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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포집(南圃先生集)
  • 권10
  • 서(序)
  • 성암집서【이름은 수인(壽仁)이고 호는 성암(惺庵)이다. 청련(靑蓮) 후백(後白)의 손자로 인조 연간에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고 역학(易學)에 침잠하여 생을 마쳤다.】(惺庵集序【名壽仁號惺庵。 靑蓮後白之孫。 仁廟朝登第不仕。 沉潛易學而終。】)

남포집(南圃先生集) / 권10 / 서(序)

자료ID HIKS_OB_F9008-01-202202.0011.0001.TXT.0004
성암주 29)집서【이름은 수인(壽仁)이고 호는 성암(惺庵)이다. 청련(靑蓮) 후백(後白)의 손자로 인조 연간에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고 역학(易學)에 침잠하여 생을 마쳤다.】
호남(湖南)은 실로 우리 조선 사대부의 기북(冀北)주 30)이다. 현인 군자의 배출이 앞뒤로 서로 접하여 끊이지 않았다. 학자의 정전(正傳)을 칭하는 것에 이르러서는 선배가 모두 기존재(奇存齋)주 31)를 수장으로 추존하였다. 존재의 학문은 퇴도(退陶)주 32)에서 나왔고, 퇴계의 전함은 주자(朱子)주 33)에 근본한다. 세상에서 도를 알지 못하고 구이지학(口耳之學)주 34)이나 강기(强記)를 학문이라고 여기는 자들은 퇴계를 흠잡으면 주자에게 의양(依樣)하는 것을 병통으로 삼고, 존재를 말하면 퇴계를 신봉하는 것을 하자로 여겼으니 내가 비록 불민하나 일찍이 깊게 병통으로 여겼다. 년 전에 안정동(安靜洞)의 정은당(靜隱堂)에서 성암(惺菴) 이문(李文) 어른을 뵙고 논함이 이 일에 미쳐서 공이 추연(愀然)이 말하기를 "거경궁리(居敬竆理)는 체가 있고 용이 있는 학문이니 크게 중정(中正)하여 지극한데 그치고, 치우치고 기울지 않은 것은 공자·맹자[鄒魯]주 35)의 뒤에 주자가 크게 완성하였기 때문이다. 당시 한 세대에 태어난 사람들이 육자정(陸子靜) 형제주 36)와 같이 총명하고 통달·박식하여도 오히려 교수병행(交修並進)의 바름에서 중정을 얻지 못하고 일변에 치우치는 것을 스스로 알지 못하였다. 오직 퇴계가 나라의 변방인 편벽한 지역에서 태어나 선생과 수백 년 떨어져 있었음에도 잔편(殘編)의 진간(陳) 중에 그 종지를 얻었다. 퇴계의 문하에서 공부하고 친히 가르침을 받은 자가 한둘이 아니었으나 기존재가 한 번 만나 짧고 간단한 말 사이에서 대의를 얻었다. 편지를 주고받은 나머지에 도(道)의 전수(傳受)가 땅의 원근(遠近), 만남의 소삭(踈數)에 달려 있지 않음이 이와 같았다. 알아주지 않는다는 책망은 본디 말할 것이 못 되고 후학들이 독실하게 믿고서 의심하지 않아서 마땅히 더욱 정밀하였으니 아! 누가 이 말을 알아서 학문의 요결을 주었겠는가?"라고 하였다.
대개 일찍이 공의 학문을 들여다보면 퇴계(退溪) 이황(李滉)과 존재(存齋) 기대승(奇大升)의 사이에서 감발한 것이 많았다. 이 때문에 주문(朱文)주 37)을 위주로 독송하고 《퇴도서절요(退陶書節要)》주 38)를 귀착점의 중심으로 삼았으며, 《주역(周易)》주 39)을 묵묵히 궁구하여 주자(朱子)의 《계몽(啓蒙)》주 40)을 요지로 삼았고, 《역학계몽》을 읽을 때는 퇴계 이황의 《역학계몽전의(易學啓蒙傳疑)》주 41)를 지남(指南)으로 삼았다. 그 치도(治道)를 논하면 치심으로 천하의 근본을 삼고, 치심(治心)을 논하면 거경을 궁리의 표준으로 삼았는데 그 말이 〈사직봉사(辭職封事)〉에 대략 보인다.
평소에 산수 사이에서 그윽한 정(貞)을 좋아하여 한가하게 사물을 읊은 시 구절에 나오는 것이 순수하고 단정하니 또한 마음가짐에 법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아! 궁벽진 산골짜기에 빛을 숨기고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자임에도 그가 사람들을 대하는 것에는 본디 모난 행동이나 겉치레가 없고, 범인들과 말함에 한마디도 학문을 억지로 끌어들이지 않았으니 이 때문에 공을 아는 자들은 물욕이 없는 깨끗한 사람으로 지목하였고, 공을 모르는 자들은 범연하게 이름있는 사대부(士大夫)로 논하였으나 세상에 도를 아는 자가 드물었으니 어찌 탓할 것이 있겠는가? 애석하게 생각하는 것은 유학에 뜻을 두고 스스로 독실하게 믿어서 장차 큰일을 할 날이 있었는데 문득 세상을 떠난 것이다. 가문을 맡길 곳이 없고 학문을 전할 자가 없어서 평소에 저술한 것들이 잡지(雜紙)·난고(亂藁) 가운데 섞이고 없어지고 흩어졌는데 소장(疏章)과 시율(詩律) 약간 편을 그 이웃 동자들이 뽑아 기록해 보관하였다.
공의 생질 신성필(愼聖弼)주 42) 군이 수집하여 출판하여 전하려고 하면서 내가 일찍이 공이 학문을 논한 나머지를 미리 들었다고 하여 원고를 보내 보여주었다. 아! 덕이 있는 자는 반드시 말이 있으나 말은 그의 덕을 믿는 데 필요하지 않다. 공은 평소에 박학(博學)으로 이치를 궁구하고 거경(居敬)으로 마음을 보존하여 은미(隱微)하고 유독(幽獨)한 가운데에 사람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도 부끄러움 없이 살았으니주 43) 한두 문자를 전하는 것 또한 가능할 것이고 전하지 않는 것 또한 가능할 것이다. 사람들이 알아주어도 또한 좋을 것이요 알아주지 않아도 또한 해될 것이 없다. 이 때문에 공이 논한 나머지의 몇 마디 말에서 예전에 들은 것을 기록하여 이렇게 돌려보내 공의 심학(心學) 유래의 일부를 전한다.
주석 29)성암(惺菴)
이수인(李壽仁, 1601~1661)의 호이다.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유안(幼安)이다. 전라남도 강진 출신이다. 1633년 과거에 급제하여 전적, 병조 좌랑, 정언을 역임하였다. 1642년 재차 전적에 제수되었으나 사은한 뒤 바로 전리(田里)로 내려갔으며, 이후로도 여러 차례 벼슬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나가지 않았다.
주석 30)기북(冀北)
기북은 준마(駿馬)가 많이 생산되는 지역으로 인재가 많음을 비유한 말이다. 한유(韓愈)의 〈송온조처사서(送溫造處士序)〉에 "백락이 말의 고장인 기북 지방을 한번 거쳐 가자, 말 떼가 마침내 텅 비게 되었다고 한다."[伯樂一過冀北之野, 而馬群遂空.]라는 구절이 보인다.
주석 31)기존재(奇存齋)
기대승(奇大升, 1527~1572)으로, 존재는 그의 호이다. 본관은 행주(幸州), 자는 명언(明彦), 호는 고봉(高峯)이다. 기묘명현의 한 사람인 기준(奇遵)이 그의 계부(季父)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1570년에 대사성으로 있다가 영의정 이준경(李浚慶)과의 불화로 해직당하였다. 1572년에 종계변무 주청사(宗系辨誣奏請使)로 임명되었으며, 공조 참의를 지내다가 병으로 인해 귀향하던 도중 고부(古阜)에서 죽었다.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저서에 《고봉집(高峯集)》이 있다.
주석 32)퇴도(退陶)
이황(李滉, 1501~1570)으로, 본관은 진보(眞寶),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퇴도(退陶)·도수(陶叟),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1534년 과거에 급제하여 홍문관 수찬, 단양 군수(丹陽郡守), 풍기 군수(豊基郡守), 성균관 대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이후 벼슬에서 물러나 도산서당(陶山書堂)을 짓고서 학문에 전념하였으며 많은 제자를 훈도하였다.
주석 33)주자(朱子)
주희(朱熹, 1130~1200)로, 자는 원회(元晦)·중회(仲晦), 호는 회암(晦庵)·회옹(晦翁)·운곡노인(雲谷老人)·둔옹(遯翁) 등이며 존칭하여 주자(朱子)라고 부른다.
주석 34)구이지학(口耳之學)
배운 것을 그대로 남에게 옮길 뿐 자신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천박한 학문을 이른다. 《순자(荀子)》 〈권학(勸學)〉에서 "소인의 학문은 귀로 들어왔다가 곧장 입으로 나간다.[小人之學也, 入乎耳出乎口.]"라고 하였다.
주석 35)추로(鄒魯)
추(鄒)는 맹자의 고향이고, 노(魯)는 공자의 고향으로, 공자와 맹자를 가리킨다.
주석 36)육자정(陸子靜) 형제
남송의 사상가들인 육구연(陸九淵, 1139~1192)과 육구령(陸九齡, 1132~1180) 형제를 말한다. 육자정은 육구연으로 자정은 그의 자이고, 호는 상산(象山), 시호는 문안(文安)이며, 무주(撫州) 금계현(金谿縣) 사람이다. 육구연은 '심즉리(心卽理)'의 주관적 유심론(主觀的唯心論)을 주창하여 주자의 성즉리(性卽理)와 천리인욕설(天理人欲說)에 대항하였는데, 이때부터 유학은 심학(心學)과 이학(理學)의 두 학파로 갈라졌다. 뒤에 육구연의 학문은 왕양명(王陽明)에게 계승되어 양명학(陽明學)으로 발전하였다. 육구령은 자가 자수(子數)인데 세칭 복재선생(復齋先生)으로 불렸다. 동생 육구연과 사우(師友)가 되어 아호(鵝湖)에서 강학하면서 '이륙(二陸)'으로 일컬어졌으며, 전주교수(全州敎授) 등을 역임하였다. 유학에 깊은 성취를 거두어 당시 사람들에게 '해내유종(海內儒宗)'이라는 칭송을 받았다.
주석 37)주문(朱文)
주희(朱熹)의 글을 가리키기도 하고, 시호가 문(文)인 주희를 바로 지칭하기도 한다.
주석 38)《퇴도서절요(退陶書節要)》
이상정(李象靖, 1711~1781)이 지은 책이다. 이상정은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경문(景文), 호는 대산(大山)이며,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외조부인 이재(李栽)에게 배웠다. 1735년(영조11)에 증광시에 병과로 급제하여 사간원 정언, 예조 참의 등을 지냈다. 저술로 《대산집》·《이기휘편(理氣彙編)》·《사칠설(四七說)》·《제양록(制養錄)》·《퇴도서절요(退陶書節要)》 등이 있다.
주석 39)《주역(周易)》
사물의 변화하는 현상을 예측하는 점서(占筮)로, 고대로부터 《연산역(連山易)》·《귀장역(歸藏易)》·《주역(周易)》 등 세 가지의 역(易)이 있었는데, 앞의 두 가지 역은 없어지고 《주역》만이 후대에 전해졌다. 《주역》은 음양의 두 효(爻)를 세 개씩 중첩하여 만든 8개의 괘와, 8개의 괘를 겹쳐 만든 64개를 근간으로 하여, 매 괘마다 괘사(卦辭)가 있고, 괘마다 6개의 효가 있고 효마다 효사(爻辭)가 있다.
주석 40)《계몽(啓蒙)》
주희가 초학자를 위해 지은 《주역》의 해설서인 《역학계몽(易學啓蒙)》을 말한다. 4권 으로 구성하여 1186년에 완성했다. 주희는 《주역본의》 12권을 통해 점서와 의리를 융합하여 《주역》의 본의를 밝히려 했으며, 《역학계몽》에서는 역의 도식, 점서에 대한 수리적 설명에 주력했다. 이 책은 조선에서도 일찍이 간행되어 유학자들 사이에 널리 읽히고 연구되었으며 역대 왕들이 강독했다.
주석 41)《역학계몽전의(易學啓蒙傳疑)》
이황(李滉)이 주희(朱熹)의 《역학계몽(易學啓蒙)》에 대해서 변석(辨釋)한 책인데, 모두 1책으로 되어 있다.
주석 42)신성필(愼聖弼)
자는 여뢰(汝賚)이고, 호는 경암(敬庵)이다. 감사를 지낸 신희남(愼喜男)의 5세손으로, 아버지는 성균관 생원 신광익(愼光翊)이고, 형은 참봉 신성윤(愼聖尹)이다.
주석 43)사람들이 …… 살았으니
위로는 하늘에 부끄럽지 않고[仰不愧] 아래로는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다[俯不怍]는 내용으로 《맹자(孟子)》 진심상(盡心上)에 보인다. 맹자가 이르기를 "군자에게 세 가지 즐거움이 있으니, 천하에 왕 노릇 하는 것은 여기에 끼지 않는다. 부모가 다 생존하고 형제가 무고한 것이 첫 번째 즐거움이요, 위로는 하늘에 부끄럽지 않고 아래로는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은 것이 두 번째 즐거움이요, 천하의 영재를 얻어서 교육시키는 것이 세 번째 즐거움이다.[君子有三樂, 而王天下不與存焉. 父母俱存, 兄弟無故, 一樂也. 仰不愧於天, 俯不怍於人, 二樂也. 得天下英才而敎育之, 三樂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孟子 盡心上》
惺庵集序【名壽仁號惺庵。 靑蓮後白之孫。 仁廟朝登第不仕。 沉潛易學而終。】
湖南實我朝士大夫之冀北也。 賢人君子之出。 前後相接不斬。 至以學者正傳稱之則先輩皆推奇存齋爲首。 存齋之學。 出於退陶。 退陶之傳。 本之朱子。 世之不知道而以口耳强記爲學者。 疵退陶則以依樣朱子爲病。 說存齋則以崇信退陶爲玷。 愚雖不敏。 竊嘗深病。 年前拜惺菴李文丈于安靜洞之靜隱堂。 論及此事。 公愀然曰: "居敬竆理。 有體有用之學。 大中至止。 不偏不倚者。 鄒魯之後。 朱夫子爲大成。 當時幷生于一世者。 聰明達識若陸子靜兄弟。 尙不能得中於交修並進之正。 不自知其偏入于一邊。 惟退陶生于惟退陶生于邦僻海之間。 遠先生數百年而得其宗于殘編陳之中。 遊退陶之門。 親承耳提面命者。 不一其人。 而存齋能得其大意於一面片辭之間。 往來尺牘之餘。 則道之傳授。 固不在於地之遠近見之踈數者如此。 不知之誚。 固不足言。 而後學之篤信不疑。 當益密矣。 嗚呼! 誰知斯言也而與之訣哉?" 盖嘗窺公之爲學。 感發於退存之間者多矣。 是以讀誦專主朱文。 而以退陶節要爲歸重。 默究周易而以朱子啓蒙爲要旨。 讀啓蒙則以退陶傳疑爲指南。 其論治道則以治心爲天下國家之本。 論治心則以居敬爲竆理之標準。 而其言略見於辭職封事矣。 雅好山水間幽貞而出於吟閑咏物之句者。 淸粹端潔。 亦可以知其心操之有法矣。 嗚呼! 潛光於潛光於山絶壑之中。 世無知者。 而其對衆人。 固無崖異之行邊幅之修。 與凡人言。 片語未嘗强及於學文。 是以知公者。 以恬退淸淨目之。 不知公者以汎然名士大夫論之。 世之知道者鮮矣。 安足怪哉? 所可惜者。 有志斯學。 方自篤信。 將大有爲之日。 而奄忽長逝。 傳家無托。 承學無傳。 平日著述。 渾沒於雜紙亂藁之中而散失之。 其疏章及詩律如干篇。 其隣里童子抄錄而藏之。 公之甥愼君聖弼求得之。 將欲倩工剞劂而傳之。 以不佞嘗預聞其論學之緖餘。 寄稿本以示之。 嗚乎! 有德者必有言。 言不必信其德。 公之平日若能博學而平日若能博學而其理。 居敬而存其心。 隱微幽獨之中。 人所不見之地。 仰不愧俯不怍。 則一二文字。 傳亦可矣。 不傳亦可矣。 人之知之。 固亦善矣。 不知之。 亦不足傷矣。 是以書其曩日得聞于公之餘論數言于玆以還之。 以白公心學所自之萬一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