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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렬공삼도통어영록(忠烈公三道統禦營錄)
  • 1638년 5월 9일 관문(關文)(崇德三年五月初九日 關文)

충렬공삼도통어영록(忠烈公三道統禦營錄)

자료ID HIKS_OB_F1047-01-220201.TXT.0059
1638년 5월 9일 관문(關文)
059 경기관찰사 겸 순찰사 김남중(金南重)이 경기수군절도사 겸 삼도통어사 나덕헌에게 보낸 관문(關文) : 충청감사(忠淸監司) 정태화(鄭太和)의 장계(狀啓)에 따라 진관(鎭管)의 중군(中軍) 이하를 등제(等第)하는 일은 수사(水使)가 직접 행할 것.

무인년 5월 14일 도착.

경기관찰사 겸 순찰사가 살펴서 시행할 일 때문에 보낸다.
"이번에 도착한 병조의 관문에 이르기를,
'이번에 재가하신 충청감사(忠淸監司) 정태화(鄭太和)의 장계(狀啓)에 아뢰기를,
「관찰사와 절도사의 직임은 각각 관장하는 일이 있습니다. 근년 이래로는 관찰사에게 순찰사의 호칭을 겸하게 하였기 때문에, 조정의 본래 의도는 도내의 군정(軍政)을 총괄적으로 알고 있다가 비상 사태가 발생한 날에는 통제하게 하려던 의도였지, 원래 사안에 따라서 관직만 구비해두려던 의도가 아니었습니다.주 113) 만약 관찰사가 체면만 알고 매번 제재할 생각을 하여 예사로운 군무(軍務)조차도 병사(兵使)에게 전적으로 위임하지 않는다면, 정무(政務)를 시행할 수 없을 듯합니다.주 114) 그래서 신이 부임한 이후로는 항상 병사와 수사(水使)에게 신의 이러한 뜻을 알도록 하여 방해되는 사태가 없게 하였습니다.
〈심지어 각 진관(鎭管)의 중군(中軍) 이하에 대한 포폄(褒貶)을 다른 도에서는 병사가 마련하여 주상께 보고한다.〉
라고 하는데, 본도(本道)의 근래 규례는 근무 상태에 대한 진관의 보고에만 근거해서 등제(等第)하여 보고하니, 몹시 불성실한 일입니다. 병영(兵營)에서 주상께 보고하는 것이 참으로 사리에 합당합니다. 이번 6월부터 시작하여 이대로 시행할 것을 병조에서 주상께 아뢰어 결정을 받게 해주소서.」
라고 하였다. 그 서장(書狀)에 의거하여 본조(本曹)가 올린 계목(啓目)에 아뢰기를,
「재가받은 문서를 첨부하였습니다. 옛날에 관찰사의 호칭만 가지고 있을 때에는 병사와는 상호간에 관문을 사용하였고 수사는 첩정(牒呈)을 사용하였는데, 당시에는 순찰사라는 호칭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병사가 통제를 받는 일이 없었고주 115) 모든 군무에 관한 사안은 병사가 전적으로 관장하여 담당하게 하였습니다. 순찰사는 총괄적으로 관리하기만 해야 순찰사라는 체모에 맞는 것인데, 근래에는 순찰사가 체면만 스스로 지키려고 하고 병사에게는 예사로운 군무조차도 스스로 전담할 수 없게 하며, 심한 경우에는 병영에 전해져오던 당연히 사용해야 할 물품마저도 빼앗아 감영(監營)에 소속시키고, 봄과 가을의 시재(試才)를 시행하기 위한 순행도 순찰사의 분부가 아니면 마음대로 나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각 도(道)가 똑같이 그처럼 방해되는 폐단이 있습니다. 군무가 허술해지는 이유는 모두 참으로 여기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충청감사 정태화가 이와 같은 폐단을 깊이 알고서 사유를 갖추어 주상께 급히 보고하였는데, 진관의 중군 이하 근무 상태를 등제하는 일도 장계에서 아뢴 대로 함께 시행하라고 각 도에 아울러 공문을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라고 하니, 숭덕(崇德) 3년(1638, 인조 16) 5월 5일에 동부승지(同副承旨) 신(臣) 최유연(崔有淵)이 담당하여,
「〈아뢴 대로 윤허한다.〉라고 재가받았다.」
라고 판부(判付)하였다. 판부의 내용을 잘 살펴서 시행하되, 수사에게도 아울러 통지하여 시행하게 하라.'
라고 하였다. 관문 안의 내용을 살펴서 시행하라. 그러므로 관문을 보낸다."
숭덕 3년 5월 9일.

▶ 어휘 해설 ◀
❶ 진관(鎭管) : 진관은 두 가지의 의미로 나누어볼 수 있다. 하나는 전국의 행정 조직인 읍(邑)을 군사 조직인 진(鎭)으로 편성하여 관할하던 체제를 가리킨다. 진관 체제에서는 각 도의 군사 조직을 각각 주진(主鎭), 거진(巨鎭), 제진(諸鎭)으로 나누고, 주진이 거진을 통솔하고 거진이 제진을 통솔하도록 하였다. 거진은 각 도의 절도사(節度使)가 있는 군영(軍營)을 가리키고, 거진은 각 도의 고을이나 진포(鎭浦) 중 중심이 되는 몇몇 고을과 진포로 지정된 군영을 가리키며, 제진은 거진에 소속된 고을이나 진포의 군영을 가리킨다. 또 하나는 거진을 가리킨다. 거진으로 지정된 곳은 고을이나 진포의 이름 아래에 '진관' 2자를 붙여 거진임을 나타내었다. 『대전통편(大典通編)』 「병전(兵典)」 〈외관직(外官職)〉에 수록된 경기의 진관을 예로 들면, 광주진관(光州鎭管), 수원진관(水原鎭管), 양주진관(楊州鎭管), 월곶진관[月串鎭管], 덕포진관(德浦鎭管) 등이 있었다. 그중 월곶진관과 덕포진관은 수군(水軍)의 거진이고, 나머지는 육군(陸軍)의 거진이다.
❷ 시재(試才) : 지방 특수군의 장교(將校)와 군병(軍兵)을 대상으로 해마다 1, 2차례씩 정기적으로 시행하던 과시(科試)의 일종이었다. 시재는 시행 지역과 응시 대상에 따라 강화부(江華府)의 장의려시재(壯義旅試才), 개성부(開城府)의 선무군관시재(選武軍官試才), 통제영(統制營)의 장사시재(將士試才), 동래부(東萊府)의 별기위시재(別騎衛試才), 남한산성(南漢山城)의 군관시재(軍官試才), 수원(水原)과 파주(坡州)의 별효기사시재(別驍騎士試才), 제도(諸道)의 마병시재(馬兵試才) 등이 있었다.
주석 113)
각 도(道)의 관찰사(觀察使)에게 순찰사(巡察使)를 겸하게 한 것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직후부터 시작되었다. 선조 25년(1592) 5월 6일(을축)에 황해감사(黃海監司) 조인득(趙仁得)에게 순찰사를 겸하게 하였고, 이후로 필요한 도에는 관찰사가 순찰사를 겸하게 하였다. 『선조실록』 25년 5월 6일(을축), 7월 12일(기사)·17일(갑술), 10월 29일(을묘); 『광해군일기』 1년 3월 10일(신묘).
주석 114)
저본에는 원문 '政' 1자가 '停' 1자로 되어 있으나, 전후의 문맥에 의거하여 수정하였다.
주석 115)
저본에는 원문 '無' 1자가 '有' 1자로 되어 있으나, 전후의 문맥에 의거하여 수정하였다.
崇德三年五月初九日 關文
戊寅五月十四日到付.
兼巡察使爲相考事.
"節到付兵曹關內, '節啓下敎忠淸監司鄭太和狀啓內, 「觀察、節度之任, 各有所掌. 近年以來, 令觀察使兼巡察使之號, 故朝廷本意, 欲使摠知道內兵政節制有事之日, 元非隨事備官之意. 徒知體面, 每思裁制, 尋常軍務, 亦不專委於兵使, 則恐不能展布政事. 臣到任以後, 常使兵、水使知臣此意, 俾無掣肘之患爲白在果. 〈至於各鎭管中軍以下褒貶乙, 他道, 則兵使磨鍊啓聞.〉是如爲白乎矣, 本道近例, 只憑鎭管勤慢之報, 等第以啓, 殊不着實. 自兵營啓聞, 實合事理. 今六月爲始, 依此施行事乙, 令該曹定奪.」事書狀據曹啓目, 「粘連啓下是白有亦. 在昔觀察使時, 則與兵使通關, 水使牒呈矣, 以無帶巡察使之號, 故兵使無受制之事, 而一應軍務之事, 則使兵使專掌次知. 巡察使只統領而已, 乃巡察之得體, 而近來巡察使, 徒能自存體面, 使兵使, 尋常軍務, 亦不得自專, 至於甚者, 流來兵營應用之物, 亦爲奪屬監營, 春秋試才, 非巡察分付, 則不得任意出巡. 故其掣肘之弊, 各道同然. 兵務虛疎, 無非實由於此是白如乎. 忠淸監司鄭太和深知如許之弊, 具由馳啓爲白有昆, 鎭管勤慢等第之事乙良置, 依狀啓一體施行之意, 各道幷以行移, 何如?」 崇德三年五月初五日, 同副承旨臣崔有淵次知, 「啓, 〈依允.〉」敎事是去有等以. 敎旨內事意, 奉審施行爲乎矣, 水使處, 幷以知委施行向事.'關是置有亦. 關內辭緣, 相考施行向事. 合行云云."
崇德三年五月初九日.
❶ 政 : 저본에는 원문이 '停'으로 되어 있으나, 전후의 문맥에 의거하여 수정하였다.
❷ 無 : 저본에는 원문이 '有'로 되어 있으나, 전후의 문맥에 의거하여 수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