馬匹之意, 故因爲買賣。 徒步至露梁, 拜謁六臣墓, 只有四先生表碣, 兩先生之墓無表石, 不得詳知, 可歎。 但墓貌崩頹, 僅有數杯土封域, 而無人改莎營築。 竊念六臣之節, 可謂綱常萬古, 而守護無人, 將至於埋沒無徵之境, 行路之咨嗟, 志士之隕涕, 曷可勝言? 至津頭, 爭先渡江之際, 遙見岸上, 所賣之馬, 來立津頭, 必是欲退之計也。 催促船工, 急急渡江。 偶於沙頭得雇馬, 駄而騎之, 催鞭至靑坡 宋尙源家矣。 不移時持馬來訪, 困說還退矣。 朝飯後, 至車洞 八仙家住着, 同行入見令監, 擧家姑無恙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