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역/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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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행록(西行錄)
  • 1792년(임자)
  • 10월(十月)
  • 9일(初九日)

서행록(西行錄) / 1792년(임자) / 10월(十月)

자료ID HIKS_OB_F9008-01-202010.0001.0002.TXT.0009
9일
이른 새벽에 길에 올랐는데 산길이 험악하고 산세가 구불구불하였다. 구금천(舊金川) 읍내에 이르자 비로소 날이 밝아왔다. 계정(鷄井)·두석애(豆石崖) 수문(水門)을 지나 옛 금천을 통하여 저제곡교(猪諸谷橋)를 건넜다. 그 다리 길이는 한눈에도 족히 한 마장(馬場)은 되보였으니, 이곳이 바로 경기황해 양도의 경계선이다. 냉정점(冷井店)에 이르러 아침을 먹고 말에게 꼴을 먹인 다음 사곡(蛇谷) 칠현(漆峴), 응봉장점(鷹峯場店) 칠현을 지났다. 평산 읍내 앞에는 태백산성(太白山城)주 44)이 있었다. 남천(南川) 금교역(金郊驛, 현 황해도 금천군의 역명), 석종발소(石宗撥所)주 45) 총수(蔥秀)주 46) 55리를 가서 유숙했다.
주석 44)태백산성(太白山城)
황해도 평산군 산성리 태백산에 있는 고구려 때의 돌성이다. 성벽의 바깥 부분은 돌로 쌓아서 만들고 내부는 흙을 채워 지었다. 성벽에는 5개의 치(雉)를, 동서남북의 육축(陸築) 위에는 문루를 세웠는데, 현재 남아 있는 동문과 서문은 조선 시대에 세운 것이다
주석 45)발소(撥所)
서울과 의주 사이의 길가에 군데군데 있던 역참으로, 정류소라고도 한다. 원래 중국의 역(驛)을 뜻하는 몽골어의 한역어(漢譯語)이다. 1864년에 편찬된 《대동지지》에, '석종발소(石宗撥所)'는 보이지 않고 '석우발소(石隅撥所)'라는 명칭이 보인다.
주석 46)총수(蔥秀)
저본의 '총수(叢數)'는 황해도 평산(平山)의 '총수(蔥秀)'의 오기인 듯하여 고쳐서 번역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41권 〈황해도(黃海道) 평산도호부(平山都護府)〉에 총수산(蔥秀山)은 부의 북쪽 30리에 있으며 총수관(蔥秀館)은 중국 사신이 머무르던 곳이라고 한다.
初九日
凌晨上程, 山路險惡, 山勢縈回。 至金川邑內, 日始明。 過鷄井豆石崖水門, 通舊金川, 渡猪諸谷橋。 其橋延袤爲, 初見洽滿一馬場, 是爲京畿黃海兩道之界也。 至冷井店, 朝飯秣馬。 過蛇谷漆峴、鷹峯場店漆峴平山邑內前, 有太白山城。 南川 金郊驛石宗撥所蔥秀五十五里留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