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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8
  • 오사익에게 보냄(與吳士益 辛巳)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 권8

자료ID HIKS_OB_F9002-01-201801.0008.TXT.0021
오사익에게 보냄
일전에 석리(石里)에서 돌아오는 길에 안동(安東) 김승규(金昇圭)가 짓고 해평(海平) 윤용구(尹用求)가 글씨를 쓰고 은진(恩津) 송규헌(宋奎憲)이 전(篆)을 한 봉열 대부(奉列大夫) 왕자사부(王子師傅) 유공(柳公) 신도비(神道碑)를 보았는데, 돌아와서 국법(國法)의 관계(官階)를 살펴보았더니, 봉렬 대부는 4품이었습니다. 나는 일찍이 한쪽의 사람들이 선사가 지은 소윤(少尹) 최공(崔公)의 신도비에 대해 "국전에 합치되지 않는다. 2품 이상이라야 신도비의 격식에 맞으니 갈(碣)로 고쳐야 한다."고 말한 것에 대해, 《주자대전》 〈위재행장(韋齋行狀)〉에 "공은 통의대부(通議大夫) 정(正) 제 4품의 관직이 추증되었으니 격식에 맞춰 신도비를 세워야 한다."는 글과 장남헌(張南軒)을 위해 신도비문을 지은 일을 들어 【위재의 통의대부는 그래도 4품이 되었지만, 남헌은 낭서(郎署)에 불과하니 더욱 말할 필요가 없다.】증거로 삼아 말하기를 "선사는 주자를 사법으로 삼은 것인데 무슨 불가함이 있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그가 이에 말하기를 "이것은 송나라 조정의 일이고 우리 조정의 일이 아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또 율곡 선생이 지은 저의 선조 승지공(承旨公)의 신도비 및 상국(相國) 민기(閔箕)가 지은 통정대부(通政大夫) 신공(申公)의 신도비를 들어 증거로 삼아 말하기를, "선서는 율옹을 사법으로 삼은 것인데 무슨 불가함이 있겠는가? 그리고 민공은 한 나라의 총재(冢宰)로서 어찌 국법을 몰랐겠는가? 우리 조정의 일이 아니었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이윽고 또 피차가 국전 등의 여러 글들을 두루 살펴보았으나 끝내 비와 갈에 대한 법식을 찾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또 "어떤 무엄한 자가 국전의 분명한 글을 보지 않고 감히 우리 선사가 손수 정한 본문을 고치는가?"라고 말하고는 내버려 두고 더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오히려 말하기를 "2품이 되어야만 비로소 대비(大碑)를 세울 수 있다. 수백 년 이래 우리나라의 사대부 집안이 모두 그렇게 하지 않음이 없었다. 어찌 선사만 유독 최씨 일을 위하여 위반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김씨, 윤씨, 송씨 세 집안의 혹은 부친이 대제학이 되고 자신이 판서나 직각이 된 자는 유독 우리나라의 사대부가 아니란 말입니까? 이들이 오히려 국법이 있는 줄 모르고 유씨의 집을 위해 글을 짓고 글씨를 썼겠습니까? 참으로 사람으로 하여금 실소를 짓게 만드는 일입니다. 앞서 열거했던 사례들로 살펴보면, 애당초 최공의 비문에 대해 의론해서 안 됨이 너무도 명백합니다. 그런데 그가 마침내 감히 선사가 늙어서 살피지 못하고 두루 식견이 없어서 국법을 파괴하고 사람들의 꾸짖음을 범하였다고 하면서 선사가 손수 정한 본문을 멋대로 고쳤으니, 마음속에 선사가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에 마음은 더욱 어그러지고 손은 갈수록 교활해져 마침내 진주본(晉州本)에는 못하는 짓이 없었으니, 참으로 사람으로 하여금 통분하게 하였습니다. 우연히 유공의 신도비를 보고 이런 생각이 난지라 애오라지 받들어 묻습니다.
與吳士益 辛巳
日前石里歸路,見安東金昇圭撰海平尹用求書恩津宋奎憲篆奉列大夫王子師傅柳公神道碑,而歸考國典官階,則奉列爲四品矣。弟曾於一邊人之以先師所作少尹崔公神道碑,謂"不合國典,二品以上乃得爲神道碑之式,而改之爲碣也",據《朱子大全‧韋齋行狀》"公贈官通議大夫正第四品,準格當立碑神道"之文及爲張南軒作神道碑事【韋齋之通議,猶得爲四品,南軒之不過郞署者,尢不須言。】 以證之曰: "先師之師法朱子,有何不可乎?" 彼乃曰: "此宋朝事,非我朝事。" 則吾又引栗谷先生所撰鄙先祖承旨公神道碑及閔相國箕所撰通政申公神道碑以證之曰: "先師之師法栗翁,有何不可? 閔公之爲一國冡宰,而豈不知國典乎? 而不是我朝事乎?" 旣又彼此徧考國典諸書,而終不得見碑碣令式,則吾又曰"何許無嚴者不見國典明文,敢改先師手定本文乎?" 而置不復道矣。彼猶曰: "二品始得爲大碑,數百年來國朝士大夫家無不皆然,何得先師獨爲崔氏事而違之乎?" 然則今之金、尹、宋三家,或父爲大提學,身爲判書、直閣者,獨非國朝士大夫乎? 而尙不知有國典而爲柳氏家作之書之乎? 眞令人可笑。蓋以以上所列觀之,初不當以崔公碑事設論也,章章明矣。彼乃敢謂先師老不省博無識,破國典犯人罵,而任改手本,是可謂心中有師乎? 於是乎心愈悖而手轉滑,終至無所不至於晉州本,眞令人可痛。偶見柳碑,念到于此,聊以奉質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