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역/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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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행록(西行錄)
  • 1792년(임자)
  • 10월(十月)
  • 11일(十一日)

서행록(西行錄) / 1792년(임자) / 10월(十月)

자료ID HIKS_OB_F9008-01-202010.0001.0002.TXT.0011
11일
닭이 울 때 길을 나서 함녕(咸寧)까지 20리를 갔다. 동쪽 하늘에 먼동이 트기 시작했지만 비가 내린데다가 첨지의 말이 복통이 있었으므로 막소에서 조금 쉬었다. 비는 개지 않았으나 말의 병에 조금 차도가 있어 길을 떠났다. 봉산(鳳山) 10리에 이르러 아침을 먹고 말에게 꼴을 먹였다. 여러 방법으로 말을 치료했으나 끝내는 나아질 기세가 없으므로 결국 첨지는 뒤쳐지고 말았다.
이에 시종 혼(混)과 길을 나섰더니 찬바람이 강하게 불어 간신히 동선령(洞仙嶺)주 48)을 넘었다. 조남발소(鳥南撥所)에 이르러 국수와 떡을 사 먹었는데, 봉산(鳳山)이 그것으로 유명했기 때문이다. 황주(黃州) 읍내까지 10여 리를 가서 묵었다. 날도 저물었지만 바람이 차고 길이 얼어붙어서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조남(鳥南) 객점에 이르니 또한 명승지였다. 두 산이 서로 마주보고 있는 것이 엄연히 석문(石門)이 되었는데, 바위의 형상은 층층이 바둑돌을 쌓아 놓은 듯하였고, 박계(朴桂)주 49)로 지탱한 듯 중천에 높이 솟아 있으니 참으로 기이하고 절묘한 곳이었다. 절구 한 수를 읊었다.

찬비 개니 세찬 바람 불어오고(冷雨初晴風力緊)
동선령 위에 눈이 흩날리네(洞仙嶺上雪浮浮)
밤낮없이 서도주 50) 길 떠나 얻은 것 무엇이런가(日夜西征何所得)
묘향산 풍물을 비단 주머니주 51)에 담았노라(香山風物錦橐捉)

조남산성(鳥南山城)에서 또 한 수를 읊었다. 시는 다음과 같다.

열성조 서쪽 변방 근심 예사롭지 않아(列聖西憂不等閑)
동선령 아래에 겹겹의 관문 만들었네(洞仙嶺下設重關)
산성의 초목 몇 겁이 지났던가(山城草木何年劫)
초막살이 형편 풍년에도 고달프도다(峽戶生涯樂歲艱)
정갈한 솔떡은 진귀한 맛을 뽐내고(精白松餻誇異味)
맑고 단 차조술은 쇠한 얼굴 따뜻하게 하네(淸甘秫酒煖衰顔)
서툰 시 낭랑히 읊조리며 홀홀히 떠나니(浪吟拙句忽忽去)
정겨운 풍경 나 돌아오기를 기다리리(風景多情待我還)
주석 48)동선령(洞仙嶺)
현재의 황해북도 사리원시, 황주군, 봉산군과의 분기점에 위치한 고개로 정방산(正方山)의 동남쪽에 있는 험준한 요새이며 서북의 관문이다. 옛날에 신선이 내린 고개라 하여 '동선령'이라 한다.
주석 49)박계(朴桂)
밀가루나 쌀가루를 반죽해서 네모진 모양으로 납작하게 빚어 바싹 말린 뒤에 기름에 튀겨 꿀을 바르고 그 위에 튀밥이나 깨고물을 앞뒤에 입힌 유밀과(油蜜果)를 말한다.
주석 50)서도
서도(西道)는 서관(西關)으로, 황해도와 평안도를 통칭하는 말이다.
주석 51)묘향산……주머니
보관할 만한 가치가 있는 훌륭한 시를 비유한다. 원문의 '금탁(錦槖)'은 금낭(錦囊)과 같은 말로 시를 적어서 넣는 비단 주머니이다. 당(唐)나라의 시인인 이하(李賀)가 날마다 명승지를 다니면서 해(奚)라는 어린 종에게 비단 주머니[錦囊]를 지고 따르게 하여 시를 짓는 즉시 주머니에 담았던 고사에서 유래하였다. 《新唐書 卷203 文藝列傳下 李賀》
十一日
鷄鳴登程, 至咸寧二十里。 天始開東, 而雨作且馬腹痛, 故小歇幕所。 雨雖不霽, 馬病小差, 離發到鳳山十里, 朝飯秣馬。 多方治馬, 而終無差勢, 遂落後。 遂與傔登程, 則寒風大作, 艱辛踰洞仙嶺。 至鳥南撥所, 買食麵餠, 盖鳳山之有名故也。 至黃州邑內四十里留宿。 日力雖暮, 而風寒冷凍, 無前進之路。 至鳥南之店, 亦名勝之地。 兩山相拱, 儼作石門, 而石狀疊積如累碁, 如撑朴桂, 高揷半天, 信奇絶處也。 吟一絶, "冷雨初晴風力緊, 洞仙嶺上雪浮浮。 日夜西征何所得, 香山風物錦橐捉。" 鳥南山城又吟一律, "列聖西憂不等閑, 洞仙嶺下設重關。 山城草木何年劫, 峽戶生涯樂歲艱。 精白松餻誇異味, 淸甘秫酒煖衰顔。 浪吟拙句忽忽去, 風景多情待我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