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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렬공삼도통어영록(忠烈公三道統禦營錄)
  • 1637년 7월 7일 관문(關文)(丁丑七月初七日 關文)

충렬공삼도통어영록(忠烈公三道統禦營錄)

자료ID HIKS_OB_F1047-01-220201.TXT.0008
1637년 7월 7일 관문(關文)
008 경기관찰사 겸 순찰사 여이징(呂爾徵)이 경기수군절도사 겸 삼도통어사 나덕헌에게 보낸 관문(關文) : 해로(海路) 봉수(烽燧)의 연제도형(連梯圖形)을 신속히 올려보낼 것.

정축년(1637, 인조 15) 7월 7일에 도착함.
경기관찰사 겸 순찰사가 살펴서 시행할 일 때문에 보낸다.
"전에 도착한 병조(兵曹)의 관문(關文)에 이르기를,
'전쟁이 일어났을 때에 각 도(道) 봉수(烽燧)의 연제도형(連梯圖形)을 모두 잃어버렸다. 봉수를 올렸는지 올리지 않았는지 상황을 서로 확인해본 뒤 처리하려고 하므로 봉수의 연제도형을 서둘러서 올려보내라.'
라고 하였다. 육로(陸路)의 봉수는 본영(本營)이 연제도형을 올려보냈지만, 해로(海路)의 봉수는 연제도형을 본영이 전처럼 신속히 보내라. 그러므로 관문을 보낸다."

▶ 어휘 해설 ◀
❶ 봉수(烽燧) : 변경의 상황을 서울까지 신속하게 알리기 위해 횃불을 들어 올리거나 연기를 피워 올려서 연락하던 제도이다. 조선 시대에는 남산에 5개의 봉수대(烽燧臺)를 설치하여 전국에서 5개의 경로로 올라오는 변경의 상황을 전달받아 병조와 승정원을 통해 국왕에게 보고하였다. 그에 따라 전국에는 5개의 경로로 나누어 일정한 거리마다 봉수대를 설치하고 관리자를 두었다. 전국 5개의 봉수 경로와 그것을 받는 남산의 봉수대에 대해서는 『경국대전』, 『전율통보』, 『만기요람』에 각각 수록되어 있는데, 약간씩 차이가 있다. 그중 『전율통보』에 수록된 규정에 의하면, 남산의 첫 번째 봉수대는 함경도, 강원도, 경기를 거쳐온 양주(楊州) 아차산(峨嵯山)의 봉수를, 두 번째 봉수대는 경상도, 충청도, 경기를 거쳐온 광주(廣州) 천림산(天臨山)의 봉수를, 세 번째 봉수는 평안도, 황해도, 경기의 육로(陸路)를 거쳐온 무악(毋岳)의 동쪽 첫 번째 봉우리의 봉수를, 네 번째 봉수대는 평안도, 황해도, 경기의 해로(海路)를 거쳐온 무악의 서쪽 두 번째 봉우리의 봉수를, 다섯 번째 봉수대는 전라도, 충청도, 경기를 거쳐온 양천(陽川) 개화산(開花山)의 봉수를 받았다. 봉수는 이상에서 말한 직로(直路) 이외에도 중간의 경로를 통해 전달하는 간로(間路)도 있었다. 『만기요람』에 의하면, 남산의 다섯 번째 봉수대로 전달되는 직로에는 인천(仁川),부평(富平),김포(金浦),통진(通津),강화(江華)가 포함되었고, 간로는 교동(喬桐)의 장봉도(長峯島)에서 시작하여 강화까지 연결되었다. 따라서 남산의 네 번째와 다섯 번째 봉수대로 연결되는 바닷가의 봉수대들이 경기수사가 관할하던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봉수대에서는 평상시에는 횃불 1개를, 적이 나타나면 2개를, 적이 경계에 접근하면 3개를, 적이 경계를 침범하면 4개를, 적과 교전 중이면 5개를 들어 올렸다. 직전 봉수대의 신호를 받은 다음 봉수대에서도 똑같이 신호를 보내 서울 남산의 봉수대까지 전달하였다.
❷ 연제도형(連梯圖形) : 봉수대끼리 봉수를 전달받는 경로를 그림으로 그린 것이다.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는 「영남좌연초기연제도(嶺南左沿初起連梯圖)」〈奎17258 〉가 소장되어 있다. 이는 경상좌도(慶尙左道)에 설치된 봉수대끼리 서로 신호를 전달받는 경로를 글과 그림으로 표시한 것이다. 도면의 위쪽에는 신호를 받는 봉수대를 좌연초기연제(左沿初起連梯), 중로초기연제(中路初起連梯), 우도김해자암래연제(右道金海自菴來連梯), 우도칠원안곡래연제(右道柒原安谷來連梯)로 나누어 차례대로 열거하였고, 그 아래에는 이를 도형으로 표시하였다. 도형은 붉은 동그라미 안에 봉수대의 이름을 큰 글씨로 적고 그 옆에 관할하는 각 고을의 이름을 작은 글씨로 기록하였으며, 각 동그라미에 표시된 봉수대를 선으로 연결하고 거리를 기록하였다. '012 나덕헌의 첩정(牒呈)'에서는 연제(連梯)를 먼저 보내고 도형(圖形)은 나중에 보낸다고 하여 연제와 도형을 나누고 있다. 「영남좌연초기연제도」로 말하면, 이때의 연제는 도면 위쪽에 서로 연결되는 봉수대를 글로 열거한 것을 가리키고, 도형은 그 아래의 그림을 가리킨다.
丁丑七月初七日 關文
丁丑七月初七日到付

兼巡察使爲相考事.
"前矣到付兵曹關內, '兵亂時, 各道烽燧連梯圖形, 盡爲散失爲有置. 烽燧狀擧不擧相準處置次以, 烽燧連梯圖形, 急急上送向事.'關是置有亦. 陸路烽燧段, 本營連梯圖形, 輸送爲在果, 海路烽燧連梯圖形乙良, 本營以, 依前急速輸送向事. 合行云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