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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고집(靑臯集)

기본정보
· 유형분류 고서-집부-별집류
· 내용분류 교육/문화-문학/저술-문집
· 작성주체 편저자 : 이승학(李承鶴)
· 간사년 (1962)
· 간사지
· 형태사항 新式鉛活字本 / 책수 : 2 / 반곽 : 12.8 X 19,1 / 有界 / 10行20字 / 한자 / 上2葉花紋魚尾
· 소장처 현소장처 : 국립중앙도서관 / 원소장처 : 미상
정의

1962년에 간행한 조선 말기의 학자 이승학(李承鶴, 1857~1928)의 문집.

해제
『청고선생문집(靑臯先生文集)』 해제

1. 이승학(李承鶴)의 생애
『청고선생문집(靑臯先生文集)』은 이승학(李承鶴, 1857~1928)의 문집이다. 자는 자화(子和), 호는 청고(靑皋),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양녕대군(讓寧大君)의 후손으로, 1510년(중종 5)에 견성군(甄城君) 이돈(李惇)을 추대해 역모를 일으키려 한다는 노영손(盧永孫)의 밀고로 전라도 명양현(鳴陽縣)으로 유배되고, 귀양에서 풀려난 후 담양대곡(大谷)에 은거한 이서(李緖)의 후손이다.
고조부의 휘는 정로(定魯)로 문장과 덕행이 있었는데 노사 기정진이 행장을 지었다. 증조부의 휘는 세용(世容)으로 효효처사(囂囂處士)이며, 할아버지는 이규형(李奎亨, 1797~1851), 아버지는 석전(石田) 이최선(李最善, 1825~1883)이고 어머니는 평택 임씨1857(철종 8) 전라남도 담양군 창평면 장전리(長田里)에서 출생하였다. 비(妣)는 성주(星州) 이씨 지평 기대(箕大)의 딸이다. 할아버지 이규형은 노사 기정진과 동학이었으나 학문적으로 두드러진 것 같지 않다. 아버지 석전(石田) 이최선(李最善)은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을 스승으로 섬기면서 천명(天命)과 인성(人性)의 학문을 듣고 기정진의 문하에서 고제자(高弟子)가 되었다. 고산사(高山祠)에 배향되었다.
이승학은 태어나면서 얼굴이 깨끗하고 빼어났으나 병약하여 옷도 이기지 못할 것 같아 일찍이 학문을 하지 못하고 9세에 비로소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이승학은 9세가 되던 해 어머니를 잃고 12세에 아버지의 스승이기도 한 노사 기정진을 찾아가 그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총명하고 기억력이 뛰어나 『중용』을 9일 만에 배송(背誦)하기도 하였다. 관례를 올린 후에 노사 기정진을 뵈니 자설(字說)을 지어주면서 격려하고 학문에 힘쓰게 하였다. 노사 선생 문하에 부자가 모두 동문수학하는 경우는 세상에서 드문 일이라며 칭찬하는 말들을 하였다. 이승학은 종신토록 한결같이 어버이를 편안하게 모셨으며 가끔 어버이의 책을 읽고 길게 부르짖으며 눈물을 흘렸다. 집안 사람과 대화할 때 부모를 일컬었으니 지극한 효를 아는 사람이었다.
1882년(고종 19) 전라감사 조강하(趙康夏)가 현량을 추천하였는데 벼슬도 하지 않은 몸으로 궁궐로 나아가 책문(策問)을 지어 천하의 이로운 일과 병폐가 되는 일에 관해 언급하였다. 그는 뒤에 문과 초시에 합격하여 임금님이 술을 내렸는데 당시 책문을 태평십이책(太平十二策)에 비교하였다. 그 뒤 1883년 부친상을 당하여 복제(服制)를 다하고 회시(會試)에 응시했으나 합격하지 못하였다. 당시 삼천((森川) 홍승헌(洪承憲), 강암(剛庵) 이용식(李容植), 영재(寧齋) 이건창(李建昌), 이당(二堂) 이중하(李重夏), 보당(葆堂) 서병수(徐丙壽) 등과 더불어 도리와 의리를 서로 논하고 문장을 이야기하고 사태를 논란하고 돌아왔다. 그 후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과 같이 환난을 겪으면서 나라를 걱정하였다.
1894년(고종 31) 동학란(東學亂)이 일어났을 때는 동학 농민운동에 반대하다가 사돈인 기재(奇宰)와 더불어 전봉준의 포섭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동학군이 그를 죽이려하자 신변의 불안을 느낀 두 집안은 식구들을 데리고 방장산(方丈山)으로 피신해 있다가 되돌아오기도 했다. 1866년 병인양요(丙寅洋擾)시 의병을 이끌고 강화도까지 간 부친 진사 이최선 공의 우국충정의 정신을 이어받아 1895년(고종 32) 8월 을미사변(乙未事變)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왜적 토벌을 기치로 거사, 격문을 전국에 보내어 기삼연(奇參衍), 고광순(高光洵) 등과 함께 호남 최초로 장성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주로 송사의 뜻을 받들어 격문을 지어 전라도 각지에 유포시키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진(陣)을 광주로 옮겨서 세를 불렸는데 송사 기우만과 함께 입궐상소하려 했으나 중앙에서 선유사(宣諭使) 신기선(申箕善)을 보내 해산을 권유하자 그날로 군대를 해산하고 담양(潭陽) 수항산(受降山) 아래 산정리(山亭里)에 들어가 수개월을 지내다 돌아왔다. 이후 의병의 주모자로 지목되어 피신 생활을 견뎌야 했다. 1895년 겨울에서부터 1896년 여름까지 송사 기우만과 환난을 같이 하였다. 아버지 이최선이 죽은 날 저녁에 경사자집(經史子集) 5천 여권 책과 좋은 물건이 화마(火魔)에 모두 불탔는데 오랜 세월을 두고 당을 다시 짓고 구당(舊堂)에 친히 영서(迎瑞)라고 편액하였으며, 기문을 지어 사실을 기술하였고 전답을 팔아 서적을 처음과 같이 모았다. 이 때문에 집안 살림이 줄어들게 되어 위로 계모와 아래로 집안 식구를 거느리기 어려웠다. 이에 오직 농사에 힘을 써서 8년을 하니 남의 곡식을 빌리지 않게 되었다. 선생님 문하의 일에는 정성을 다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천 리 먼 길 폐백을 싸가지고 혼자 포천(抱川)까지 가서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을 뵙고 노사의 신도비를 받아오려 노력하였다. 1907년 아들 광수진도에 유배되어 12월에 해배되었다. 1928년 9월에 아들 이광수가 서울에 있었는데 비방을 막을 방법과 꾀를 일일이 지휘하는 한편, 서원을 세울 적에 몸소 역사(役事)를 독려하고, 문하 제현을 배향하며 기쁜 얼굴빛으로 나의 일이 끝났다고 하였다. 1928년 10월 선조의 묘소에 가서 참배하고 돌아와서 병이 났는데 한마디 언급도 하지 못하고 29일 향년 72세로 세상을 떠났다.
이승학은 선현들의 유집(遺集) 교정에 많이 참여하였으며 한가한 틈에 명산대천을 유람하였다. 동쪽으로 금강산(金剛山), 서쪽으로 영주산(瀛洲山, 변산), 남쪽으로 천관산(天冠山)과 월출산(月出山), 북쪽으로 명나라 요계(遼薊, 베이징만주)에 이르기까지 국내의 이름난 산과 누각을 오르지 않은 곳이 없었다. 시국에 대해 늘 마음 아파하고 풍속을 보는 것이 답답하다고 여기고 아름다운 경치를 보고서 휘파람을 불며 시를 읊고 돌아왔는데 이에 관한 시를 여러 편 지었다.
이승학은 영달에 뜻을 두지 않고 영재(寧齋) 이건창(李建昌), 이당(二堂) 이중하(李重夏) 등과 교류했으며 아버지 이최선 등이 주장하던 이기설(理氣說)의 학문보다는 주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실천을 중요시하는 위기지학(爲己之學)을 강조하였다. 또한 장전(長田) 마을에 학당을 세워 신학문 보급에 선구자적 역할을 하였다. 아버지 이최선은 병인양요 때 의병을 일으켰고, 아들인 광수나인영(羅寅永)이 주도한 오적암살단의 지도부 일원으로, 3·1 운동에 가담하였으며, 이승학은 한말 의병에 투신하여 자부심과 책임감을 바탕으로 반외세항쟁을 전개하였다. 이처럼 한 집안에서 3대가 모두 민족운동에 참여했다는 점에서 한말 민족운동사에서 주목할 만한 인물이다. 정부는 공의 공훈을 기려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2. 『청고선생문집(靑臯先生文集)』 구성과 내용
『청고선생문집(靑臯先生文集)』은 이승학(李承鶴, 1857~1928)의 문집이다. 4권 2책의 신활자본으로 1962년 손자 혁(爀)이 편집, 간행하였다. 권두에 1962년 기노장(奇老章)의 서문이, 권말에 1962년 여창현(呂昌鉉)의 발문이 있다.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권1에 시 172수, 권 2에는 책(策) 1편, 「상면암최선생(上勉菴崔先生)」, 「여이영재(與李甯齋)」 등 서(書) 20편, 「사물(四勿)」 등 잡저 10편, 권3~4에 서(序) 6편, 기(記) 11편, 제문 16편, 묘지명 2편, 「서염은유고발(書染隱遺稿跋)」 1편, 부록으로 만사 26수, 제문 2편, 가장(家狀), 묘갈명, 묘표 각 1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가장(家狀)은 아들 이광수(李光秀), 묘갈명은 1934년 안동(安東) 김영한(金甯漢), 묘표는 1933년 월성(月城) 김재홍(金在洪)이 지었다.
기노장(奇老章)의 서문에 의하면 이승학은 호걸(豪傑)한 자질로 학문을 닦아서 규모를 넓히고 은미한 뜻을 확장하였으며, 중국의 사대부들이 행한 선왕조의 전례(典禮)를 넓게 펼치니 문사(文辭)가 거침없다고 하였다. 이런 여유로움이 시에 나타나 있으며 필력(筆力)이 굳세고 힘차다고 서술하고 있다. 손자인 춘전(春田) 혁(爀)이 장차 유문을 판각하려고 하면서 두 집안의 세의(世誼)가 돈독하여 서문을 청하였다고 하였다.
권 1에 수록되어 있는 「여년금이십육첨피섬천대책우전정퇴숙우반궁여다사전촉염운(余年今二十六忝被剡薦對策于殿庭退宿于泮宮與多士剪燭拈韻)」은 26세에 추천을 받아 대책을 올리던 때에 성균관의 여러 선비와 운에 따라 지은 시이다. 시의 제목을 살펴보면 동오(東塢) 조의곤(曺毅坤), 난와(難窩) 오계수(吳繼洙), 운람(雲藍) 정봉현(鄭鳳鉉), 소아(小雅) 조성희(趙性憙)호남의 명사들과 교류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승학은 간간이 나귀를 타고 동자를 데리고 이름난 산과 누각을 많이 유람했는데, 문일정(聞一亭), 물염정(勿染亭), 망미정(望美亭), 송광사(松廣寺), 송강정(松江亭), 취가정(醉歌亭), 사야당(四也堂), 여존각(如存閣), 몽한각(夢漢閣), 명발헌(明發軒), 석전재(石田齋), 만취정(晩翠亭), 학사루(學士樓) 등에 관한 시가 있다. 「송(松)」, 「은행(銀杏)」, 「추수(楸樹)」, 「행화(杏花)」, 「해당(海棠)」 등 자연을 소재로 읊은 시가 있으며, 「만백석기학사양연(挽栢石奇學士陽衍)」, 「만동오조처사(挽東塢曺處士)」, 「만유석우(挽柳石愚)」, 「만박석음노술(挽朴石陰魯述)」, 「만정운람봉현(挽鄭雲藍鳳鉉)」, 「만기춘담동준(挽奇春潭東準)」 제목에 만(挽)이라고 하였으나, 7언 율시의 시로 만사(挽詞)에 편차하지 않았다.
권2 서(書)에는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 영재(寧齋) 이건창(李建昌), 홍승운(洪承運), 송사 기우만, 최영조(崔永祚), 이운승(李運昇), 소아(小雅) 조성희(趙性憙), 가아(家兒) 등에게 보낸 편지가 있다. 「상면암최선생(上勉菴崔先生)」, 「여고오천(與高梧泉)」에는 날로 급하게 변해가는 국사(國事)를 개탄하는 내용 등이 수록되어 있다. 두 번째 수록된 「기가아(寄家兒)」에는 증조부 효효처사(囂囂處士)의 행장을 받으러 면암 최익현을 만나러 간 사건을 서술하고 있다. 집을 떠난 지 3개월이 되었으며 집안 소식을 들을 길이 없고 내가 어느 곳에 머물렀는지 알지 못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5월 13일 양주(楊州) 판곡(板谷)에서 출발하여, 5월 14일에 포천(抱川) 가덕(嘉德)에 도착해 면암 최익현을 만나 노사 선생의 비문과 효효공의 행장을 부탁하려고 머물렀다. 5월 16일 옥병(玉屛)을 향해 가서 2일 동안 가로리(可老里)에 머물렀다. 5월 20일에 다시 가덕에 도착하니 효효공의 행장이 이미 완성되어 있었으나 노사 선생의 비문은 끝내 사양했다고 전해주고 있다.
책(策) 1편은 1882년 포의(布衣)로 대궐에 들어가 올린 책문으로 천하의 이로운 일과 병폐가 되는 일에 관해 언급하였다. 천지 만물의 이치는 궁(窮)하면 변(變)하고 변하면 통(通)하지만, 결코 도(道) 밖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도가 남기는 것은 다만 시기일 뿐이라고 전제하여, 때를 알지 못하면 일을 성사시킬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어서 『주역』의 64괘(卦)의 변하는 이치를 말하였고, 예(禮)에는 상변(常變)이 있고 시(詩)에는 정변(正變)이 있으며, 읍손(揖遜)의 변을 설명하고 정벌(征伐)·재화(財貨)·용병(用兵)·비인재(備人材)·취사(取捨) 등을 낱낱이 들어 진술하였다. 그 요점은 성(誠)자에 있다고 하며 임금께서는 다하여도 변하지 않는다고 걱정하지 말고 정성을 다하지 못함을 근심해야 할 것이요, 변하여도 통하지 않는다고 걱정하지 말고 정성이 순수하고 완전하지 못함을 두려워해야 할 것이라고 하였다.
송사 기우만과 주고받은 편지 3편에만 연도(1906, 1907, 1910)가 기재되어 있는데 1906~1910년 사이에 교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권3에 「영서당기(迎瑞堂記)」, 「석우기(石愚記)」, 「유옥담기(遊玉潭記)」, 「학천재기(鶴泉齋記)」, 「충의재기(忠義齋記)」, 「명학재기(鳴鶴齋記)」, 「남희정중건기(南喜亭重建記)」, 「순고정기(淳古亭記)」, 「육대조고묘비음기(六代祖考墓碑陰記)」, 「선편유인이씨비음기(先騙孺人李氏碑陰記)」, 「의인박씨효열비음기(宜人朴氏孝烈碑陰記)」 등이 수록되어 있다.
「영서당기(迎瑞堂記)」의 내용은 아버지 석전 이최선이 죽는 날 영위에서 불이 나 집안에 소장되어 있던 5천 여권의 책과 기타 좋은 물건이 모두 타버리니 오랜 세월을 두고 당을 다시 짓고 이름을 영서당(迎瑞堂)이라고 편액했다는 사실의 전말(顚末)을 기술한 기문이다.
「학천재기(鶴泉齋記)」, 「명학재기(鳴鶴齋記)」, 「남희정중건기(南喜亭重建記)」, 「순고정기(淳古亭記)」는 담양의 누정에 관한 내용으로, 그중 「남희정중건기(南喜亭重建記)」에는 1857년(철종 8) 부사(府使) 황종림(黃鐘林)이 양로(養老)와 교육(敎育)의 목적으로 두 정자를 지었는데, 북(北)은 관어대(觀魚臺), 남(南)은 남희정(南喜亭)이라 하였으며 노인들에게 부여하여 강학(講學)과 향약(鄕約)의 시행처로 사용했다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무지와유고서(無知窩遺稿序)」에 무지와(無知窩)는 조선 후기의 무신이며 학자 장사식(張師栻)의 시문집을 모아 1931년 장익환이 발행한 문집으로 1926년이승학이 작성한 서문이다.
잡저에는 「사물(四勿)」, 「거유(居遊)」, 「지명(知名)」, 「허백실명(虛白室銘)」, 「소변(笑辨)」, 「명교해(名敎解)」, 「시해(視解)」, 「파권론(破權論)」, 「반객설(反客說)」, 「괴구설시동학(愧懼說示同學)」, 「명중양설(名重陽說)」, 「통문(通文)」 등 10편이 수록되어 있다. 그중 수신(修身)을 위하여 하지 말아야 할 네 가지 사항을 적은 「사물잠(四勿箴)」이 있고, 「반객설(反客說)」에서는 농사가 천하의 대본이기는 하지만 호국(胡國)의 사람들과 같이 농사를 짓지 않고 목축과 수렵으로 생활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것은 각각 경영하는 업(業)이 다르기 때문이며 선비도 이와 같다고 말하고 있다. 「허백실명(虛白室銘)」에서 허백실(虛白室)은 청고 이승학이 여가에 독서를 하는 곳이다. 경진년(1880) 봄에 축성하여 겨울에 들어갔으며, 1881년에 허백(虛白)이라고 명명하였고, 1882년에 명(銘)을 지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명교해(名敎解)」에는 '명교(名敎, 유학의 가르침)라는 것은 성인들이 세운 것이다. 세상을 다스리는 데는 이보다 큰 것이 없으니 곧 백성을 교화하고 풍속을 완성하는 근본이 된다. 그 명교의 명회(明晦)에 따라 치란(治亂)의 징후도 달려 있으니 종신토록 이것을 따라야 한다'고 하였다. 「제백석기학사문(祭栢石奇學士文)」에는 1897년 3월 17일에 올린 제문으로 동문으로 같은 스승님의 가르침을 받고 40년을 서로 의지하며 지낸 기학사를 애통해하고 있다. 「제망실박씨문(祭亡室朴氏文)」에는 52년을 같이 산 부인을 위한 제문을 지어 슬픔을 표현하고 있다.
「조비유인김씨묘지(祖妣儒人金氏墓誌)」, 「부지하인묘지명(不知何人墓誌銘)」 2편의 묘지명이 수록되어 있다. 「부지하인묘지명(不知何人墓誌銘)」은 성명은 정확히 알지 못하나 『명미당집(明美堂集)』에 기록되어 있는 유수(兪叟)의 묘지명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서염은유고문(書染隱遺稿文)」 발문이 1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염은유고(染隱遺稿)』는 차계일(車啓馹)의 문집이다.
부록으로 김재홍(金在洪), 조덕승(曺悳承), 송태회(宋泰會) 등의 만사(挽詞) 26수와 「출후제승구(出后弟承龜)」, 「외생기낙도(外甥奇洛度)」 제문 2편이 있다.
아들 이광수(李光秀)가 지은 가장(家狀)에는 이승학은 아들에게 이르기를 행장(行狀) 등의 글을 다른 사람에게 청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니 '청고만생이모지묘(靑臯晩生李某之墓)'라고 쓰라고 당부하며 스스로 묘지명 두어 구절을 지어서 아들에게 주었다. 그러나 이광수는 장사를 지낼 때 판서 윤용구(尹用求)에게 묘지석에 글씨를 써줄 것을 청하였는데, 여러 선비의 공론에 따라 '조선일사(朝鮮逸士)'라고 썼다. 만생(晩生)이나 일사(逸士)는 모두 '쇠잔한 세상'이라는 뜻인바 만생(晩生)은 자기가 이룬 것이고 일사(逸士)는 공적인 의론이라고 하니, 공의(公議)를 따라 '조선일사'라고 썼다고 하였다.


3. 세부목차
卷 上
詩 : 余年今二十六忝被剡薦對策于殿庭退宿于泮宮與多士剪燭拈韻, 南廟, 鼠相害, 歲除日述懷二首, 傷丙子講話, 詠漢祖, 聞邊報, 春夜二首, 寄郭聖述二首, 東塢曺丈毅坤以詩贈忘拙和呈, 偶吟, 感懷, 難窩吳丈繼洙愛余甚篤告歸不能捨送至十里地感而遂成, 金城吏, 醉後漫筆上小山兩族兄, 悼隣家子, 雜詩, 偶題, 有所思, 采桑, 秋夜, 所處書室甚隘用竹木仍舊稍廣是夜明月滿床欣然賦詩, 學靜子以鷺梅一絶詩見贈謹步五首, 奉和鄭雲藍鳳鉉見寄十一韻, 憫菊圃族兄, 長笑嘆, 聖德山觀音寺行, 老賊行, 奉別權雲卿大雅雲煥, 夢中作, 蘆沙先生挽章, 憶蘆翁用明道哭擴渠韻, 嗟我失依歸, 夢遊崑崙山顚, 閒中得七十韻, 當毗子, 靑靑枝上梧三首, 幽居二首, 辛巳春三月望, 過凰山, 過榮山浦三首, 省先騙墓二首, 是非者, 留別嶺南權二斯文, 擬韓昌黎射訓狐, 寗齋櫃我以詩效嚬以呈, 啄木鳥, 二鳥詩, 記夢, 和卯君除夕韻, 大明梅, 松, 銀杏, 楸樹, 杏花, 海棠, 申將軍故墟, 洛水津, 省外祖騙墓, 和篁林詩社韻五首, 先騙周甲日有感, 人間七夕問, 天上七夕答, 重陽日省先騙墓有感, 丹城訪同門知舊, 三嘉慰艾山鄭哀丈(載圭), 思家二首, 庚寅除夕與同志會山齋, 送別, 自慰, 酒後, 漢館與植齋對話(奇宰), 同松沙陪月皐南洲昆季與山陽昇平諸益遊松廣寺留別(壬辰), 遺愁, 久矣余之廢吟也見陽和日暢遂感而賦詩, 江華鼎足山城, 傳燈寺, 史庫, 慰寗齋, 庚寅開歲之五日嶠南丈人金山石同白水過余謂將遊頭流, 拜月皐趙先生(性家), 寗齋宥還同出貝州路中口號, 留海史安進士登聞一亭, 同安季玉奇松友二益登勿染亭, 次望美亭韻, 同寗齋遊松廣寺, 與牛峯諸益宿松廣寺, 遊仙巖寺, 蝶峙道中, 懷寗齋, 效社諸將韻, 挽栢石奇學士(陽衍), 挽東塢曺處士, 感憤, 訪黃梅泉玹不遇今以書來以詩答, 久雨餘見月, 奉簡寗齋, 謹步小雅趙丈(性憙)寄示韻, 小雅趙丈頗賜款于五家父子付手抄金管錄於迷息托以傳鉢之遠意安知以此從有媛突於其間飜成是非也嘆世情之險濫賦自訟之不敏以三絶志意, 同松沙昆季宿四也堂, 移會夢漢閣, 呈柳石愚, 獨嘆, 松江亭, 醉歌亭, 望美亭, 宿四也堂, 題如存閣, 題夢漢閣, 題明發軒, 謝事, 挽柳石愚, 石田齋珠聯, 次鶴山韻, 讀李白樂府愛其旨深思遠娛其意成句, 出塞曲八首, 擬古十二首, 題晩翠亭, 荒山行, 咸陽學士樓, 哭吳難窩先生, 挽朴石陰(魯述), 挽鄭雲藍(鳳鉉), 挽奇春潭(東準), 登天冠山, 夢裡君王近, 題諸葛澹寧獨釣臺, 江景浦, 謹次外舅興城館閣, 過完山, 到天安三街以寒威留宿, 三五七言, 上元小會, 和朴贊鳳韻, 完山歸路, 鳳山鄕飮酒禮後謹次蘆沙集中韻, 別山陽昇平諸益韻, 到完山留待植齋不至, 訪徐秋帆, 漢館堞坐, 維谷臥松堂與諸益成會, 走與呂氏諸賢善今老白首數公己作九原嗟我之不能營葬許得一壙地若西山之借屛山地眞行禮經殯於我之意也不勝感激于中詩以謝之, 上元日與諸賢留約三山齋望月前日遇雪未行櫃此遣愁
策 : 問天下事無窮而有善變者有不善變者故易日隨時變易以從道所貴乎變易者以其從道也禮之常變詩之正變皆有從道之義歟云云
書 : 上勉菴崔先生, 與李寗齋, 與洪三泉(承運), 與奇松沙(丙午), 答奇松沙(丁未), 與奇松沙(庚戌), 與崔雲齋(永祚), 與李耕齋(運昇), 上趙小雅, 與高梧泉, 上直菴族叔(克善), 答李菊軒(承旭), 答門中僉坐, 與安公瑞, 與安明瑞(啓), 答奇進士(東準), 答李庚萬, 寄家兒, 寄家兒, 寄家兒
雜著 : 四勿, 居遊 知名 好惡 行難, 虛白室銘, 笑辨, 名敎解, 視解, 破權論, 反客說, 愧懼說示同學, 名重陽說, 通文

卷 下
序 : 送魏二斯文赴玉川序, 無知窩遺稿序, 五契案序, 寧齋廬次惜別序, 贈族弟敬順詩序, 書後
記 : 迎瑞堂記, 石愚記, 遊玉潭記, 鶴泉齋記, 忠義齋記, 鳴鶴齋記, 南喜亭重建記, 淳古亭記, 六代祖考墓碑陰記, 先妣孺人李氏碑陰記, 宜人朴氏孝烈碑陰記
祭文 : 祭蘆沙先生文, 祭沙上奇公文, 祭三從敍掌令公文, 祭栢石奇學士文, 祭外叔李小松公文, 祭朴周玉文, 祭高鹿川文, 祭李寧齋文, 祭族叔殷賚文, 祭河瑞下文, 祭從叔石井公文, 先騙回甲日告墓文, 祭阿叔免筵文, 再祭文, 祭亡室朴氏文, 告第二男文
誌 : 祖妣儒人金氏墓誌, 不知何人墓誌銘
跋 : 書染隱遺稿文
附錄 : 挽, 出后弟承龜, 外甥奇洛度, 家狀(李光秀), 墓碣銘(金寗漢 1934), 墓表, 跋(呂昌鉉 1962)
기사목록
目錄
卷之一
卷之二
卷之三
卷之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