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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수재집(聿修齋集)

기본정보
· 유형분류 고서-집부-별집류
· 내용분류 교육/문화-문학/저술-문집
· 작성주체 편저자 : 박해량(朴海量)
· 간사년
· 간사지
· 형태사항 木活字本 / 책수 : 3 / 有界 / 10行20字 / 한자 / 內向二葉花紋魚尾
· 소장처 현소장처 : 국립중앙도서관 / 원소장처 : 미상
정의

박해량(朴海量, 1850~1886)의 시문집.

해제
■ 형태서지

권수제
聿修齋集
판심제
聿修齋遺稿
간종
목활자본(木活字本)
간행년
1909
권책
6권 3책
행자
10행 20자
어미
內向二葉花紋魚尾
소장처
국립중앙도서관
선간집수



■ 저자

성명
박해량(朴海量)
생년
1879년(고종 16)
몰년
1950년
도겸(道謙)
율수재(聿修齋)
본관
순천(順天)
특기사항
면암 최익현이 제주와 흑산도에 유배를 갈 때 적소에 따라가 모시고 공부했다.


■ 가계도

朴英䂓(시조)
高麗 開國功臣






朴可興
領議政






朴錫命
大提學






朴叔善
同知敦寧府事






朴而恭
彰信校尉






五代祖 朴光純






高祖 朴重元






曾祖 朴達鎭






祖 朴聖洛






父 鄭煥禹






順天朴氏
朴奎祚의 女






朴海量















奇世弘
平澤林氏
林基休의 女





朴源東









朴幼君


蔚山金氏
金瀘休의 女




■ 행력

왕력
서기
간지
연호
연령
기사
철종
1
1850
경술
道光
30
1
광주 하남에서 태어났다.
고종
10
1874
갑술
同治
13
25
면암의 유배지인 제주를 방문하여 공부하였다.
고종
13
1876
병자
光緖
2
27
면암의 유배지인 흑산도를 방문하여 공부하였다.
고종
22
1885
을유
光緖
11
36
어머니 상을 당하였다.
고종
23
1886
병술
光緖
12
37
5월 29일 37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 고룡면에 장사지냈다.
순종
3
1909
기유
宣統
1

장자 朴東源에 의해 문집이 편집 및 간행되었다.


■ 생애
『율수재집(栗修齋集)』은 박해량(朴海量 : 1850-1886)의 시문집이다. 6권 3책 목활자본으로 간행되었다. 박해량의 자는 도겸(道謙)이고, 호는 율수재(聿修齋), 본관은 순천(順天)이다. 시조는 고려의 개국공신인 박영규(朴英規)이고 영의정을 지낸 정후공(靖厚公) 휘 가흥(可興), 대제학을 지낸 문숙공(文肅公) 휘 석명(錫命) 등이 그의 선조이다. 정조반정의 원훈공신인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를 지냈던 휘 숙선(叔善) 때에 문호(門戶)가 성만(盛滿)함을 두렵게 여겨 호남나주로 퇴거하고, 창신교위(彰信校尉) 휘 이공(而恭)광주로 이거한 뒤부터 세거하였다. 독수재(篤守齋) 휘 광순(光純)이 5대조이고, 고조는 휘 중원(重元), 증조는 휘 달진(達鎭)으로 호는 백당(栢堂)이며 조부는 휘 성락(聖洛)이며, 아버지는 휘 정현(鼎鉉)으로 호는 농와(農窩), 어머니는 기계유씨(杞溪兪氏)씨로 유치복(兪致福)의 따님이다.
박해량1850(철종1)년에 태어났다. 박해량의 집안은 5대조인 독수재공 때부터 행의(行誼)로 이름났고, 연원(淵源)이 방정하여 그 영향이 방친(傍親)에게까지 미쳤으니, 이러한 가풍은 그의 아버지 농와에게 이르러서 역시 재물은 가벼이 여기고 의를 중시하며 효우(孝友)하고 근검하며, 어진이를 높이고, 덕을 숭상하게 되었다. 해량 또한 어려서부터 성품이 남들과 다르게 뛰어나 마을 사람들이 모두 비상한 아이라고 칭하였다. 해량은 이런 가풍을 본받아 과장을 분주히 다니며 형세에 따라 간알(干謁)하는 세상의 풍조를 한 번도 마음에 품지 않고, 오직 학문절행(學問節行)에만 힘쓰며 성현들을 찾아가 원근(遠近)을 가리지 않고 배우기를 청하였다. 고산(鼓山) 임헌회(任憲晦), 중암(重菴) 김평묵(金平默),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등을 찾아가 배웠다. 중암은 권면과 경계의 뜻을 담아 율수재(聿修齋)라는 호를 지어주고, 「율수재기(聿修齋記)」를 지어주었으나, 일실되어 문집에는 실리지 못하였다.
특히 박해량1873년부터 1876년 동안 제주도흑산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면암을 찾아가 뵈었는데, 이때의 일을 기록한 「해상일기(海上日記)」가 문집에 실려 있다. 중암은 「최영호입흑산도기(崔永皓入黑山島記)」를 지어 면암이 흑산도에서 유배생활 한 내용을 기록하였는데, 거기서 해량제주도흑산도를 모두 따라가면서 면암을 모시며 공부한 것을 송대 마신(馬伸)정이천의 고사에 비유하여 "이는 정자(程子) 문하의 마동평(馬東平)을 오늘날 다시 보는 것과 같다. 비록 그렇지만 박생(朴生)은 사부(士夫)라, 손재공(遜齋公, 朴光一)이 방조(傍祖)로, 공은 일찍이 화양(華陽 宋時烈) 선생의 문하로 세상이 고제자(高弟子)로 칭하였으니, 그 연원(淵源)의 유래가 진실로 이와 같다.[是程門之馬東平 復見於今日也 雖然 朴生士夫也 以遜齋公爲旁祖 公甞學於華陽先生 世稱高第弟子 則其淵源之所自 固當如是]"라고 칭찬하였다.
박해량은 학문하는 뜻이 박학하고 장단을 가려 취하여 수신하는데 힘쓰고 변혹(辨惑)함에 있어서는 외부나 무리를 따르거나 한갓 보고 듣는 것에만 치우치려하지 않았다. 해량은 또한 노사(盧沙) 기정진(奇正鎭)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의 대요를 들으며 뛰어난 동학들과 함께 반구무실(反求務實)하고 수렴회양(收斂晦養)하며 학문에 힘썼다. 오로지 성리학만을 공부하였지만, 문장 또한 전아(典雅)하여 많은 수창시를 남기기도 하였다. 선조인 손재(遜齋) 박광일(朴光一)의 명문에 있는 "주작 그림자 홀로 우뚝 서서 하늘을 섬긴다[朱雀影一 柱亭事天]"는 8글자를 면려(勉勵)의 뜻으로 삼았다. 효성 또한 깊어서 1885년 어머니의 상을 당하였을 때는 안색이 수척하고 슬프게 통곡하여 많은 이를 보고 탄식하지 않은 사람들이 없었다.
박해량1886년(고종23) 5월 29일 37세의 젊은 나이에 별세하였다. 별세한지 6년 뒤에 장남 원동(源東)이 먼 길을 무릅쓰고 면암을 찾아가 행장을 부탁하니, 면암이 이를 안타까워하여 행장을 지어주었다. 장지는 고룡면(古龍面)이다. 부인은 평택임씨(平澤林氏) 임기휴(林基休)의 딸로 1녀가 있는데, 기세홍(奇世弘)에게 출가하였다. 후취(後娶)로는 울산김씨(蔚山金氏) 김노휴(金瀘休)의 딸로 원동(源東), 유군(幼君) 2남을 두었다.


■ 구성과 내용
『율수재집(栗修齋集)』은 1909년 그의 아들 박동원(朴東源)에 의해 편집·간행되었다. 6권 3책 목활자본이다. 서문은 1909년기우만(奇宇萬)이 지었고, 별도의 발문은 없다. 국립중앙도서관, 고려대학교 도서관 등에 소장되어있다. 권1에는 시 67편이 실려 있고, 권2에는 서(書) 24편이 실려 있으며, 권3에는 기(記) 1편, 발(跋) 4편, 설(說) 1편, 제문(祭文) 4편, 행록(行錄) 1편이 실려있다. 권4에는 일기 1편이 있으며, 권5에는 강설(講說) 2편이 있고, 6권은 부록이다.
권1은 시집이다. 「상면암선생비소(上勉菴先生匪所)」, 「상로사선생(上蘆沙先生)」, 「차기송사운(次奇松沙韻)」 등과 같은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 중암(重菴) 김평묵(金平默), 노사(蘆沙) 기우만(奇宇萬), 송사(松沙) 기정진(奇正鎭), 고산(鼓山) 임헌회(任憲晦), 운재(雲齋) 최영조(崔永祚) 등과 차운한 시들이 많다. 또한 「제주주중(濟州舟中)」, 「상면암선생비소(上勉菴先生匪所)」, 「한라산(漢拏山)」, 「영비관정초(詠匪舘庭草)」, 「문동요(聞童謠)」 등은 면암 최익현제주도흑산도에서 유배 생활을 할 때 면암을 따라 제주도흑산도를 방문했던 일들을 기록한 시이다. 그중에서 「제주주중(濟州舟中)」은 제주도를 향하는 감회를 남긴 시이며, 「한라산(漢拏山)」은 제주도에서 방문한 한라산의 절경을 그린 시이다. 또한 「문동요(聞童謠)」는 면암이 73년 서원 철폐에 반대하는 상소로 제주도에 유배되고, 76년 개항을 반대하며 지부상소(持斧上疏)를 올린 일로 흑산도로 유배가자 세간에 "지금 하늘 아래 다만 최충신 한 사람 뿐이다[今天之下 只有崔忠臣一人]"는 동요(童謠)가 불린 것을 듣고 면암의 충절과 혼란스러운 당시 세태를 비판하는 내용이다. 그리고 면암의 「수박도겸(酬朴道謙)」은 박해량의 「하설(夏雪)」, 「영비관정초(詠匪舘庭草)」, 「문통신사영적이내발분구호(聞通信使迎賊而來發憤口呼)」, 「문동요(聞童謠)」 등의 시들을 읽고 화답한 시들을 모아 놓은 것으로 이를 보면 박해량제주도흑산도에서 스승과 함께 보냈던 일과 감상을 알 수 있다. 그중에서 「문통신사영적이내발분구호(聞通信使迎賊而來發憤口呼)」는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 1880년 김기수(金基洙)가 통신사(通信使)로 일본에 가서 서양인을 칙사로 맞이하고 사학(邪學)을 전수받아 온 것을 비판하고, 위정척사의 뜻을 밝힌 시이다. 「하설(夏雪)」과 「영비관정초(詠匪舘庭草)」 등에서도 나라를 걱정하고, 스승의 충절을 기리는 내용으로 박해량의 척사사상을 엿볼 수 있다. 이외에도 면암 최익현의 상소문을 읽고 쓴 「독면암선생소(讀勉菴先生疏)」, 청도최치원(崔致遠)이 직접 팠다는 우물을 가서 보고 쓴 「관청도등최고산친굴정감음(關靑島登崔孤山親掘井感吟)」 왕세자가 탄생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 감흥을 쓴 「왕세자탄강(王世子誕降)」 등이 있으며, 「대설(大雪)」, 「지진(地震)」, 「영귤(詠橘)」 등과 같이 자연 기물이나 현상을 쓴 시들도 다수 있다.
2권은 기정진(奇正鎭), 최익현(崔益鉉), 김평묵(金平黙), 임헌회(任憲晦) 등 스승과 나눈 편지와 기우만(奇宇萬), 전우(田愚), 최숙민(崔琡民), 유중교(柳重敎), 김병저(金炳著) 등의 지인들과 주고받은 24편의 서찰이 있다. 대체로 이기변설(理氣邊說), 명덕주리주기지설(明德主理主氣之說)과 같은 이기론과 관련된 문답이나, 상례(尙禮)의 절차, 『주자어류(朱子語類)』의 내용에 대한 문답과 같은 도학공부에 대한 문답이 다수이다. 이외에도 특히 면암과 나눈 서찰에서는 유배지의 안부를 묻는 내용과 함께 혼란한 정세를 걱정하는 우국의 내용 또한 엿볼 수 있다.
3권은 기(記) 1편, 발(跋) 4편, 설(說) 1편, 제문(祭文) 4편, 행록(行錄) 1편이 있다. 기문인 「지장암기(指掌巖記)」 1편은 면암이 흑산도로 유배된 다음 해 3월 흑산도 천촌(淺村) 마을의 해신사(海神祠) 앞에 있는 입석을 보고 주자의 시구인 '위아중지장(爲我重指掌)'를 따서 '지장암(指掌巖)'이라 이름을 짓고, 화서의 유지(遺志)를 따라 '기봉강산홍무일월(箕封江山洪武日月)'이라는 8자를 새긴 것을 보고 쓴 기문으로, 면암이 주공(周公), 공자(孔子), 맹자(孟子)의 세 성인의 뜻을 계승하여 척사왜양 정신을 기리는 내용이다. 발은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의 소차(疏箚)에 쓴 「서송자소차(書宋子疏箚跋)」, 면암의 소차에 쓴 「면암선생소차발(勉菴先生疏箚跋)」, 사헌부 장령으로 면암에 이어 1873년에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탄핵 상소를 올렸던 홍시형(洪時衡)의 상소에 쓴 「서홍시형소후(書洪時衡疏後)」, 그리고 김재광(金在光)의 부인인 유인(孺人) 최씨(崔氏)의 행록(行錄)에 쓴 「서최유인행록후(書崔孺人行錄後)」 등이 있다. 설은 「자경설(自警說)」 1편이 있고 제문은 고산(鼓山) 임헌회(任憲晦)의 제문 「제고산선생문(祭鼓山先生文)」,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의 제문 「제노사선생문(祭蘆沙先生文)」 등 4편이 있다. 행록은 증조 백당(栢堂) 박달진(朴達鎭)의 행록인 「증조고백당공행록(曾祖考栢堂公行錄)」 1편이다.
4권은 일기로 「해상일기(海上日記)」 1편이 있다. 「해상일기(海上日記)」는 면암이 제주도 유배를 가던 이듬해인 1874년흑산도 유배 중이던 1876년제주도흑산도를 방문하여 경서에 관한 토론을 하며 공부하고 시국을 걱정하는 내용이 실려 있다. 일기는 총 3기간으로 나뉘는데 제주도 유배 기간에 방문한 1874년 2월부터 4월까지, 면암이 사면되어 장성으로 돌아가는 길을 함께 했던 1875년 4월부터 10월까지, 그리고 흑산도 유배기간에 방문한 1876년 2월부터 6월까지이다. 먼저 제주도 유배 시 방문했던 첫 번째 기간은 김효환(金孝煥)과 함께 제주도로 출발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제주도에 도착한 뒤 배소에 가서 인사하고 배우길 청하여 계사(繫辭) 등을 배우고, 다시 4월 3일 배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고 기록되었다. 두 번째 기간은 1875년 4월 20일 면암이 사면되어 장성으로 돌아가는 길에 박해량의 집에 방문한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이때 박해량은 면암을 배행하고 함께 노사를 방문했고, 5월 면암의 집인 가거(嘉菃)에 도착한 뒤 서울에서 면암의 집을 오가면서 『주역(周易)』, 『격몽요결(擊蒙要訣)』, 『태극도설(太極圖說)』, 『맹자(孟子)』, 『경재잠(敬齋箴)』 등을 공부하고, 편지로 면암과 문답한 것과 8월 23일 경무대(景武臺)에서 구일제(九日製) 시험을 본 뒤 9월에 내려와 고산을 지알(贄謁)하고 공부한 내용이 기록되어있다. 마지막 세번째 기간은 면암이 마항점(馬項店)에 도착한 것에서 시작한다. 면암이 강화도조약을 반대하는 지부상소(持斧上疏)로 인해 흑산도로 유배를 갔다는 소식을 듣고 면암과 함께 흑산도로 가는 여정과 화가가 와서 면암의 영정을 완성한 일, 경서의 해석이나 명덕이기변론(明德理氣辯論) 등과 같은 도학 공부에 대한 문답, 유소(儒疏)나 송시열 등과 같은 예전의 사건들에 대한 문답 및 당시 정세에 대한 걱정 등의 내용이 기록되어있다. 일기의 말미에는 문집이 간행된 해인 1909년에 후손인 석음(石陰) 박노술(朴魯述)이 쓴 발문이 붙어있다.
권5에는 스승인 기정진, 최익현의 가르침을 기록한 한 강설(講說)이 2편 실려 있다. 두 편 모두 문답의 형태로 구성되어있는데, 「용학강설(庸學講說)」은 기정진과 『중용(中庸)』과 『대학(大學)』 의 내용을 문답한 「중용강설(中庸講說)」과 「대학강설(大學講說)」을 합한 것이고, 「채산강설(茝山講說)」은 최익현과 주로 『맹자(孟子)』의 내용을 문답한 것이다. 권5의 말미에는 기우만이 쓴 발문이 붙어있다. 마지막 6권은 부록(附錄)으로 정의림(鄭義林), 이긍의(李兢儀), 최성란(崔性瀾), 김도병(金道炳) 등이 쓴 제문(祭文) 4편과 스승인 최익현이 지은 행장(行狀)과 「율수재기(聿修齋記)」, 유병긍(柳秉兢)이 지은 「율수재기후서(聿修齋記後敍)」 등이 실려 있다.

세부목차

卷一
詩, 濟州舟中, 奉審尤菴先生謫廬, 上勉菴先生匪所, 王世子誕降, 漢挐山, 關靑島登崔孤雲親掘井惑吟, 詠匪館庭草, 依重菴韻上勉菴先生, 詠夏雪, 聞通信使迎賊而來發憤口呼, 聞童謠, 上蘆沙先生, 次奇松沙(宇禺)韻, 謹次蘆沙先生丈人山韻, 蘆沙先生挽, 謹次指掌巖韻, 依韻呈鄭老石(海龍), 老石鄭公挽, 謹次曺東塢(毅坤)五十除夕韻, 詠大雪, 賀芝軒崔公推恩, 家君晬筵韻, 地震, 瑞石山房遣懷, 又吟, 瑞石山房贈別同福諸雅, 謹次河東鄭氏雙㫌韻, 瑞石山房贈綾州梁雅(在海), 與金智齋(勳), 記夢, 巳卯夏五月夢得一絶詩覺也記念者只釣得大同江上魚七字也繼以補吟, 柳丈遊山來訪夜話, 次奇云菴應三韻, 次李黙窩(兢儀)韻, 記夢, 蒼玉屛講會分韻得松字, 武陵洞槐陰下拈枝字口號五律, 與崔雲齋(永祚)夜話, 雨後與諸益相話, 詠懷, 聞勉菴先生蒙 宥卽吟, 與諸益登坦履壇習禮隨柳過漢川詠而歸, 讀勉菴先生疏, 柳健窩(秉兢)以葵花詩一絶贈余謹次以呈, 上勉庵先生, 與雲齋登德嶺撫松盤桓口呼, 上鼓山先生, 贈別金上舍歸從好堂, 贈權鐘寬, 贈林奭榮, 贈李直窩(裕善), 又, 謹呈柳龍溪(基一), 詠橘, 登石門靈泉詠而歸, 晦日後與同社六七人訪花峯到書院遺墟(白沙書院)叅拜因登最高踞巖偶吟

卷二
書, 上蘆沙先生書(十三), 上勉庵先生書(十四), 上鼓山先生書(二), 上芝軒崔公書(二), 上崔丈(升鉉)書, 上重菴金先生書, 與柳香下(秉喆)書, 荅柳省齋(重敎)書, 與柳龍溪(基一)書(三), 與奇松沙(宇萬)書(五), 荅羅德巖(燾圭)書, 與崔雲齋(永祚)書(四), 與金炳蓍書, 與田艮齋(愚)書, 與柳(各欠功)書, 荅崔溪南(琡民)書, 上宋松石(綺老)書, 與李一如(心白)書, 與宋聖澤(榮淳)書, 與李聖濬(哲榮)書, 與宋道谷(鐘雲)書, 荅鄭薇齋(枉弼)書, 與李國瑞(熙容)書, 荅朴士行 書

卷三
記, 指掌巖記, 跋, 書宋子疏箚後, 書勉菴先生疏箚後, 書洪時衡疏後, 書崔乳人行錄後, 說, 自警說, 祭文, 祭鼓山先生文, 祭蘆沙先生文, 再祭文, 聿修齋開基祝文, 行錄, 曾祖考行錄

卷四
日記, 海上日記, (附)日記跋

卷五
講說, 庸學講說, (附)蘆沙先生荅, 茝山講說, (附)勉菴先生手荅, (附)講說跋

卷六
附錄, 祭文(四), 行狀, 聿修齋記, 聿修齋記後叙, 叙述
기사목록
卷之一
卷之二
卷之三
卷之四
卷之五
卷之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