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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렬공삼도통어영록(忠烈公三道統禦營錄)
  • 1639년 2월 21일 장계(狀啓)(崇德四年二月二十一日 狀啓)

충렬공삼도통어영록(忠烈公三道統禦營錄)

자료ID HIKS_OB_F1047-01-220201.TXT.0105
1639년 2월 21일 장계(狀啓)
105 경기수군절도사 겸 삼도통어사 나덕헌이 인조에게 보낸 장계(狀啓)
: 5곳 진포(鎭浦)의 전선(戰船)과 병선(兵船)의 순찰 결과를 보고하며, 철곶[鐵串] 부근의 바닷가 각 고을에 사는 육군(陸軍)과 철곶 소속의 먼 고을에 사는 수군을 서로 바꾸어 입방(入防)하게 해줄 것.

"신이 관할하는 5곳 진포(鎭浦)의 전선(戰船)과 병선(兵船)을 순찰하는 일에 대해서는 앞서 급히 보고하였습니다.주 223) 이달 12일에 순찰하다가 정포보(井浦堡)에 도착하여 전선과 병선에 설치된 각종 집물(楫物) 및 군기(軍器)와 궁전(弓箭)을 하나하나 숫자를 살펴서 점검해보니, 전(前) 정포만호(井浦萬戶) 정연(鄭𤥻)이 보수한 것들이 더러 있었고, 신임 정포만호 남두성(南斗星)은 부임한 지 겨우 4개월밖에 되지 않아서 전 정포만호가 미처 수리하지 못한 궁전을 간간이 보수한 것들이 있으나 별달리 대단히 마련해둔 물품은 없었습니다. 해당 전선은 개삭(改槊)할 차례가 되었으므로 정포만호 남두성을 각별히 신칙하여 별도로 새로 제작하라고 상세하고 분명하게 분부하였습니다.
13일에 정포에서 배를 출발시켜 장봉도(長峯島)에 정박하여 밤을 새고 새벽에 바람이 잔잔하기를 기다렸다가 영흥도(靈興島) 외양(外洋)을 경유하여 유시(酉時) 쯤에 화량(花梁)에 도착하였습니다. 다음날 각종 전선과 병선, 군기 등의 물품을 직접 하나하나 점검하였는데, 화량첨사(花梁僉使) 이인노(李仁老)가 부임한 초기부터 지금까지 나무를 덧대 개조한 전선과 병선이 4척이고 기타 궁전 등의 물품도 난리를 겪으면서 망가진 것들을 거의 다 수선하여 난리가 나면 사용할 수 있는 도구로 만들어놓았으니, 참으로 가상합니다. 영종만호(永宗萬戶) 최형립(崔亨立)은 전선이 불에 타서 화량진(花梁鎭)의 소재지에 대죄하고 있으므로 사유를 갖추어 급히 보고하였습니다.주 224)
16일 저녁 밀물 때에 화량진에서 배를 출발시켜 고지도(古枝島)에 정박하였다가 다음날 아침 밀물 때를 기다려 배를 출발시킬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밤중에 갑자기 세찬 바람을 만나 외양의 외로운 섬에 정박할 수가 없었으므로 도로 배를 운항하여 어렵사리 화량진의 소재지로 돌아왔습니다. 그랬다가 17일 아침 밀물 때에 바람이 잔잔한 덕에 화량진에서 대부도(大部島)의 외양을 거쳐 해시(亥時) 쯤에 덕포(德浦)에 도착하였습니다. 다음날 아침에 해당 진포의 전선과 병선 및 각종 집물 등을 점검해보니 덕포첨사(德浦僉使) 최준천(崔峻天)이 난리를 겪고 난 뒤에 부임하여 망가진 전선을 다방면으로 애써 비용을 마련하여 나무를 덧대 개조해서 난리가 나면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었으며, 기타 궁전 등도 간간이 보수한 것들이 있었습니다.
18일 아침 밀물 때에 덕포에서 배를 출발시켜 잉읍성(仍邑成), 손돌목[孫梁項], 갑곶[甲串], 연미정(燕尾亭) 등을 경유하여 강도(江都)의 사방 주위를 빙 돌면서 상세하게 순찰하였고, 저녁 밀물 때에 철곶[鐵串]에 도착하였습니다. 다음날 전선과 병선, 각종 군기, 기타 진보를 옮겨 설치한 뒤에 건축한 관청 건물 등을 하나하나 살펴보니, 철곶첨사[鐵串僉使] 박한남(朴翰男)이 난리를 겪고 난 뒤에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본직에 제수되어 초지(草芝)와 제물(濟物)의 건물을 철거하여 진보를 옮기고 나서 민가를 빌어 들어가 살면서, 난리를 겪으면서 파손된 집의 목재와 기와를 겨우 모아서 관청 건물을 10여 채나 지었습니다. 그리고 해당 진포의주 225) 전선으로는주 226) 망가진 방패선(防牌船)만 있었는데 작년에 그의 보고에 따라 주상께 보고하여 결정을 받아 공장(工匠)의 요포(料布)를 별도로 마련한 뒤 직접 충청도 안면곶[安眠串]에 내려가서 몇 개월 만에 전선을 새로 제작하여 돌아와서 정박시켰고 수많은 집물도 전부 새로 마련하였는데, 선박의 제도가 매우 견고하고 기타 궁전 등의 물품도 모두 보수하여 난리가 나면 쓸 수 있는 도구로 만들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심지어 오방신기(五方神旗)까지도 아울러 색칠하여 그려서 새로 마련하였습니다. 난리를 겪고 난 뒤에 수졸(水卒) 중 사로잡혀가거나 살해당하여 죽은 숫자가 대부분이어서 각 진포의 입방(入防)하는 군병이 평상시에 비해 그 숫자가 매우 적을 뿐만 아니라, 전선 1척을 새로 제작할 때 공장의 요포로 소요되는 비용이 많게는 10여 동(同)의 목(木)이 들어갑니다. 그런대도 박한남이 근면하게 직무를 수행하여, 새로 설치한 뒤 형편이 없던 진보를 위해 직접 분주하게 애를 써서 위에서 말한 물품들을 이렇게까지 제작하고 마련하였으니 참으로 가상합니다. 따라서 각별히 포상하고 장려하여 다른 사람을 권장하는 것도 불가할 것이 없을 듯합니다.
대체로 5곳 진보 중 철곶은 새로 설치된 진보로, 진보의 소재지에 거주하는 토병(土兵)은 2, 3명만 도로 모였으므로, 평상시에 전선과 병선을 지키는 군졸도 매달 입방하는 군병 중 일부 입방을 면제해준 자들이며, 도사공(都沙工)에게 비용을 대주는 군졸도 그 숫자가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잘못되어 비상사태가 생긴다면 전선 1척을 운용하는 격군(格軍)의 숫자가 100여 명이나 되는데, 철곶 소속의 수군들이 모두 내륙 지역에 살고 있어 가까이 사는 사람은 2, 3일 거리이고 멀리 사는 사람은 5, 6일 거리이니, 갑자기 배를 출발시키더라도 기한에 맞추어 도착할 리가 결코 없어 변장(邊將)은 가만히 앉아서 군율(軍律)을 기다려야만 할 상황이니 참으로 몹시 고민입니다. 묘당(廟堂)에서 해당 진보의 정황을 참작하여 철곶 부근의 바닷가 각 고을에 거주하는 육군(陸軍)과 철곶 소속으로서 내륙 지역의 먼 고을에 살고 있는 수군을 서로 번(番)을 바꾸어 입방하게 한다면, 비상사태가 일어났을 때에 편리하고 유익할 듯합니다. 그러나 제도를 개혁하는 일이므로 황공한 마음으로 감히 여쭙니다. 신은 20일에 본영(本營)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러한 연유를 아울러 급히 아룁니다. 차례대로 잘 아뢰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숭덕(崇德) 4년(1639, 인조 17) 2월 21일.

▶ 어휘 해설 ◀
❶ 오방신기(五方神旗) : 다섯 방향을 상징하는 각각의 색깔과 문양으로 만든 깃발을 가리킨다. 동쪽의 청룡기(靑龍旗)는 진영(陣營)의 왼쪽 문에 세워서 좌군(左軍)을 지휘하고, 서쪽의 백호기(白虎旗)는 오른쪽 문에 세워 우군(右軍)을 지휘하며, 남쪽의 주작기(朱雀旗)는 앞문에 세워 전군(前軍)을 지휘하고, 북쪽의 현무기(玄武旗)는 뒷문에 세워 후군(後軍)을 지휘하며, 중앙의 등사기(騰蛇旗)는 중앙에 세워 중군(中軍)을 지휘한다.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 「기치(旗幟)」에 의하면, 신기(神旗)는 깃발 아래에 바퀴를 달아 수레를 만들고 수레마다 의장군(儀仗軍)이 끌고 다닌다고 하였다.
주석 223)
'102 나덕헌의 장계' 참조.
주석 224)
'104 나덕헌의 장계' 참조.
주석 225)
저본에는 원문 '同' 1자가 결락되어 판독할 수 없으나, 전후의 문맥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주석 226)
저본에는 원문 '戰' 1자 뒤에 '戰' 1자가 더 있으나, 전후의 문맥에 의거하여 삭제하였다.
崇德四年二月二十一日 狀啓
"臣所管五浦戰、兵船巡審事, 已爲馳啓爲白有如乎. 本月十二日, 巡到井浦堡, 戰、兵船所坐各樣楫物及軍器、弓箭, 一一照數點閱, 則前萬戶鄭𤥻, 或有修補之數, 新萬戶南斗星, 到任僅至四朔, 前萬戶未及修造弓箭乙, 間間有修補之數, 別無大端措備之物. 而同戰船改槊當次是白乎等以, 萬戶南斗星乙, 各別申飭, 別樣新造事, 詳明分付爲白有齊. 十三日, 自井浦發船, 長峯島止泊經夜, 曉頭候風, 由靈興島外洋, 酉時量, 到花梁. 翌日, 各樣戰·兵船、軍器等物, 親自一一照點爲白乎矣, 花梁僉使李仁老, 自到任之初至于今, 戰、兵船添木改造者四隻, 其他弓箭等物段置, 經亂頹敗之數, 殆盡修繕, 以爲臨亂可用之具, 誠爲可嘉爲白齊. 永宗萬戶崔亨立段, 戰船付火, 待罪花梁鎭下是白乎等以, 具由馳啓爲白有齊. 十六日夕水, 自花梁發船, 止泊古枝島, 待翌日朝水, 行船計料是白如乎. 夜半良中, 卒遇狂風, 外洋孤島, 不能留泊, 還爲行船, 艱到花梁鎭下爲白有如可. 十七日朝水, 因順風, 自花梁由大部島外洋, 亥時量, 到德浦. 翌日朝, 照點同浦戰·兵船、各樣等物, 則僉使崔峻天, 亂後赴任, 頹敗戰船乙, 多般拮据添木改造, 以爲臨亂可用之物, 其他弓箭段置, 間間有修補之數是白齊. 十八日朝水, 自德浦發船, 由仍邑成、孫梁項、甲串、燕尾亭等, 環江都四面周回, 詳細巡審爲白遣, 夕水, 到鐵串. 翌日戰·兵船、各樣軍器、其他移設之後營造公廨等物乙, 一一看審, 則僉使朴翰男, 經亂之後, 自南漢除授本職, 草芝、濟物撤破移鎭之後, 借入民家, 經亂破家材瓦, 僅僅鳩集, 公廨造作, 至於十有餘同. 同浦戰船, 只有頹敗防牌船是白去乙, 上年因渠所報啓聞定奪, 工匠料布乙, 別樣措備, 親自下去忠淸道安眠串, 數月之內, 新造戰船回泊, 許多楫物乙, 沒數新備, 船制極其牢固, 其他弓箭等物段置, 竝只修補以爲臨亂可用之具叱分不喩. 至於五方神旗, 幷以綵畵新備爲白有臥乎所. 經亂之後, 水卒擄殺存沒之數居多, 各浦入防之軍, 比平時, 其數靈星叱分不喩, 一戰船新造工匠料布, 該用多至十有餘同之木, 則朴翰男, 奉職勤幹, 新設無形之鎭, 親自奔走, 上項營造之物, 已至於此, 誠爲可嘉. 各別褒獎以勸他人, 似無不可是白齊. 大槪五堡之中鐵串, 新設之鎭以, 鎭下土兵數三名叱分還集爲白有遣, 戰、兵船常時守直軍士段置, 每朔入防之軍以, 除除良除防, 都沙工給代, 其數不多是白去等. 脫有緩急, 一戰船運用格軍之數, 至於百餘名, 而鐵串所屬水卒, 皆在於內地, 近者數三日程, 遠者五六日程, 則卒然發船, 萬無及期之理, 邊將坐待軍律而已, 誠爲竭悶是白去乎. 請令廟堂參酌同鎭事勢, 鐵串附近沿邑各官所居陸軍果鐵串內地遠官水軍以, 換番入防是白在如中, 緩急之間, 似爲便益爲白乎矣. 事係更張, 惶恐敢稟爲白在果. 臣二十日還營. 緣由幷以馳啓爲白臥乎事是良厼. 詮次善啓向敎是事."
崇德四年二月二十一日.
❶ 同 : 저본에는 원문이 결락되어 판독할 수 없으나, 전후의 문맥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❷ 戰 : 저본에는 이 뒤에 원문 '戰' 1자가 더 있으나, 전후의 문맥에 의거하여 삭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