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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상집(蓮上集)

기본정보
· 유형분류 고서-집부-별집류
· 내용분류 교육/문화-문학/저술-문집
· 작성주체 편저자 : 안중섭(安重燮)
· 간사년 刊記(推定): (行狀)高宗癸未(1883)終于蓮桐...(跋)觀化後二十三年...歿三朔~工告斷于...乙巳(1905) (1905)
· 간사지
· 형태사항 크기 : 32.7 X 22.3 / 木活字本 / 책수 : 2 / 반곽 : 18.3 X 24.7 / 有界 / 12行22字 / 한자 / 內向2葉花紋魚尾
· 소장처 현소장처 : 국립중앙도서관 / 원소장처 : 미상
정의

1905년에 간행한 조선말기의 학자 안중섭(安重燮, 1812~1883)의 시문집.

해제
『연상집(蓮上集)』 해제


1. 안중섭(安重燮)의 생애
『연상집(蓮上集)』은 안중섭(安重燮, 1812~1883)의 시문집으로 그의 자는 순화(舜華), 호는 연상(蓮上), 본관은 죽산(竹山)이다. 그의 선조들이 고창에 거주하게 된 것은 안초(安迢, 1420~1483)의 여섯째 아들 안자전(安子詮, 1461~1489)이 모양(牟陽) 윤씨(尹氏) 지평(持平) 호(瑚)의 딸과 혼인하여 낙남(落南)하면서부터이다. 이후 안자전의 손자이자 안중섭의 8대조인 안지(安祉)는 학포(學圃) 양팽손(梁彭孫)과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문하에 출입하였다. 그러나 안중섭에 이르기까지 과거 합격자를 배출하지 못하였다. 그는 아버지 주욱(周郁)의 명으로 과거를 준비하였는데, 1837년1838년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연달아 돌아가시자 극진하게 예를 다하여 상을 치루었다. 고조부는 대(岱), 증조부는 수창(守昌), 조부는 방덕(邦德)이다. 아버지는 주욱(周郁)으로 호는 만재(晩齋)이며, 비(妣)는 선산(善山) 김광현(金光顯)의 딸이다. 배(配)는 청도(淸道) 김씨 홍우(弘佑)의 딸과 함평(咸平) 이씨 돈인(敦仁)의 딸이다. 안중섭1812년(순조 12) 11월 5일 모양현(牟陽縣, 고창) 연동리(蓮洞里)에서 태어났다. 1883년에 세상을 떠났다. 부인 함평(咸平) 이씨(李氏) 돈인(敦仁)의 딸 사이에서 1남 3녀를 두었다.
그는 일찍이 기정진의 문인이 된 뒤로 문장에 힘써서 기정진참판 이윤수(李潤壽)로부터 문장에 뛰어나다고 평가를 받았다. 노사 선생은 덕행이 독실하고 문장이 간결하면서도 정밀하다고 칭하였다. 1880년(고종 17) 증광시(增廣試)에서 진사(進士) 3등으로 합격하여 당시에 학행으로 이름이 알려졌다. 이후 용강정사(龍岡精舍)를 증수(增修)하고 후생들을 지도하면서 기양연(奇陽衍), 기량연(奇亮衍), 기우만(奇宇萬)기정진 집안사람들과 정하원·조의곤 등과 같은 동향인과 가깝게 지냈다.
안중섭은 타고난 기품이 순수하여 부모님 앞에서 거절하는 말이나 얼굴을 찡그리지 않았으며 명을 어기지 않았다. 덕량은 크고 깊어 기쁘거나 화를 드러내지 않았고, 모든 행동에 법도가 있었으며 말하고 웃는 것에 구차하지 않았다. 4세에 아버지 만재(晩齋) 공이 천자문을 주니 외우는 것을 보고, 곧 『격몽요결(擊蒙要訣)』 등의 책으로써 가르쳤는데 총명하고 민첩하여 법도에 맞게 행동하였다. 10세에 묵재(默齋) 이상사(李上舍)를 스승으로 삼았는데, 묵재가 말하길 "이 아이는 덕량(德量)이 크고 깊고 그 재주가 뛰어나니 후일 입신하여 우리 당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성동(成童)이 되기 전에 이미 거인(巨人)의 용모가 있었으며, 책 읽는 것을 좋아하고 총명하여 깨우침이 남보다 뛰어났다. 모든 경전자집(經傳子集)을 외우고는 반드시 손수 베껴두고 읽었다.
1836년(헌종 2)에 첫 번째 배위(配位)인 청도김씨(淸道金氏)의 상을 당하였는데, 배위의 나이가 당시 28세였다. 딸이 한 명 있었는데 젖을 먹을 수가 없어서 복을 마치고, 다시 함평 이씨 돈인(李敦仁)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1837년(헌종 3)에 아버지 상을 치르고 1838년(헌종 4)에 어머니 상을 치렀다.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사당을 배알하며 성묘를 지극히 하였다. 선대의 문헌이 전쟁을 겪어 유실되었는데, 『여람(輿覽)』과 여러 가문의 이름난 현인들의 문집을 널리 징험하고 참고하여 덕 있는 가문에 나아가 질정하였다. 누이에게 자식이 한 명 있었는데 일찍이 고아가 되어 가르치고 기르는 것을 자식들과 다르게 하지 않았으며, 친족이나 마을에 사는 고아 중에 가난하여 상례(喪禮)와 혼례(婚禮)를 행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으면 반드시 구제하였다.
1862년(철종 13)에는 삼정(三政)의 폐단을 올렸다. 「삼정책(三政策)」에서는 삼정의 문란을 바로잡기 위해 6가지 대 변동책을 제시하였는데, 군전적(軍田糴) 중에서 전정에서는 토지측량방법을 바꾸고 양전(量田)을 다시 실시해야 한다고 하였다. 환정에 대해서는 환곡을 폐지하여 사창(社倉)을 세우고, 결환(結還)과 호환(戶還)도 전세(田稅)와 호포(戶布)의 형태로 전환하자고 주장하였다. 이와 같은 주장은 토지제도를 바꾸고, 호포제를 실시하고, 사창을 실시하자고 함으로서 노사학파 내에서도 근본적인 개혁을 주장한 인물에 속한다. 백석헌(柏石軒) 기양연(奇陽衍, 1827~1895)과 두터운 정의가 있었는데 변함없는 마음으로 기약하니 두 공 모두 당대 사우들에게 명망이 두터웠다. 사는 곳은 누추하고 의복이 넉넉하지 않았지만, 편안히 지내니 많은 선비가 스승으로 삼아 가르침을 청하였는데 재사(齋舍)에 수용하지 못할 정도로 모여들었다. 당시 현에 향교가 오래되어 서책이 없음을 한탄하며 계(契)를 만들어 책을 모으니 수천 권에 달하였다. 공부하러 오는 학생들에게 반드시 『소학』을 먼저 읽게 하였는데 안중섭이 말하기를, "소학이란 책은 성인의 근본에 대해 지은 것이다. 모든 배우는 자들이 이 책을 버리고 위인(爲人)을 구하는 것은 행동과 목적이 서로 어긋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시문(時文)의 폐단을 말하면서 "문장을 지을 때는 자신의 의사를 타인에게 전달하는 데 있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논어』와 『맹자』, 『상서』 등을 읽는 것을 좋아하였는데, 매번 바람 시원하고 달 밝고 빈산에 눈이 내려 밝은 밤엔 문득 기뻐하며 단정히 앉아 낭랑하게 책을 외우고는 하였다. 1880년(고종 17)에 증광시 진사로 합격하였으나 연동리에 용강정사(龍岡精舍)를 지어 죽을 때까지 유유자적하며 학문을 닦는 곳으로 삼았다. 평소에 풍습(風濕)이 있었는데 1883년 여름에 점점 심해지더니 성휴명공(成休命恭) 4글자를 손수 써서 아들에게 보여주었고, 동년 6월 1일에 연동리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 72세였다. 8월 25일 고창 수곡면(水谷面)에 안장하였다.
교유한 인물로는 윤자덕(尹滋德), 성대영(成大永), 성재삼(成載三), 성이호(成貳鎬), 박영보(朴永輔), 조석(曺錫), 박승학(朴承學), 이호익(李鎬翼), 이조연(李祖淵), 서신보(徐臣輔), 기량연(奇亮衍), 이건창(李建昌) 등이 있으며, 기양연(奇陽衍), 기량연(奇亮衍), 기승규(奇升奎), 기우만(奇宇萬)기정진의 문인으로서 관직에 나아가거나 과거에 급제한 인물들이 많았다. 문하생으로는 금서(錦西) 유준철(柳浚喆, 1857∼1918), 흥남(興南) 임노태(林魯泰, ?~?) 등이 있다.


2. 『연상집(蓮上集)』 구성과 내용
『연상집(蓮上集)』은 안중섭(安重燮, 1812~1883)의 시문집으로 1905년에 6권 2책의 목활자본으로 간행되었다. 1905년 기우만(奇宇萬)이 작성한 서문과 유준철(柳浚喆)이 작성한 발문이 수록되어 있다.
권1은 「알성부(謁聖賦)」와 「납매(臘梅)」 등 시(詩) 140여 수와 권2는 서(書) 55편, 권3은 잡저(雜著) 9편, 권4는 서(序) 14편, 기(記) 10편, 발(跋) 4편, 권5는 상량문(上樑文) 9편, 제문 7편, 축문(祝文) 6편, 행장 4편, 권6은 삼정책과 부록으로 되어 있다.
서문은 기우만(奇宇萬)이 지었다. 서문에서 같은 노사의 문인으로서 삼정책을 주장한 안중섭을 노나라 애공(哀公)에게 철법(澈法)의 시행을 주장한 유약(有若)에 비유하여 경세의 재주와 문장을 갖추고 있는 인물로 묘사하였다.
권1은 시를 수록하였는데, 대표적인 시로 석탄정(石灘亭)의 12경과 변산(邊山)의 6경을 노래한 것을 들 수 있다. 성균관의 공자를 배알하는 장면을 묘사한 「알성부(謁聖賦)」와 「납매(臘梅)」 등 시(詩) 140여 수가 수록되어 있으며 시는 5언이나 7언으로 된 절구, 율시, 장편 등으로 되어 있다. 주변의 풍경이나 생활 모습, 교유하는 인물들과 화답하는 시, 죽은 사람을 애도한 만사(詞)가 많다. 「만선(晩蟬)」, 「호창(糊窓)」 등 소재와 형태가 다양한 서정시가 많이 수록되어 있다.
권2는 서간문인데, 기정진(奇正鎭)에게 예(禮)와 학문에 대하여 질의한 「상노사기선생서(上蘆沙奇先生書)」 3편과, 중앙 정계나 생원, 진사 등과 왕래한 편지가 많다. 윤자덕(尹滋德), 성대영(成大永), 성재삼(成載三), 성이호(成貳鎬), 박영보(朴永輔), 조석(曺錫), 박승학(朴承學), 이호익(李鎬翼), 이조연(李祖淵), 서신보(徐臣輔), 기량연(奇亮衍), 이건창(李建昌) 등은 중앙 정계의 인물이며, 기양연(奇陽衍), 기량연(奇亮衍), 기승규(奇升奎), 기우만(奇宇萬)기정진의 문인으로서 관직에 나아가거나 과거에 급제한 인물들과 주고받은 편지가 수록되어 있다. 촌락의 방위를 위하여 무기의 비치가 필요하다는 내용의 유경선(柳景善)에게 보낸 「여유가휘(與柳可輝)」 등이 있다.
권3은 잡저(雜著)이다. 초당(草堂), 정자의 내력, 족보 수정, 서원 중수, 의병 모집, 대명(大明)의 문명이 우리나라에서 빛난다는 글 등이 수록되어 있다. 정자(亭子)를 중건한 사실을 기록한 「오괴정중창사실(五槐亭重剏事實)」, 설산(雪山)을 유람한 기록인 「유설산록(遊雪山錄)」, 족보를 수정하기 위한 통문인 「답보성수보소통문(答寶城修譜所通文)」, 「용암서원중수통문(龍巖書院重修通文)」, 대명의 문명이 다시 우리나라에서 빛이 날 것이라는 기울어가는 국운을 암시적으로 묘사한 「반조신필(返照信筆)」 등이 있다. 그중에서도 스승을 높이고 도를 보위하고자 윤황(尹煌), 윤선거(尹宣擧), 윤증(尹拯)을 모신 용암서원의 중수를 위한 통문을 작성하였는데 그가 소론 가문 출신임을 알 수 있다. 외세배격을 호소한 격문을 접하고 호응을 다짐한 「답전주모의소문(答全州募義所文)」, 고창지역의 향토사 연구에 참고자료가 되는 「서모양현향약안(敍牟陽縣鄕約案)」, 「모양현학기(牟陽縣學記)」, 「발향적(跋鄕籍)」 등이 있다. 교서(敎書)에 응하여 당시 각종 제도와 민생의 실상을 기록하여 올린 장편의 「삼정책(三政策)」 이 있다.
권4는 서(序), 기(記), 발(跋)이다. 서문 중에 「공중누각서(空中樓閣序)」는 왕발(王勃)의 「등왕각서(滕王閣序)」를 모방해서 지은 작품이다. 고을 향교의 명륜당·양사재·사마재·향음례 등과 관련한 서문, 김기두(金箕斗)·유동석(柳東錫)·박효일(朴孝一) 등 인물에 관한 행적이나 처소에 관한 서문이 수록되어 있다. 기(記)는 향교의 명륜당이나 사마재·양사재·향사당 등 고창의 향교나 백석헌(栢石軒) 기양연(奇陽衍)에 대한 글과 팔곡정(八曲亭)·만한당(晩閒堂)·동오정(東塢亭) 등에 대한 기문이 있다. 발(跋)은 계나 족보, 책에 대한 글이다. 「사마재설계서(司馬齋設稧序)」에는 '향교의 재생들이 입직하는 장소를 교재(校齋), 제생(諸生)이 공부를 하는 곳을 양사재(養士齋), 태학사(太學士)가 공부를 하던 곳을 사마재(司馬齋)라고 하였다. 사마사(司馬士)도 처음에는 양사사(養士士) 였는데 어찌 구분하여 별도로 동쪽을 사마재라 하고 서쪽을 양사재라고 하는지 모르겠다'고 하며, '오늘 양사사가 학문을 하는데 힘쓰면 후일 사마사가 될 수 있다'고 격려하고 있다. 「기학사양연백석헌기(奇學士陽衍栢石軒記)」에는 기학사(奇學士) 양연이 송암(松巖) 기정익(奇挻翼)의 후손이며 백암(柏巖)의 방계 자손으로 송암과 백암 선생의 덕업과 문장을 이루려고 하였다고 서술하였다.
권5는 상량문, 제문, 축문, 행장 등으로 되어 있다. 상량문 9편은 고창향교나 사마재(司馬齋), 고창 주변의 유서 깊은 곳에 지어진 은사재(隱士齋), 취석정(醉石亭), 동강정(東岡亭), 망북정(望北亭), 용강서루(龍岡書樓) 등에 관한 것이다. 제문 7편은 스승인 기정진을 비롯하여, 종제(從弟) 안기섭(安基變), 유기발(柳基發), 박승현(朴升鉉), 유지능(柳志能), 유항식(柳恒植), 이현정(李顯正)안중섭과 친분이 있었던 고창의 인물을 추모한 글이다. 축문은 사직단과 방장산(方丈山)에서 기우제(祈雨祭)를 지낸 글, 흥덕(興德)의 옥제사(玉提祠)에 왜란 때 의병장 고덕붕(高德艦)윤선거의 문인인 고여흥(高汝興)을 배향한 축문, 질병을 쫓는 축문 등이 있다. 행장은 안중섭의 8대조인 안지(安祉)양팽손(梁彭孫)성혼(成渾)의 문인으로서 벼슬에 나가지 않고 왜란 전후에 수신에 힘썼던 일을 기록하였고, 아버지 안주욱(安周郁, 1786-1837), 어머니 선산 김씨(善山金氏) 광현(光顯)의 딸, 그리고 통덕랑 유지능(柳志能)의 행적을 기술한 행장이 수록되어 있다.
권6은 「삼정책(三政策)」과 부록으로 되어 있다. 「삼정책(三政策)」에서는 안중섭이 삼정의 문란을 바로잡기 위해 6가지 대 변동책을 제시하였다. 군전적(軍田糴) 중에서 전정에서는 토지측량방법을 바꾸고 양전(量田)을 다시 시행해야 한다고 하였다. 특히 조선 후기 실학자인 유형원의 주장과 유사하게 현재의 결부(結負) 대신 경무(頃畝)로 바꾸어서 어린도(魚鱗圖)나 추배법(推排法) 같은 중국의 제도를 따르고, 정법(井法)을 참조하자고 주장하였다. 군정에 대해서는 속오(束伍)와 수성군(守城軍) 외에는 편적(編籍)하지 않으며, 경영납(京營納) 외에는 잡색군 명목을 일체 혁파하자고 하였다. 군적수포제 대신 호포제로 전환하고자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안중섭의 주장대로 하면 기본적으로 지방을 지키는 군대만 남고 번상병제(番上兵制)가 없어지며, 각 호에서는 군포만 납부하게 되어 자연히 호포제로 전환되기 때문이다. 환정에 대해서는 환곡을 폐지하여 사창(社倉)을 세우고, 결환(結還)과 호환(戶還)도 전세(田稅)와 호포(戶布)의 형태로 전환하자고 주장하였다. 그는 이단하(李端夏)가 사창을 운영한 사실을 예로 들어 향촌 자치적으로 운영하자고 주장하였으며, 환곡의 재원은 국가재정으로 전환하자고 주장하였다. 이처럼 토지제도를 바꾸고, 호포제를 실시하고, 사창을 실시하자고 함으로서 노사학파 내에서도 근본적인 개혁을 주장한 인물에 속하는 것이다.
부록은 안중섭에 대한 1904년 유지진(柳志晉) 등 문인 10명의 고묘문(告廟文), 손자 안석렬(安錫烈)의 가장(家狀), 1893년에 지은 윤상갑(尹相甲)의 행장, 문인 정규삼(鄭奎三)유준철(柳準喆)의 후서(後序)와 발문(跋文)으로 되어 있는데, 후서(後序)와 발문(跋文)에서는 안중섭의 학행과 문집을 편찬한 손자 안석렬(安錫烈)의 관련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

3. 세부목차
卷一
賦 : 謁聖賦,
詩 : 臘梅, 次牟陽東閣鄭霞谷(雲龍)板上韻, 次碧蓮社壁上韻, 次奇參奉(亮衍)一鑑亭, 早秋登高, 次石灘亭十二景韻(十二首), 效河西先生丁未三月小學韻, 千秋節喜雨, 效先祖參辦公客行詩體兼韻, 辛卯冬約柳東岡(志能)讀書龍岡, 次河南淸音亭原韻, 題完山寒碧堂, 龍岡春帖, 春日述懷, 看書, 續題鄭雪山(在燦草堂), 續題金破愁翁三愁帖, 求藥, 丙子立春日有感題龍岡東壁, 丁丑春見打租, 野話, 夕烟, 石礀浮花, 春帖, 次斥邪疏㕔韻, 與柳侯(敦秀)遊白羊寺, 糊窓, 續申何醒, 新鴈, 晩蟬, 遊蜓, 遊內藏寺, 龍岡精舍擬紫陽夫子白鹿洞佳句, 隱士洞花樹軒原韻, 泮宮鄕飮禮示諸君子, 謹續參判公筽城舘題詠, 辛未除石, 壬申回甲, 鷘南草堂原韻, 坐寂寄懷(二首), 次鄭侍郞(誠一)東岡亭原韻, 養士齋落成, 養士齋文會所(二首), 謝李放叟(遇德)夜過(二首), 新年與李放叟李老霞(遇仁)鄭草川(鍾台)柳春江(景普), 安蘭坡(錫秘)作龍岡會, 次郭五悔(孝根)詩集韻(二首), 敬次松島羅公(海崙)遺蹟原韻, 步寒山寺壁上韻, 次洪上舍(直瑞)晬宴韻, 硯滴, 遊蓬菜山, 和洛下曺斯文(明承), 次李侠(圭常), 題月浪臺, 詠秃柳, 漢陽除夕, 次李上舍(潤德)特庵原韻, 次李參判(潤壽)新齋韻, 龍岡別章, 除夕用杜少陵臘日韻, 和淸州朴明川(弘陽)見訪, 與曺東塢(毅坤)姜鳳巖(馨秀)夜吟, 次贈康松五世帖原韻, 和水橋李(遇春)雪梅, 次石灘亭板上韵, 丙子至月柳侠以板上韻見寄聯以和之, 聞柳孝子(民植)孫婦李氏下從竦惻用三綱錄詩, 與柳桐庵(志驥)題寒山, 次柳桐庵除夕, 次儒洞鄭氏道峯祠原韻, 蕉田趙公(然明)以西林亭板上韵見寄聯以和之, 西行夜宿錦江, 華城對雨, 洛中次扶風李石湖(大榮)白靑田(鶴來)東郊晩眺, 戱續樵庵老人洗兒詩, 寒山甲膾戱拈同字, 鄭草川來仍作蓮社小會, 續題利川徐氏孝行錄, 蓬山郊行, 次扶風使君鄭(晉默)邊山六韵, 和鄭方菴(仁聲)晬筵韻, 禮智齋示諸益, 赴南省畱齋洞贈朴兵使(長夏)安上舍(景喆二首), 次李友(重九)澄心亭韵, 題泉石洞琴書齋, 次經香韓學士(章錫)東陵行中, 次騎省直中, 贈別韓楊根(用異), 和放叟未開花韵, 春帖, 敬次灜洲裴氏孝肅忠肅二公延謚韵, 次東塢亭原韻, 謹次雙溪樓板上韻, 次金上舍愚拙(慶奎)圜扉韻(三首), 樂山韻贈道谷金(明彦), 贈別姜悟叟(福)東歸商山, 上元夜吟. 贈別金友(基榮), 李水橋高仁峯(濟琳)遊寒山要余以書失會而追謝, 瑞陽與蘭坡步黃岡, 贈李水橋寓警, 次韓(在敎)愚齋原韵, 次柳月溪(潑)考槃亭原韵, 謹次安陵搜勝臺原韻, 畱別小蕉鄭(憲奎)章溪金(箕斗), 續李鴈浦(章煥)詩軸, 病中書懷, 贈別金君(瑨中)歸鰲城, 立春柳春江來強和之, 過月波亭憶主人柳友(正奎)恨吟一韵, 東樓對雪, 濟州宗人違三與柳春江同來暢和, 仁川拈韵, 和詩社諸君, 聯李進士(觀述)李進士(謙述)金進士(慶奎)白進士(鶴來)八扶風仍得雨後韻, 壬午至日鄕貢抵完和靑田白進士, 敬次李巡相(敦相)晬辰韵見寄, 誄星塢先生李上舍(可白二首), 誄蘆沙奇先生(二首), 哭柳石庵(基發), 哭鄭丈(希奎), 挽庾丈(昇烈), 挽金上舍(養大), 挽金上舍(慶奎), 挽李上舍(鳳夔), 挽高斯文(濟萬) 挽李友(赫求), 挽李友(社榮), 挽旡憫翁金(在林), 挽金友(相弘), 挽庚上舍(聖烈), 挽丁參知(載龍), 挽鄭小蕉(憲奎二絶), 挽奇上舍(益鎮), 挽李友(景儀), 挽吳梅士(鎭微), 挽鄭荗南(晩奎), 挽鄭雪山, 挽金護軍(命休), 挽奇護軍(允鎭), 挽李丈(赫), 挽朴友(宗洽), 挽柳上舍(星煥), 挽李參奉(鳳賢), 挽柳丈(志濂), 哭族兄(宇濟), 挽朴棗庵(載樞), 挽姜友(圭煥), 哭柳東岡(志能二首), 挽徐晩悔(守瀚二首), 哭柳沙川(大植), 哭鄭環溪(謹一), 哭族叔(極), 挽金丈(慶澤). 挽金竹林(國鳳二首), 悼次孫痘化仍用醒字寫懷
卷二
書 : 上蘆沙奇先生書(八), 與尹參奉(相甲)江陵匪中(與一答一), 上尹尙書(滋悳)書(與一答一), 與成茂長(大永與一答一), 答鄭致三(鍾台與一答一), 與奇校理(陽衍與三答一), 上朴尙書(求輔)書, 與成參判(載玉), 與成參判(彛鎬), 慰奇參奉(宇萬與二), 與朴都事(承學), 與金夢汝(以洙二), 答曺尙書(錫輿)書, 答李直閣(鎬異), 與李募義使(祖淵與一答一), 與徐參判(臣輔), 與奇沃溝(亮衍與一答一), 與鄭兌一(鍾澤與一答一), 與朴法聖(元陽), 與柳可輝(景善), 與鄭希淸(可源與一答一), 與鄭扶安(晉默), 與曺士弘(毅坤二), 答金致謙(壽一), 與柳允之(志榮與一答一), 與奇參奉(升奎), 答朴漢瑞(宗洽), 與鴻山族姪根, 答姜蒔鄕(福與一答一), 答柳儀賢(恒植), 與族孫錫禹, 答李英三(錫九與一答一), 與李翼汝(肯洙), 與金元一(在俊), 與李參判(建昌), 答朴儀七(載樞與一答一), 答康化允(基泰), 答柳德鄕(成植), 答柳悅鄕(志普二)

卷三
雜著 : 鷘南草堂事實, 五槐亭重剏事實, 望北亭事實, 遊雪山錄, 陳情表, 答全州募義所文, 龍巖書院重修通文, 答寶城修譜所通文, 書柳義士事蹟後, 返照信筆

卷四
序 : 空中樓閣序, 退川小序, 司馬齋設稧序, 鄕飮禮小敘, 牟陽縣校重修靑襟案總敘, 續贈崔浪谷小序, 敘金(箕斗)爲親稧帖, 與柳君(東錫)往復錄小敘, 松沙全處士孝行蹟敘, 龍岡樵庵小敘, 書朴顧庵(孝一)淸溪齋, 敘牟陽鄕約案, 敘養士齋稧案, 講會契重修敘, 記, 高敞縣校明倫堂重修小記, 十代祖考承訓郞府君墓碑陰記, 龍岡精舍記(附十層圖), 牟陽縣學記, 高敞縣鄕射堂重修廳壁記, 奇學士(陽衍)栢石軒記, 八曲亭記, 晩閒堂記, 東塢亭小記, 竹庵記, 跋, 觀善跋, 跋鄕籍, 遊龍門錄跋, 題九本說後

卷五
上梁文 : 牟陽縣文廟重修上梁文, 鷘南草堂上上梁文, 隱士齋上梁文, 醉石亭上梁文, 普龍山亭上梁文, 東岡亭上梁文, 望北亭上梁文, 龍岡書樓上梁文, 牟陽縣司馬齋上梁文, 祭文, 祭從弟基變文, 祭蘆沙奇先生文, 祭柳丈(基發)文, 祭朴友(升鉉)文, 祭柳友(志能)文, 祭柳友(恒植)文, 祭李侯(顯正)文, 祝文, 社稷壇祈雨文, 方丈山祈雨文, 鷘嶺山祈雨文, 九王峯祈雨文, 興德玉題祠祝文, 別慰祭祝文, 行狀, 八世祖隱士公行狀, 先考府若家狀, 先妣孺人善山金氏家狀, 通德郞柳公(志能)行狀

卷六
策 : 三政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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蓮上集序
卷之一
卷之二
卷之三
卷之四
卷之五
卷之六
蓮上集附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