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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강서원지(鳳崗書院誌) / 卷之一 / 序

자료ID HIKS_OB_F1039-01-231130.0002.0001.TXT.0002
봉강서원지 발간서
풍패로부터 바로 북으로 삼십리를 행하여 걸음을 멈추면 이삼십 농가가 있어
봄에 갈고 가을에 거두니 다만 벼와 보리의 성장을 말하니 곧 봉강마을이다
휘황하게 단청된 기둥이며 들보에 높다란 同마루집이 있어 산을 등지고 물을
굽어보니 이는 바로 봉강서원이다 이 서원은 영조 갑술년에 同군 용진면
목단同에 창건되어 액호를 목단서원이라하니 양희공 망우당 이선생의 제사를
모시는 곳이다 선생은 태조대왕의 맏아들로 태어나서 몸이 지극히 어려운 기
회에 처하여 이땅에 귀양살이를 하게 되었다 스스로 나무꾼과 농부와 같이
어울려 우려운 풍파의 고민을 잊으셨다 대개 선생이 남기신 문자와 물려준
덕업은 병화에 소실되어 이제 다시 보지 못하니 이것이 애석하도다 그러나
여러분의 찬술한 행장이며 묘갈등 문자가 이씨세보에 고루 실려 있으니 근원
을 거슬러 흐름을 찾을 수 있으며 류를 들면 방증도 나타난다 야은 길재
(吉再)의 등촉을 내던짐과 석간 조운흘(趙云仡)의 책상을 침과 석탄 이양
중(李養中)의 술잔을 깨뜨림과 선생의 소를 잊음이 다같이 차운암 원부(原頫)
의 화를 당함을 슬피 여기는 뜻에서 나온 일이니 이에서 가히 선생의 세상
을 걱정하는 마음을 알겠으니 마땅히 그 높이 받들며 그 제사로 모시어 긴
세월에 더욱 경건하여 침체치 말지어다 삼십구년을 지내어 정조 임자년에 이
르러 이터에 옮겨 건축하고 이름을 봉강서원이라 고쳤다 철종 신유년에 충간
공국헌이선생을 추배하니 선생은 공자왕손이라 휘(諱)는 헌구(憲球)니 철종
묘에 배향되었다 벼슬은 좌의정이니 일찌기 전라관찰을 지냈으니 이땅은 교화
가 지낸 땅이다 백이십오년을 지내어 병인년 봄에 공도공 해화당 서선생을 추
배하니 선생은 이천인이라 휘(諱)는 선(選)이니 증 우의정 행이조판서라 숙
종 갑신년에 설봉서원에 배향되었다 선생과 同문이요 同지시다 이제 서선생의
추배로 인하여 본손과 사림의 뜻이 합하여 구원지를 정이하고 신귀제를 수록
하여 인쇄에 들게되니 나로 하여금 원임의 반열에 있다 하여 서문으로서 책
임케 하니 돌아보건데 사람과 문자가 다 적임이 아니라 어찌 감당하리오 간
절히 생각하니 이 고을에 원사의 설치됨이 많치않음이 아니나 덕행과 훈업이
능히 당세에 드러나고 유덕이 백세에 전하는 이 거의 드물거든 이일이 또한
향여에 광채가 난다한들 누가 허무한 말이라 하리요 드디어 사양치 않고 소
감을 위와같이 쓰노라
공부자탄강이천오백삼십칠년 병인 월 일
후학반남박찬호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