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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학재권후발(三學齋券後跋)

남포집(南圃先生集) / 권10 / 발(跋)

자료ID HIKS_OB_F9008-01-202202.0011.0003.TXT.0001
삼학재권후발
해[歲舍]주 195)기해년(1659, 현종 즉위년)의 늦가을에 영평(永平)의 삼학재(三學齋)가 완성되었다. 완성된 날에 서재의 제군들이 재생(齋生)의 명적(名籍)을 취하여 나에게 글을 부탁하며 말하기를 "선생님은 이미 책 머리말을 쓰셨으니 어찌 또 한마디 말로 발문(跋文)을 쓰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그들의 뜻을 마치자 내가 의리상 구차한 변명으로 면하기 어려워 바로 삼학재의 설을 추연(推衍)하여 제생에게 큰 소리로 말하기를 "학(學)은 하나일 뿐인데 그것을 삼(三)이라고 한 것은 어째서인가? 내가 일찍이 듣건대 하남(河南) 정숙자(程叔子)주 196)께서 말하기를 '옛날의 학은 하나인데 지금의 학은 셋이니 첫째는 훈고학(訓詁學)이고, 둘째는 문장학(文章學)이며, 셋째는 유자학(儒者學)이다. 도(道)에 빨리 도달하려고 유학을 버리는 것은 불가하다'라고 하였으니 아! 유학이 세상에서 밝혀지지 않은 것이 오래되었다. 저 유방(劉邦)의 한나라가 과거로 선발하여 사람을 취하면서부터 이(李)씨의 당(唐)나라와 조(趙)씨의 송(宋)나라에 미쳐서는 학문이 날로 이목(耳目)에 달려가서 삼분의 학문이 시작되었다. 대저 자구(字句)나 해석하고 명분·의리나 탐구하고 오로지 기문(記聞)의 업(業)을 숭상한 것이 훈고(訓詁)의 학이니 지금에 '강경과(講經科)'주 197)를 말한다. 시구를 장식하고 장구(章句)를 꾸며서 한묵(翰墨)의 마당을 달리는 것이 문장(文章)의 학이니 지금에 이른바 '문예과(文藝科)'이다. 학문이란 한 구절은 곧 그 이치를 아는 것이니 그 이치를 알면 곧 독실하게 실행할 수 있게 된다. 마음에 근본 하여 몸에서 실행하는 것은 쇄소(灑埽)로 말미암아 천리(天理)에 도달하고주 198) 가정에서 시작하여 천하에 미치는 것이니 유자의 학이다. 삼대(三代)가 이미 멀어지고 옛 도를 회복하기 어려우니 지금 비록 주공(周孔)의 덕(德)과 안자·증자의 학(學)이 있더라도 과업(科業)을 통하지 않고 군주에서 신임을 얻어 도를 행하기 어려우니 문장(文章)·훈고(訓詁)의 학문을 어찌 전부 폐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이 서재를 삼학(三學)이라고 이름 붙인 뜻이다. 무릇 이 서재에 들어가 이 학문을 강(講)하는 자들은 동몽(童蒙)들은 먼저 훈고(訓詁)를 배우고 조금 자란 자는 문사(文辭)를 학습하고 성인은 전적으로 의리(義理)를 위주로 하여야 한다. 박문약례(博文約禮)주 199)는 먼저 그 큰 것을 세운 연후에 내가 소유한 것을 미루어 문사(文辭)의 사이에 도달하고, 그 남긴 가르침의 나머지에 응당 진취의 도구를 들어서 그 큰 근본을 확충하고 효친(孝親)·경형(敬兄)·충군(忠君)·제장(悌長)의 도(道)로 삼는다면 학문을 하는 도가 거의 원류가 혼탁하지 않아서 본말이 서로 닦이게 될 것이다. 만약 말(末)에 치달리고 근본을 버려서 투박하고 사치스럽고 장단(長短)을 다툼에 힘쓰며 명예에 치달리고 영리(榮利)에 뜻을 두어 그 본체를 상실한다면 서재를 이름 붙인 본래의 의미가 아닐 것이다."라고 하였다. 모두 "예"라고 대답하였다.
인하여 그 말들을 기록하여 책의 끝에 써서 경계로 삼는다. 아침저녁으로 의관을 정제하고 서재에 들어가 서생들을 이끌고 장구(章句)를 가르치는 자는 영평(永平) 문만욱(文晩郁) 군, 진양(晉陽) 정지(鄭榰) 군, 파평(坡平) 윤선기(尹先夔) 군이 그들이다. 장자후(張子厚) 선생주 200)의 이른바 '교인사익(敎人四益)'주 201)을 세 사람이 알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주석 195)세사(歲舍)
세재(歲在), 세차(歲次)와 같은 말이다.
주석 196)정숙자(程叔子)
북송(北宋)의 학자 정이(程頥, 1033~1107)로, 자는 정숙(正叔)이고 이천(伊川) 선생으로 불린다. 형 정호(程顥)와 함께 이른 나이에 주돈이(周敦頥, 1017~1073)에게 수업하여 북송 이학(理學)의 터전을 다졌고, 오랜 기간 낙양(洛陽)에서 강학하였기 때문에 '낙학(洛學)'이라 불렸다. 후인들이 그들의 논설과 저작을 정리하여 《유서(遺書)》·《문집(文集)》·《경설(經說)》 등을 편찬하였고, 이를 《이정전서(二程全書)》에 수록하였다.
주석 197)강경과(講經科)
과거 시험에서 시험관이 지정하여 주는 경서의 대목을 외던 일을 말한다. 주로 오경(五經)인 《시경(詩經)》·《서경(書經)》·《주역(周易)》·《예기(禮記)》·《춘추좌전(春秋左傳)》과, 사서(四書)인 《대학(大學)》·《중용(中庸)》·《논어(論語)》·《맹자(孟子)》에서 출제(出題)되었다. 성적은 등급 중 통(通)이 첫 번째이다. 다음은 약(略), 조(粗), 불(不)이다.
주석 198)쇄소(灑埽)로 …… 도달하고
쇄소응대(灑掃應對)는 물 뿌리고 청소하며 응하고 대답하는 것으로, 소학(小學)의 공부이다. 대학(大學)에서 최종 목표인 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는 소학(小學)에서 강조한 물 뿌리고 쓸고 응답하는 쇄소응대(灑掃應對), 즉 누구나 할 수 있는 사소한 일상 속에서부터 그 공부를 시작한다는 말이다. 하학(下學)을 통해 상달(上達)한다는 말은 아래로 인사(人事)를 배운 뒤에 위로 천리(天理)에 도달한다는 뜻이다.
주석 199)박문약례(博文約禮)
글을 통하여 지식을 넓히고 예를 통해서 행동을 검속하는 것이다. 《논어》 〈옹야(雍也)〉에 "군자가 글을 널리 배우고 예로써 요약한다면 또한 도에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君子博學於文, 約之以禮, 亦可以弗畔矣夫.]"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주석 200)장자후선생(張子厚先生)
북송의 학자 장재(張載, 1020~1077)로, 자는 자후(子厚), 시호는 헌공(獻公)이다. 횡거(橫渠)는 그의 호이다. 유가와 도가의 사상을 조화시켜 우주의 일원적 해석을 설파함으로써 이정(二程)·주희(朱熹)의 학설에 영향을 끼쳤다. 저서에 《정몽(正蒙)》, 《장자전서(張子全書)》 등이 있다.
주석 201)교인사익(敎人四益)
어린 후학을 가르치는 네 가지 유익함을 말한다. 장재(張載)가 말하기를, "어린이를 가르치는 데에도 유익한 점이 있으니, 자신을 얽어매어 함부로 드나들지 못하는 것이 첫 번째 유익함이요, 남에게 자주 가르쳐 주다 보면 자신도 글 뜻을 깨닫게 되는 것이 두 번째 유익함이요, 어린이를 대할 적에도 반드시 의관을 바르게 하고 자세를 의젓하게 갖는 것이 세 번째 유익함이요, 항상 자기로 인해서 남의 재주를 잘못되게 하는 것을 걱정하면 감히 게으름을 피우지 못하는 것이니 네 번째의 유익함이다.[敎小童亦可取益, 絆己不出入, 一益也. 授人數數, 己亦了此文義, 二益也. 對之必正衣冠尊瞻視, 三益也. 常以因己而壞人之才爲憂則不敢惰, 四益也.]"라고 하였다. 《近思錄 권10 政事》
三學齋券後跋
太歲舍己亥之暮秋。 永平之三學齋成。 成之日。 齋之諸君取齋生名籍屬余曰: "子旣序其券首矣。 盍又一言以跋之?" 以卒其意。 余義難以辭苟免。 乃推衍三學齋之說。 嘏于諸生曰: "夫學一而已矣。 謂之三者何也? 竊嘗聞河南程叔子有言曰: 古之學者一。 今之學者三。 一曰'訓詁之學'。 二曰'文章之學'。 三曰'儒者之學'。 欲趍道。 舍儒學不可。 嗚呼! 儒學之不明於世久矣。 粤自劉漢氏以科選取人。 逮李唐趙宋。 學日趍於耳目而三分之學作矣。 夫字解句釋。 探賾名義。 專尙記聞之業者。 訓詁之學也。 今之所謂講經科也。 藻語葩辭。 繡章錦句。 馳騁翰墨之場者。 文章之學也。 今之所謂文藝科也。 學一句便知其理。 知其理便篤行之。 本之心而行之身。 由灑埽而達之天理。 始於家而及於天下者。 儒者之學也。 三代旣遠。 古道難復。 今雖有周孔之德顔曾之學。 不由科業。 難於得君而行道。 則文章訓詁之學。 安可專廢也? 此命斯齋三學之義也。 凡入是齋講斯學者。 童蒙者先學訓詁。 稍長者學習文辭。 成人者專以義理爲主。 博文約禮。 先立其大者。 然後推吾所有。 達之文辭之間。 以其緖餘。 爲應擧進取之具而擴充其大本。 以爲孝親敬兄忠君悌長之道則爲學之道。 庶乎源流不渾。 本末交修矣。 若夫趍末而棄本。 以標竊偸靡。 爭長競短爲務。 馳心於聲譽。 騖意於榮利。 喪失其本軆則非名齋之本意也。" 僉曰: "唯。" 仍記其說。 書于卷末以警之。 朝暮整衣冠入齋中。 引諸生訓章句者。 永平文居晩郁,晉陽鄭君榰,坡平尹君先夔其人也。 張子厚先生所謂敎人四益。 三君亦不可不知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