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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포집(南圃先生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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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발(跋)
  • 근서사암집후(謹書思菴集後)

남포집(南圃先生集) / 권10 / 발(跋)

자료ID HIKS_OB_F9008-01-202202.0011.0003.TXT.0003
근서사암집후
《사암선생집(思菴先生集)》은 모두 2책 6권으로, 부록은 백사(白沙)주 208)의 찬(撰)과 장(狀), 상국(相國) 청음(淸陰),주 209) 백헌로야(白軒老爺)주 210)가 실제로 서문과 발문을 썼으니 경편(瓊篇)주 211)·옥결(玉訣)주 212)이 빛나 서로 비추고 남의 이목을 빛나게 하니 아! 위대하도다. 다만 한마디 말이 있으니 덕 있는 선비에게 있어서 귀한 것은 말을 세우고 글로 써서 길이길이 세상에 드리우는 것으로, 이는 비단 문장과 시문뿐만이 아니다. 세도(世道)에 관련이 되고 풍화에 영향을 끼치는 것이 실제로 그 근본 뜻이다. 선생이 조정에 선 사십 년 동안 제상의 자리에 10여 년을 출입하면서 군덕(君德)을 보필하고 치도(治道)를 도와서 반드시 크게 건명하고 크게 수립한 것이 필시 많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편집 사이에 적막하게 장주(章奏)와 고계(告啓)에 대해 언급한 것이 한두 문자가 없는 것은 어째서인가? 선생은 어려서 화담(花潭)주 213)을 섬겨 학문이 그 통서(통서)를 이었으니 선사(先師)의 여지(餘旨)를 소술(紹述)해서 음영(吟咏)에서 발하고 장구(章句)로 전파하여 발명(發明)한 작품이 반드시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편자(片字)·척언(隻言)도 문집 중에 보이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 편집한 것은 산수(山水) 사이의 풍영(諷詠)에 불과하고, 치문(緇門)주 214)의 축율(軸律)은 유독 상세하게 기재하였으니 아! 한창려(韓昌黎)주 215)의 이른바 '별 같은 시들은 주워 모으고 해와 달 같은 석고문(石鼓文)은 빠뜨렸네.'주 216)라는 것이 이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 이것은 어찌 선생이 의탁할 만한 자제가 없어서 집안 대대로 전할 보배를 잃어버려서가 아니겠는가? 애석하도다! 아니면 대대로 전할 선생의 지위가 영상(領相)에 이르렀는데도 '좌상(左相) 사면(辭免)의 비답'이라고 했고, 율곡(栗谷)주 217)이 홍문관 대제학[文衡] 때에 지은 백사(白沙)의 행장에 임신년(1632, 인조10) 우상(右相)이라고 하는 데에 그쳤으니 또한 의심할 만하다. 모두 기록해서 바름을 구하기를 기다린다.
주석 208)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1556~1618)으로,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로,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자는 자상(子常), 호는 백사(白沙) 등이다. 이이(李珥)의 문인으로, 1580년 문과에 급제하고 사가독서(賜暇讀書) 하였다. 이후 언관직을 두루 거쳤으며, 1589년 정여립(鄭汝立)의 옥사를 다스린 공으로 평난공신(平難功臣) 3등에 올랐다. 임진왜란 때 병조 판서가 되어 전란을 지휘하였으며, 광해군 즉위 후 폐모론(廢母論)에 적극 반대하다 삭탈관직되고 북청(北靑)으로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사후에 복관되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저서로 《백사집》이 있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주석 209)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1570~1652)으로,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자는 숙도(叔度), 호는 청음(淸陰) 등이다. 우의정 김상용(金尙容)의 아우이며, 윤근수(尹根壽)의 문인이다. 1596년 정시 문과에 급제하고 1608년 문과 중시에 급제한 후 대사헌·대사성·대제학을 거쳐 육조의 판서를 두루 역임하였다. 병자호란 때 주화론(主和論)을 배척하고 끝까지 주전론(主戰論)을 주장하다 인조가 항복하자 파직되었으며, 1639년에 청나라가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요구한 출병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청나라에 압송되어 6년 후에 풀려났다. 저서에 《청음집(淸陰集)》이 있으며,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주석 210)백헌로야(白軒老爺)
이경석(李景奭, 1595~1671)으로,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자는 상보(尙輔)이며, 호는 백헌(白軒)이다. 종실 덕천군(德泉君) 이후생(李厚生)의 6대손이다. 김장생의 문인으로, 병자호란 때 〈삼전도비문(三田渡碑文)〉을 지었다. 1649년에 효종의 북벌 계획이 이언표(李彦標) 등의 밀고로 청나라에 알려져 사문(査問)하는 일이 있었다. 효종의 구명으로 목숨을 건지고 백마산성(白馬山城)에 위리안치되었다. 저서로는 《백헌집(白軒集)》 등이 있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西溪集 卷12 領議政白軒李公神道碑銘 韓國文集叢刊 134輯》
주석 211)경편(瓊篇)
상대방이 보내 준 아름다운 시를 뜻한다. 《시경》 〈모과(木瓜)〉에 "나에게 모과를 던져 주기에, 아름다운 옥으로써 갚는다.[投我以木瓜 報之以瓊琚]"라고 하였다.
주석 212)옥결(玉訣)
도가(道家)의 주문(呪文), 비결(秘訣) 등에 대한 미칭(美稱)이다. 당(唐)나라 이백(李白)의 글 〈동야어수주자양선생찬하루송연자원연은선성산서(冬夜於隨州紫陽先生餐霞樓送煙子元演隱仙城山序)〉에, "우리 몇 사람을 맞이하여 혼원에 대해 말씀해주셨는데, 금서와 옥결이 모두 여기에 있다.[延我數,子 高談混元, 金書玉訣, 盡在此矣.]"라고 하였다.
주석 213)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 1489~1546)의 호이다. 본관은 당성(唐城), 자는 가구(可久), 호는 화담·복재(復齋),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평생 관직에 나가지 않고 송도(松都)에 머무르며 학문 연구와 교육에만 전념하여 황진이(黃眞伊), 박연폭포(朴淵瀑布)와 함께 '송도 3절(松都三絶)'로 불리기도 하였다. 문집에 《화담집》이 있다.
주석 214)치문(緇門)
승려는 치의(緇衣)를 입으므로 승문(僧門)을 이른다.
주석 215)한창려(韓昌黎)
한유(韓愈, 768~824)을 가리킨다. 한유는 당(唐)나라의 문장가로 자는 퇴지(退之)이고 시호는 문공(文公)이다. 송대(宋代)에 창려백(昌黎伯)에 추봉(追封)되었으므로 한창려(韓昌黎)라고 불린다. 유가 사상을 존중하고 도교·불교를 배격하였으며, 특히 요(堯)·순(舜)에서 공(孔)·맹(孟)으로 전해 내려오던 학문의 전통을 주장하여 송대 성리학(性理學) 발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저서로는 《창려선생집(昌黎先生集)》이 있다.
주석 216)한창려(韓昌黎)의 …… 빠뜨렸네
한유(韓愈)가 주 선왕(周宣王) 때의 것이라고 전하는 석고문(石鼓文)을 발견하고서, 공자(孔子)가 《시경(詩經)》에 이 글을 채집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그가 석고가(石鼓歌)를 지어 노래한 가운데, "공자는 서쪽으로 진 나라를 가지 못하여, 별 같은 시들은 주워 모으고 해와 달 같은 석고문은 빠뜨렸네.[孔子西行不到秦, 掎摭星宿遺羲娥.]"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주석 217)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로,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 또는 석담(石潭), 시호는 문성이다. 저서에 《율곡집》이 있다.
謹書思菴集後
思菴先生集凡二冊六卷。 附白沙撰狀。 淸陰相國,白軒老爺實首尾之。 瓊篇玉訣。 炳琅相暎。 照人耳目。 嗚呼! 偉矣。 第有一言。 所貴乎有德之士。 立言著書。 垂示永世者。 非但文詞華藻而已。 其有關世道。 左右風化者。 實其本意。 先生立朝四十年。 出入相位一紀有餘。 輔弼君德。 羽翼治道。 必多大建明大樹立矣。 編集之間。 寂無一二文字及於章奏告啓之書何耶? 先生早事花潭。 學傳其緖。 則紹述先師之餘旨。 發於吟咏。 播之章句。 以發明之者。 必有其作。 片字隻言不見於集中何耶? 其所輯者。 不過山水間諷詠。 而緇門軸律。 獨加詳載。 嗚呼! 韓昌黎所謂掎摭星宿遺羲娥者。 非此之謂耶? 噫! 此豈先生階庭無托。 而家傳之寶。 有所遺失耶? 惜哉! 抑世傳先生位至領相。 而左相辭免批敎則栗谷秉文衡時所撰。 白沙之狀。 止於壬申右相。 亦可疑矣。 幷錄之。 以待求正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