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역/표점
  • 국역/표점
  • 국역
  • 서행록(西行錄)
  • 1792년(임자)
  • 9월(九月)
  • 23일(二十三日)

서행록(西行錄) / 1792년(임자) / 9월(九月)

자료ID HIKS_OB_F9008-01-202010.0001.0001.TXT.0009
23일
날이 채 밝기 전에 길을 나섰는데, 새벽안개가 자욱하여 지척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였으니 마치 가랑비가 내리는 것처럼 옷이 다 젖어버렸다. 40리를 가서 인주원(仁周院)주 12)에 이르자 겨우 안개가 그치기 시작했다. 원터[院垈]주 13)에서 아침을 먹고 50리를 가서 말에게 꼴을 먹인 다음 길에 올랐다. 두어 마장(馬場)도 못가서 우연히 주동(鑄洞) 종인(宗人)을 만나, 시호(諡號)가 아직 명이 내려지지 않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천안(天安) 삼거리(三渠里)주 14)객점에서 묵었다. 이날 90리를 갔다. 대개 흉년의 긴 노정이다 보니 애초에 동행이 없어서 마음이 매우 답답하였는데, 이 석사(李碩士)와 나란히 말을 타고, 또 녹도(鹿島)에서 온 경한(京漢)을 만나 여정을 함께하게 되어 매우 기뻤다.
주석 12)인주원(仁周院)
충청남도 공주군 정안면 인주원 마을이다.
주석 13)원터[院垈]
충청남도 천안시 광덕면 원덕리에 있는 마을로, 조선조 때 원집이 있었다. 파발 제도가 잘 갖춰졌던 조선 시대에는 서울을 중심으로, 각 지방으로 향하는 주요 도로에 약 12km 정도마다 역을 두고 공용 여행자의 편의를 최대한 도모했다. 이러한 편의 시설이 있는 마을에는 '관터[館基]' '관말[館村]' '원터[院里, 院垈, 院村, 院洞], 역말[驛村, 驛里]등의 이름이 붙였다.
주석 14)천안삼거리(天安三渠里)
천안시의 동남구 삼룡동에 위치하여 조선 시대에 삼남대로(三南大路)의 분기점이었던 삼거리로, 길손을 재워주는 원과 주막이 즐비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천안)에는 고을 남쪽 6리에 삼기원(三岐院)이 있다고 하였는데, 이 삼거리를 말한다. 지금의 삼룡동(三龍洞) 지명도 1914년 이 삼거리와 용마산의 머리글자를 따서 만든 이름이다.
二十三日
未明登道, 而曉霧彌天, 不辨咫尺, 若細雨狀, 衣服盡濕。 行四十里, 至仁周院, 晩霞始霽矣。 朝飯院垈, 五十里程也, 秣馬登程, 不過數馬場, 忽逢鑄洞宗人, 聞知諡號之尙不命下至。 天安三渠里店留宿。 是日行九十里。 盖險歲長程, 初無同行, 故心切鬱鬱矣, 旣與碩士聯鞭, 又逢京漢之自鹿島來者, 同與行役, 可喜可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