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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암만록(德巖漫錄)

기본정보
· 유형분류 고서-집부-별집류
· 내용분류 교육/문화-문학/저술-문집
· 작성주체 편저자 : 나도규(羅燾圭)
· 간사년 (1975)
· 간사지
· 형태사항 26.1 x 18.5
· 소장처 현소장처 : 국립중앙도서관 / 원소장처 : 미상
정의

1975년에 간행한 조선 말기의 학자 나도규(羅燾圭, 1826~1885)의 시(詩)·서(書)·설(說)·문(文) 등을 수록한 시문집.

해제
『덕암만록(德巖漫錄)』 해제

1. 생애
『덕암만록(德巖漫錄)』 은 나도규(羅燾圭, 1826~1885)의 시(詩)·서(書)·설(說)·문(文) 등을 수록한 시문집(詩文集)이다. 8권 2책의 석인본(石印本)으로 1831년 간행되었다. 나도규의 자는 치문(致文), 호는 덕암(德岩), 본관은 나주(羅州)이다. 나주 나씨(羅州羅氏) 송도(松島) 나해륜(羅海崙, 1583~1659)의 9대손으로, 수약재(守約齋) 나필은(羅弼殷)의 증손이며, 조부는 나석증(羅錫曾)이다. 아버지 나희집(羅禧集), 어머니는 전주이씨(全州李氏)로 이현임(李鉉臨)의 딸이다.
1826년(순조26)에 당시 나주 계촌면(桂村面) 내동리(內洞里)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봉황산(鳳凰山) 아래에 위치한 이곳은 나중에 광산군(光山郡) 대촌(大村)으로 지명이 바뀌었는데, 현재 광주광역시 남구 석정동에 속한다.
3세 때 처음으로 부친으로부터 글을 익히기 시작하였으며, 5세 때는 숙조(叔祖)인 나석면(羅錫冕)에게 나아가 가학(家學)과 경학(經學)을 전수받았다. 1841년(헌종7) 16세 때에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슬픔을 다하여 상례를 치루었고, 18세에는 광주 하남의 노론가문인 순천 박씨 박치도(朴治道)의 후손 영(瑛)의 딸과 혼인하였다.
19세기 중·후반 격동의 시기에 향촌사회의 교화와 교육, 문필활동을 병행하며 치열한 삶을 살아간 나도규는 어려서 가학을 통해 학문을 익혔다. 젊어서는 큰 스승의 문하에서 학문할 기회를 갖지 못하였고, 인근지역에 사는 박정휴(朴鼎休, 1805~1865)와 박이휴(朴頤休, 1806~?) 등 선배 학자들과 질정하고 토론하며 자신의 학문적 견해와 입지를 넓혀가고 끊임없는 저술활동을 통해 문학적 재능을 발휘하였다. 만년에는 호남 사림의 대표적인 성리학자인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1798~1879)의 문하에 들어가 경전과 제자(諸子)의 글을 널리 배웠으며, 태극과 음양의 이치를 깊이 논하였는데, 항상 태극도와 심성도를 좌우에 걸어 놓고 음양 조화의 원천을 분석하였다. 나도규는 당시 5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기 몇 달전인 기정진의 문하에 들어가 스승에게 '성(誠)'자를 좌우명으로 받았으나 기정진의 독창적인 학풍을 내면화하기에는 너무나도 짧은 기간이었다.
나도규는 여행을 통한 유람을 즐겼는데, 35세에는 2~3개월에 걸쳐 과거시험을 치르기 위해 서울을 다녀온 여행기가 있고, 40대에 두 차례나 무등산을 유람하고 기록한 2편의 여행기가 있으며, 광주목사와 함께 증심사를 유람한 여행기가 전한다.
나도규는 문학적 성취를 바탕으로 오랜 시간 과거공부와 성리학을 병행하였다. 만년에, 1880년 4월 세자의 두증(痘症)이 회복되어 실시된 경과(慶科) 증광시의 초시인 곡성향시(谷城鄕試)에서 「문장책(文章策)」으로 장원하였고, 이어 광주시(光州試)와 전주시(全州試)에서도 장원하였으나 결국 서울에서 모여 보는 정시(庭試) 과거시험에는 실패하여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는 나중에 관직을 포기하고 성리학과 태극 및 음양의 이치에 대해서 연구하면서 후학 양성에 힘썼다. 한번은 어떤 재상이 나도규에 대해서 듣고 안타깝게 여기면서, "과거시험 보기 전에 미리 알았더라면 낙방하지 않았을 텐데."라고 말하자, 나도규는 이 말에 정색을 하며 "과거 시험을 보기도 전에 찾아가 뵙는 것은 진정한 선비의 도리가 아닙니다."라고 했다고 한다.
그가 남긴 저서 『덕암만록(德巖漫錄)』 은 손자인 종우(鍾宇)가 덕암의 유고들을 정리한 것이다. 행장은 후학인 고광선(高光善)1909년에, 서는 고광선고광익(高光益)1921년1922년에 각각 찬술했다. 고광선은 그 서문에 세상에 드문 재주를 가지고 태어나 그 재능을 펴보지도 못한 스승의 불우함을 안타까워하며, "선생은 곤궁함을 참고 자신을 규율하는 공부를 하였으며 글을 널리 배우고 예법으로 요약하는 학업을 일삼으니. 세상에 쓰인다면 비단옷에 옥관자를 쓴 당상관(堂上官)이 되어 국가를 흥성하게 만들었을 것이요, 물러나 수양한다면 이 세상에 귀감이 되고 후세에 모범이 되었을 것인데, 재능을 발휘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라고 찬술하였다. 또한 행장(行狀)에서도 덕암 나도규의 재품(才品)이 어릴 적부터 비범하여 그의 문예가 뛰어날 뿐만 아니라 과업, 이학이나 예학, 의리 등에 있어서도 거의 모른 바가 없을 정도로 정통하였다고 하였다. 또한 화순에서 출생하여 나중에 의병장을 지내기도 한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나도규에 대해 "그의 재주는 세상에 쓰일 만하고 그의 문장은 나라를 빛낼 만하다"라고 평가한 바 있다.
나도규는 문명(文名)으로 손색없는 저술을 남겼는데 그의 문학적 성취를 살펴보면, 1846년(헌종11) 26세 되던 해에 「덕암설(德巖說)」을 지어 덕암(德巖)이라 자호하고 교사로서의 생활을 시작했는데, 그는 봉황산(鳳凰山) 덕암(德巖)아래 살았으므로 호를 덕암이라 했다. 그리고 이렇게 자신의 삶을 회포하기를, "기거를 만족해하며 청빈을 즐기니, 가슴 속 꿰뚫어 먼지 씻은 거울 같네. 궁달은 본래부터 하늘이 정하는 것, 정숙하고 본분 행해 남 탓하지 말기를."라고 하였다. 이때부터 문명(文名)이 향중(鄕中)에 알려져 문하생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특히 「학규서(學規序)」를 지어 경서와 역사서를 체계적으로 교육하였고, 효우(孝友)와 성경(誠敬)에 기초한 인간 교육에 중점을 두었다. 1851년(철종2)에는 「항검자설(恒儉字說)」, 1852년(철종3)에는 「촌자설(村字說)」, 1853년(철종4)에는 「심학도설(心學圖說)」을 지었다. 특히 스승인 기정진과 태극음양(太極陰陽)의 이치를 논하는 과정에서 칭찬을 들었고 향도천(鄕道薦)에 오르기도 하였다. 1879년(고종16) 12월에 스승 기정진의 상을 당하여 통유문(通諭文)과 집상제문(執喪諸文)을 몸소 주관하였으며 「성기잠(誠幾箴)」을 지었다. 1881년 56세 때, 문인들이 강학소인 남덕정(覽德亭)을 창건하고 나도규가 기문을 기었다.
나도규의 문학적 재능은 문의(文義)를 해석하는 속문에 있어서도 흐르는 물처럼 조금도 막힌 바가 없었고, 시문(詩文)을 지은 속도에 있어서도 거의 난통한 문자를 외는 것처럼 조금도 정체함이 없다고 한다. 그는 일찍 어느 사우와 함께 금성에 있으면서 불사의 중수(重修)를 마친 한 스님의 부탁에 의해 이 절의 상량문을 짓게 되었다. 이때 스님을 맞이해 그 즉석에서 이 글을 지었음에도 한자의 오차 없는 완벽한 문장을 이루었다고 하며, 여러 높은 석덕(碩德)들의 추천에 의해 노사선생의 장예문제를 의논하기 위한 통론장문(通論狀文)을 지으면서도 입으로 외운 듯이 즉석에서 마치었다고 전하고 있다.
나도규는 탁월한 문학적 성취를 바탕으로 일생을 과거와 성리학을 병행하다가 1885년(고종22) 3월 고내상(古內廂) 도산촌(道山村)에서 60세로 세상을 떠났다. 같은 해 9월 복룡산(伏龍山)에 장사지냈다가 1890년(고종 27) 석정(石亭) 옛집 근처로 이장(移葬)하였다.


2. 구성과 내용
『덕암만록(德巖漫錄)』은 8권 2책의 석인본으로, 아들 정균(楨均), 손자 종우(鍾宇) 등이 편집, 간행하였다. 권두에 고광익(高光益)·고광선(高光善)의 서문과 권말에 홍석희(洪錫熹)의 발문이 있다. 행장은 고광선 1909년에 찬하였다. 전주대학교 도서관과 변시연가(邊時淵家) 선암문고(仙巖文庫)에 소장되어 있다.
권1·2에는 시(詩) 300여수가 수록되어 있고, 권3·4에는 인근지역의 박정휴(朴鼎休)를 비롯 임기서(林琦瑞), 박이휴(朴頤休) 등의 선배 학자들과 질정하고 토론하며 자신의 학문적 견해와 입지기반을 다지며 주고받은 서(書)가 91편이 수록되어 있다. 권5에 설(說) 10편, 문 10편, 서(序) 31편, 해(解) 1편, 계(誡) 8편, 잠(箴) 1편, 사(辭) 1편, 명(銘) 5편, 비음지(碑陰識) 1편, 서명후(書銘後) 9편, 권6에 유사(遺事) 3편, 제문(祭文) 10편, 혼서(婚書) 5편, 기(記) 34편, 권7에 발(跋) 1편, 서(敍) 1편, 지(誌) 1편, 전(傳) 1편, 소(疏) 2편, 사의(私議) 1편, 축(祝) 1편, 유산록(遊山錄) 3편, 책(策) 2편, 표(表) 2편, 서의(書義) 1편, 권8은 부록으로 행장(行狀)·명(銘)·기·시·제문·뇌(誄)·발 각 1편 등 상당한 분량의 글이 수록되어 있다.
권1~2에 수록된 시편이 적지 않은 만큼 내용도 다양하여 정송강, 기노사, 최면암, 기송사 같은 인물을 다룬 시가 있는가 하면 사물과 사건, 풍정과 서경, 감회 등이 보인다. 광주의 대표적 지식인으로 그가 남긴 시문은 특히 지역과 밀접한 내용과 자연을 노래한 글들이 많다. 또한 시문은 형식적인 각 시체별로 분류하였다. 그 구체적인 편수를 보면 다음과 같다. 오언절구는 2수, 오언율시는 4수, 오언장편은 2수, 칠언절구는 43수, 칠언율시는 172수, 배율은 1수, 장편은 5수 등이다. 이러한 형식을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칠언율시가 가장 많음을 알 수 있다.
시문의 내용을 보면, 영물시, 유람시, 관물시 등 다양한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시제를 통하여 나도규가 평소 존경한 인물이 누구였는지를 알 수 있는데, 대체로 인물들의 면면을 살피면 송강(松江) 정철(鄭澈),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눌재(訥齋) 박상(朴詳),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 등으로 나타난다. 이들은 모두 시기적으로 나도규와 멀리 떨어진 인물들로 시문을 통하여 존경하는 마음을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또한 나도규는 성리학인 시문을 남기기도 하였는데, 「독주역(讀周易)」이나 「관물(觀物)」 등의 시가 이에 해당한다. 한편, 주변의 승경을 유람하고서 「무등산(無等山)」, 「등봉황산(登鳳凰山)」, 「설야과백양산(雪夜過白羊山)」 등의 시문을 남기기도 하였다. 이 중 「무등산」은 광주의 진산 무등산을 유람하고서 지은 시문으로 권7에 있는 유산록인 「서석록(瑞石錄)」ㆍ「서석속록(瑞石續錄)」 등과 견주어서 볼 수 있는 작품이다. 「등봉황산」은 나도규의 주변에 있던 봉황산에 올라 주위의 풍경을 그린 작품이다.
권5에 수록된 전(傳)의 「죽부인전(竹夫人傳)」은 대나무를 의인화한 가전체 작품으로, 대나무의 근원과 별칭, 대나무가 의를 행하는 상징물로 부각되게 된 연원을 밝혔다. 고려시대 이곡(李穀)의 「죽부인전」과 비슷한 체계를 가지고 있다. 죽순이 돋아나면서부터 매우 정절이 있어서 푸른색의 겉옷은 사시사철 같은 색이었으므로 서리와 눈보라도 지조를 변하게 할 수가 없었고 바람과 우레도 절개를 굽힐 수가 없었다. 또 그 죽순이 죽(竹)으로 성장한 뒤 공인(工人)을 중매꾼으로 삼아 군자를 모셨다는 등의 내용으로 전개된다.
권7에 수록된 책문(策文) 「삼정책(三政策)」은 나도규가 민감한 현실정치의 문제를 도외시하지 않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신의 주장을 진달하였음을 알 수 있는 저술로, 당시 국가의 전부(田賦)·군적(軍籍)·환곡(還穀)의 삼정이 문란해 정치가 어지러워진 데 대한 근본 대책을 밝힌 것이며, 출신지를 구별하지 말고 어진 이를 등용할 것과 지방관의 임기를 연장할 것을 주장하였다. 병인양요에 상주(喪主)의 몸으로 적극 나설 수 없었으나 창의를 도모하던 지인들을 격려하고 위정척사의 방안을 전달한 것이 이를 입증한다. 또한 「문장책(文章策)」은 1880년 4월 세자의 두증(痘症)이 회복되어 실시된 경과(慶科) 증광시의 초시인 곡성향시(谷城鄕試)에서 장원한 작품으로, 문장을 이기에 비유해 사장학(詞章學)을 버리고 경전을 독실하게 연구할 것을 강조하였다.
나도규1868년(43세, 고종 5)에 8월에 2박 3일 동안 무등산(서석산)에 올라 등산을 하고 기록으로 남겼는데, 이 글은 권7의 「유산록(遊山錄)」에 수록되어 있다. 이때 동행한 이들은 고제극(高濟克), 고일주(高馹柱), 고긍재(高兢載), 정해기(鄭海琦), 고만주(高萬柱) 등 주로 문인들과 함께 하였다. 그 다녀간 주요 행선지를 보면, 증심사(澄心寺)-학수치(學水峙)-사인봉(舍人峰)-백토현(白土峴)-장불치(長佛峙)-입석대(立石臺)-서석대(瑞石臺)-상봉(上峰)-오공너덜[蜈蚣礫]-삭문(石門)-광석대(廣石臺)-천제단(天祭壇)-백토현(白土峴) 등이다. 내용 중에 고경명(高敬命)의 「유서석록(遊瑞石錄)」이 나오는데, 대체로 그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유산(遊山)의 목적을 단순히 탐승(探勝)하는데 두지 않고, 중간 중간에 자신이 평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을 피력한 점이 특이하다. 8월 3일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신발을 매고 길을 나서 광주읍을 향하여 떠났다. 정오에 발길을 재촉하여 증심사에 이르렀다. 증심사 계곡입구에 흐르는 물이 자갈 깔린 개울을 이루었다. 벼랑과 암반을 도는 여울이 우렛소리를 낸다. 최치원의 시에 '돌무더기 사이를 치달리며 깊은 골짜기를 울리네'라는 구절은 바로 이곳을 위해 준비해둔 시가 아닐까? 나무다리를 밟고 골짜기를 건너면 곧바로 절(증심사)이다. 절은 무성한 숲과 쭉쭉 뻗은 대나무 사이에 있다. 절이 비록 고찰이나 담은 무너지고 벽은 기울어져 모양새가 나오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이때 깊은 인상을 받아 나도규는 2년 후인 1870년 4월에도 1박 2일 동안 가족을 데리고 무등산 산행을 하였는데, "집안 아저씨와 마을 어르신들과 함께 등산 도구를 준비하고 나주에서부터 화순의 남산을 거쳐 갔다. (중략) 4월 4일. 어제 저녁에 비가 조금 내렸으나 날이 밝기 전에 개었다. 서석산을 향하였다. 광치를 거쳐 사동을 지나가는데 철쭉꽃이 일제히 만개하니 온통 자주색과 붉은색 세상이라고 할 만하니 황홀하게 비단에 수놓은 장막 속에서 등산하는 것 같았다. 돌아보건대 행장에 다 구비되니 너무 사치한 것은 아닌가? 팔다리를 편히 하고 숲으로 들어가 크게 외치고 봄을 실컷 만끽하니 진정 별천지 가운데 즐거움이리라."라는 기록이 보인다. 이외 광주목사와 함께 증심사를 유람한 여행기가 전한다.


3. 세부목차
卷一
五言絶句 : 過邜山亭敬次 松江鄭先生韻, 附松江原韻, 留洛二十五日始還鄕留題大寺洞, 食主人徐同知壁, 五言律詩, 製錦樓即事, 和吳仲涵繼洙見寄, 和吳仲涵次晦翁齋居韻見寄, 和東軒韻別柳参奉 名不詳, 五言長篇, 輓宋公在濂, 輓蘆沙奇先生, 七言絶句, 贈林琦瑞錫奎, 呈朴芚皐休氏, 與鄭德夫海祿林琦瑞諸友遊月波臺拈濂洛韻用博一粲, 雪夜偶唫, 詠馬, 暮春登小山, 白紙, 江行, 暮春詠凜, 春日與朴正伯(源龍) 朴昌叟(源永)會山齋歎壺乾, 朴昌叟以詩見遺越二日修書兼以詩謝之, 强齋會話(强齋朴正伯齋號), 待月, 炎療中有懷, 枯櫻葡蔓, 喜晴, 新竹微風, 聽詩歌, 岳陽高友彛中逢討於松湖臨別用贈一律, 雨晴作馬山之行道中浪詠, 春雨, 齋月, 再從弟(燾玄)病瘡忌醫戱贈短律, 看花唫, 育英齋十詠, 地主金侯在獻移拜星州臨別奉呈, 別安禹玄錫奎, 地主金侯以六律示余索和力疾搆掇用拱一粲, 雨後登山觀水寓懷, 觀高元賓光國金剛錄謹步毗蘆日出峯韻, 朴萬柱冠禮, 輓朴勉齋奫柱字大淵, 下第戱吟, 拜蘆沙先生於月松仍歷入仙湖與朴友道允源國仍作閑齋夜話口占短律, 隣友高君明五光信有夜訪之約跫音竟寂仍戱寄短律, 過 迎恩門有感, 和吳仲涵繼洙三難韻, 吳德行駿善用先師奇蘆沙韻示余索和余短於詞有不可塞責亦不當終孤盛意聊供一粲, 鳳咮潭(覽德亭下小築)種一鯉漸大見不能容仍成一律, 詠不遠亭槐柳, 不遠亭睡覺信口成律, 金陵移鼎在甲申獰風適又在是年野人言大明稻受災酷聴之悲憤口占二律, 和呈 地主李侯鼎謨居接韻

卷二
七言律詩 : 贈林琦瑞錫奎, 呈朴芚皐鼎休氏, 芚皐朴丈以道爲題先吟示余依其韻奉和, 與鄭德夫海祿林琦瑞諸友遊月波臺拈濂洛韻用博一粲, 贈鄭德夫, 贈梁子平相衡, 梁子平以詩寄之仍步和, 偶唫, 與朴道允數日講討臨別信口呼韻, 即事, 與朴夏卿朴正伯携酒肴登童子峯, 聞 聖上謁 聖廟諭諸生有感題詠, 送安玄菴志烔氏歸山陽, 臨別拈杜律韻贈朴正伯源龍, 拈杜律韻贈朴聖中, 呈朴素山頣休氏, 呈朴道允源國, 和呈朴月江齋休氏, 和呈朴素山, 贈高元賓光國, 偶唫, 呈鄭校理■氏, 春夜有懷, 過邜山見邜山亭新成有感, 朴正伯源龍朴昌叟源永會廂村有詠以詩奉和, 贈朴昌叟, 黃龍江上有月波臺以勝地得名余未及見仍成一夢遂爲之題用博一粲, 隣燭, 夜詠, 石榴, 四月初八日見錦城燈火敬次 河西金先生觀燈韻, 贈林琦瑞朴夏卿諸君索和, 贈鄭應校鎏氏, 呈朴月江, 與朴月江朴素山安玄庵諸丈約馬訖山詩會有雨戱遂爲之詠, 登馬山, 雨後即事, 敬覽 訥齋朴先生詩拈初鶯韻寄梁子平, 敬次花潭徐先生讀易詩, 偶唫示諸友索和, 柳色樓宴席敬和羅州地主趙侯然明氏, 敬次 河西金先生 大殿春帖韻, 敬次 河西金先生獨樂園韻, 偶唫, 登鳳凰山, 登王子垈, 讀周易, 地主徐侯經淳移拜定州臨別要供一律用替宿懷, 和柳友敬文灝根竹圃原韻, 贈東湖柳友敬化厚根兼示竹圃索和, 東湖竹圃既以詩見和繼以書辱存步贈一律索和, 贈別南石川極照歸漢陽, 謹次永慕齋原韻, 月小樓詩會金侯在獻以四韻要和敬次, 養士齋雅會奉和金侯韻, 地主金侯以六律示余索和力疾搆掇用供一粲, 吳斯文可煥以八隱名其亭要和於余謹步其韻, 和任参奉吉模, 下第還鄕路中口占, 觀黃龍江水漲, 與仙湖諸友觀水而歸拈詩詠懷, 述懷, 即事, 呈地主金侯教性, 附金侯原韻敬步巖溪原韻, 奉別金侯教性, 贈一石金上舍奎升, 謹次碧軒韻, 贈李公三淵台, 丁丑八月以痢疾苦■沉吟中偶成一律, 雨夕與穉陽會於復村之書室口占一律兼示座上諸友索和, 用前韻示諸友, 即事, 拈杜律花字韻用贈高元賓, 觀物, 讀書却被吏索荐遭人譏仍成述事遣懷, 贈高汝行馹柱鄭寶汝海玟, 鄭海淋冠禮, 朴萬柱冠禮, 贈高元賓, 觀瑞石而歸用搆四韻一疊, 敬次雲溪朴寬休氏韻, 科後有病因又見屈寓懷自警, 即事, 丙子除夕, 苦蚊, 丁丑三陽之念從朴花汀道允甫過月坡, 憎蠅, 丙子大旱野皆未移至丁丑春雨事頻仍喜爲之詠, 亢旱歲饑民生阽危又於今日至之時彌月告旱憫爲之詠, 旱而歲饑餓殍相繼惻然述懷, 窮無以爲捿息隣友憫余出四鏹孔方買小屋子屬余仍感而爲詩, 感物寓懷, 矮屋■居遭歲大侵人尠相訪感村, 秀見顧, 閑居即事, 西行路上口占, 留路再疊前韻, 朴花汀訪洪承旨鐘大出東大門外潁湄亭滯雨不還仍述懷步前韻, 贈南参判廷龍, 邂逅權詞伯道壽汝會於洛社臨別贈律, 謹次韓泰議致肇詩會, 次白學士圭洙端午帖, 雨後登月波臺, 夜坐偶唫, 下第還鄕路中口號, 朴花汀訪楚山倅久不還留待藻巖, 留宿古皐大橋醫家, 夏至, 隣居李友以詩見寄聊獲贈答而聾字非一韻然原本用之故因押之窃念古人詩亦如是者有之觀者恕之, 李友病中寄韻仍步和, 偶吟寄隣友索和, 晴後偶詠, 和李友, 方夜唫病隣友携燭來慰仍詠一律, 丁丑除夕, 戌寅立春, 人日, 穀日會友, 新元即事, 詠雪, 雪後即事, 上元, 詠植物, 過仙巖市偶吟, 南侯鎬元守是邦四載還朝以一律拜獻五馬將發之夕聊伸素悃, 徐巽史鎭洙随南侯舍于新香閣四年臨別聊以一律贊供遠贐, 己卯十二月二十四日即庚辰立春立春穣除即俗尙述巳意異於今禱聊同春帖題之壁, 除夕拈立春韻, 覆試見屈浩然還捿時適氷雪路逢李友鎭洙朴友魯泰奇友友爕李友炳秀, 暮春從南侯鎬元遊澄心寺, 謹次止谷韻, 謹次崔勉菴益鉉大人芝軒 恩資韻, 謹次崔勉菴指掌巖韻, 謹次櫟窩韻, 久旱有雨俞侯致喜以詩頌之遂爲之續和, 俞侯以詩示余聊獲奉和, 題覽悳亭步杜律韻, 逍遙覽德亭有感口號, 吳致雲鎭龍遠訪仍有詩聊獲答之, 俞侯遊東門有詩聊獲奉和, 贈李珍山秉益, 贈崔蘭史鉉九 進士, 與宋國仁廷寶過潭陽路上口號次杜律, 過宿完山, 泮村夜會與鄭景一雲五同話拈杜韻, 終日閉牖甚無聊口占六律和贈鄭景一, 雪夜過白羊山, 用吳仲涵五言韻吳德行, 和吳德行, 金海士聲根邊白農相勳有詩仍續和, 題不遠亭, 不遠亭用金海士韻述懷, 張而見錫愚以詩寄余仍和之, 老親晬辰獻壽宴韻, 鄭和順使君基陽大人壽辰韻, 敬次朴松陰丈晬辰韻, 鄭參議鐘鶴回甲於洛中有詩述懷仍步前韻, 次朴友復汝徠休回甲韻, 步李友穉明回甲韻, 敬次俞侯致喜晬辰韻, 敬次宋侯綺老晬辰韻, 輓族人潤采, 輓吳八隱兀煥, 輓柳墩高丈濟鎰 官校理, 輓安公淵壽, 輓朴勉齋奫柱, 勉齋朴君小■隔晨病莫進哭聊以詩替慰奉呈於其大人花汀翁冀置靈几之左, 次張進士錫愚喜宴韻
排律 : 會須散作十分春
詩長篇 : 天子之光如鏡之至明水之至淸, 今皇帝姓名見於圖書漢有再受命之符, 文王之爲世子朝於王季日三, 立雪, 惟薦二臺官爲無愧

卷三
書 : 上朴芚皐丈鼎休氏, 附答, 上族叔明集氏, 上安玄庵志炯氏, 與林琦瑞錫奎, 與李壽瑞聃龍, 上芚陽 姓諱未詳, 上金侯在獻, 上徐侯經淳, 上金侯教性, 附金侯書, 上鄭同福丈允容氏, 與鄭和順基陽, 與鄭雲齋基生, 上金承旨教性, 與金一石奎升, 答朴敬叔源大, 與高伊厚濟尤, 與高汝行馹柱, 答梁季心憲黙, 與柳敬化厚根, 與高汝行, 慰朴監役齊寬, 上朴素山丈頣休氏, 與高元賓光國, 答高純汝, 與高伊厚, 答朴道允源國, 與三從弟炳龍, 與朴老人蘭壽, 答申侯錫游, 上南侯鎬元, 與南参判廷龍, 與徐鎭洙, 與梁聖老教黙, 上安梅陰丈橚, 答安澈煥

卷四
上盧沙奇先生正鎭, 附答, 上閔果軒丈冑顯氏, 與高斗卿濟魯, 與奇會一宇萬, 與曺士洪毅坤, 上朴松陰丈源應氏, 與金監役祿休, 與奇校理陽衍, 與奇孝述宇承, 與奇明叟益鉉, 答族祖鼎煥氏, 與崔参判益鉉, 答朴道謙廷奎, 答吳德行駿善, 上俞侯致喜, 與白校理圭洙, 與吳明老瓘洙, 答朴道安源喆 進士, 與李士亨圭永, 與閔判書泳穆, 與俞杞南鼎煥, 與柳別検觀洙, 與吳仲涵繼洙, 上金重菴平黙氏 監役, 與高元汝光善, 與奇梅谷鼎衍, 答奇國賓東觀, 與金海士聲根 完伯, 與邊白農相勳 正言, 與趙直教性家 監役, 與鄭泰一鐘澤, 與曺元弘仁煥, 答鄭季方義林, 與南廷湜 参判, 與柳君湜是漢, 與金大汝, 上宋侯綺老, 與宋致五鐘雲, 與鄭景一雲五, 與高道元濟東, 答梁子平相衡, 與金倉山綺秀, 與奇會一, 與奇德叟亮衍, 寄家兒, 與再從弟文叔燾煥, 與柳敬化, 與柳敬文灝根, 答尹聖行範琦, 與尹敬緖承儉, 與崔文國相奎, 與梁子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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