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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헌유집(柏石軒遺集)

기본정보
· 유형분류 고서-집부-별집류
· 내용분류 교육/문화-문학/저술-문집
· 작성주체 편저자 : 기양연(奇陽衍)
· 간사년 一九七八年戊午二月十五日印刷 (1978)
· 간사지 大東印刷所:全南長城郡長城邑梅花洞 1061
· 형태사항 크기 : 28 X 18.8 / 石版本 / 책수 : 1 / 반곽 : 14.6 X 20 / 有界 / 11行24字 / 한자 / 內向二葉花紋魚尾
· 소장처 현소장처 : 국립중앙도서관 / 원소장처 : 미상
정의

1978년에 간행한 조선말기의 학자 기양연(奇陽衍, 1827~1895)의 시문집.

해제
『柏石軒遺集』 해제

1. 기양연(奇陽衍)의 생애
기양연(奇陽衍: 1827, 순조 27~1895, 고종 32)의 본관은 행주(幸州), 자는 자민(子敏), 호는 백석(柏石)이다. 집 앞에 큰 잣나무[柏]가 있고, 그 아래 돌이 있어서 백석(柏石)이라고 자호하였다.
그의 가문이 호남지방에 정착하게 된 것은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사사(賜死)된 기준(奇遵)의 형 기원(奇遠)이 사화를 피해 이곳으로 내려 온 이후이다. 그의 가문은 장성 일대에서 줄곧 세거하면서 서인(西人)과 노론(老論)으로 자처하였다. 기양연의 6대조 기정익(奇挺翼)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다. 고조의 휘는 종상(宗相), 증조의 휘는 태온(泰溫)이다. 호남지역에서 유종(儒宗)으로 추앙받는 기정진이 삼종숙(三從叔)이다.
아버지의 휘는 윤진(允鎭)으로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며,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냈다. 어머니는 반남박씨(潘南朴氏)로 생원 박종한(朴宗漢)의 딸이다. 1827년(순조 27)장성 집에서 출생했다. 어려서 기정진(奇正鎭)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867년(고종 4)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전적ㆍ정언ㆍ예조정랑을 지냈다. 이후 1868년 지평, 1869년 장령, 1873년 사복시정(司僕侍正)을 지냈다. 1874년 부친상을 당하여 사직하고 집상하였다. 1878년 다시 장령을 거쳐 부교리ㆍ부수찬을 역임하였다.
1876년 일본에 개항 이후 개화정책에 반대하여 1880년 내수외양책을 건의한 뒤 받아들여지지 않자 장성에 내려와서 농소(膿巢)를 짓고 지방에 은거하였다. 이후로도 여러 차례 조정에서 관직이 내려왔으나 출사하지 않았다. 1894년 동학군을 진압할 때 일본군을 끌어들이는 것을 탄식하였으며, 1895년 봄에 가족들을 거느리고 지리산에 들어갔으나, 얼마 되지 않아 병을 얻어 1895년 5월 20일 69세로 별세하였다.
진사(進士) 고흥유씨(高興柳氏) 동식(東植)의 딸과 결혼하여 아들 우승(宇承), 우춘(宇春)과 양천허씨(陽川許氏) 극(極), 동래정씨(東萊鄭氏) 상현(尙鉉), 전주유씨(全州柳氏) 영구(永龜)에게 시집간 세 딸을 두었다. 사후 80년 뒤인 1975년에 현손인 기준서(奇駿舒) 등이 기양연의 글 가운데에서 약간의 시문과 잡저, 사후 묘도문자 등을 모아 『백석헌유집(柏石軒遺集)』 2권 1책의 석인본을 간행하였다.

2. 『백석헌유집(柏石軒遺集)』 구성과 내용
『백석헌유집(柏石軒遺集)』은 기양연(奇陽衍)의 시문집으로, 1975년 현손(玄孫) 기준서(奇駿舒)에 의해 2권 1책의 석인본으로 간행되었다. 사후 70년 만에 간행되어 중간에 많이 산실된 것으로 보인다. 서문은 권용현(權龍鉉)이 썼다. 권용현은 서문에서 기양연기정진의 재종질로 그의 훈도를 받았으며 사환과 학문이 바른 선비라고 칭송하였다. 권말에는 안종선(安鍾宣)의 발문이 있다. 전남대학교 도서관, 전주대학교 도서관, 국회도서관, 장성 변시연(邊時淵) 댁내 등에 소장되어 있다.

권1에는 시(詩) 14수, 서(書) 55통, 잡저(雜著) 6편이 실려 있다. 시는 서울에서 지은 것과 장성 등 지역에서 지은 시로 구분할 수 있다. 서울에서 지은 시는 10여 년 동안의 객지생활을 읊은 것, 동료들과 활동한 낙사(洛社)에서 지은 것이다. 서울에서 과거시험을 준비할 때, "무엇하러 고향을 떠나 이 멀리 오시었소. 덧없는 세상 영예는 일장춘몽 같은 것을, 병이 났던 어젯밤엔 시도 잠시 접었거늘, 구름 없는 오늘밤은 달빛 더욱 휘황하오. 몇 달을 좋은 친구 자꾸자꾸 말하지만, 십 년을 지낸 하숙 살이 몸에 배었다오. 나그네 시름 흔들어 내 마음 옥죄지 마오. 장부의 마음 산해이니 감싸줌이 소중하리[서울 여관에서 만나 나눈 이야기(洛館會話)]"라는 시를 지었는데, 문과에 급제하기 전 서울생활의 고달픔을 느끼게 한다. 지역에서 지은 시는 장성에서 스승 기정진과 동문 민치완(閔致完)의 부친 회갑을 축하하는 것, 자신의 거처인 백석헌과 농소에 관한 것[「농소(農巢)」], 동문들과 교유하며 주고받은 것 등이다. 서는 부친 기윤진과 아들 우승(宇承)ㆍ우춘(宇春), 사위 허극(許極)에게 보낸 편지가 대부분이다. 특히 「상친정(上親庭)」은 1853년 4월 17일부터 1874년까지 부친에게 보낸 편지인데, 그가 서울 생활 중에 보낸 것으로 과거와 관련 일이나 정계의 동향, 이양선의 출몰, 관직생활에 대한 소식으로 이루어졌다. 아들과 사위에게 보낸 편지도 주로 서울에서 보낸 것인데, 안부를 묻거나 과거와 관련한 내용이 대부분이다. 잡저로는 1862년 삼정에 대한 대책을 적은 「삼정책(三政策)」이 중요한데, 그의 경세관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주로 중앙과 지방의 기강을 바로잡고 인재를 뽑아서 토지를 균등하게 분배하고 신분에 관계없이 군포를 징수하며, 환곡을 폐지하고 상평창으로 바꾸자는 주장을 담고 있다. 구체적으로 당시 삼정을 바로잡기 위해서 성심을 바르게 하여 다스림의 근본으로 세울 것, 기강을 떨쳐 조정을 숙정할 것, 외관을 뽑을 때 탐욕스러운 장리는 금지시킬 것, 이서들의 녹봉을 제정하여 훔치는 것을 금지시킬 것을 대책으로 내세웠다. 아울러 「효책(孝策)」에서는 각종 효행을 논하며, 학문하는 사람이라면 효도를 한 뒤에야 학문하는 도를 행할 수 있음을 강조하였다. 「융학서언심언성책((庸學序言心言性策)」에서는 주희가 지은 『중용서』와 『대학서』에서 각각 심(心)과 성(性)을 논한 이유에 대해서 적고 있다. 「척양사론(斥洋邪論)」은 서학과 서양문물을 사특한 것으로 규정하며 정학을 높이고 서양문물을 쓰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한 글로써, 스승인 기정진의 위정척사사상을 계승하였음을 보여준다. 이외 1855년 여름에 고향인 장성의 청음정에서 휴가 때 독서와 마음공부를 쉬지 말아야 한다는 「휴가시자경문(休暇時自警文)」, 1873년 2월 3일부터 5월 10일까지 시관(試官)사복시정(司僕寺正)으로 임명되어 시험관으로 활동한 내용과 마정을 돌본 내용을 기록한 「계유일기(癸酉日記)」 등이 있다.

권2는 서(序) 5편, 기(紀) 3편, 발(跋) 1편, 제문(祭文) 5편, 묘갈명(墓碣銘) 1편, 행장(行狀) 4편과 부록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문 가운데 주목되는 것은 「노사선생답문류편서(蘆沙先生答問類編序)」인데 기정진과 문인들 간의 문답 내용을 기정진의 문인들이 수년 간에 걸쳐 성리학, 결서, 예학, 역사 등으로 항목별로 편집한 「답문유편(答問類編)」의 의의와 편집 과정을 설명한 글이다. 「기씨족보서(奇氏族譜序)」는 기정진 문인집단과 장성 행주기씨 집안 내에서의 기양연의 학문적 위상을 드러내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기문류에는 임진왜란 당시 열부 기씨, 서울 낙산(落山) 아래에 있는 승방(僧房) 상현암(尙玄菴), 친구 나도규(羅燾圭)가 살았던 덕암(德巖)에 대한 글이 있다. 제문은 스승인 기정진, 서울에서 관직생활을 하면서 교유하였던 홍종서(洪鍾序)서승보(徐承輔), 동문 중에 친하게 지냈던 조의곤(曺毅坤)을 위한 글이다. 가장(家狀)은 서울에 관직 생활을 함께 한 종친 기문현(奇文鉉)을 위해 지은 것이다.

부록에는 1868년 정월부터 1880년 7월 24일까지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기사 가운데 기양연 관련 기록을 모은 「승정원일기초록(承政院日記抄錄)」, 기우만(奇宇萬)이 찬한 기양연의 행장, 안규용(安圭容)이 찬한 기양연의 묘갈명(墓碣銘), 박원재(朴元在)가 찬한 묘표(墓表), 기양연의 장례 때 쓰인 만장(輓章)과 제문(祭文), 기양연의 거처에 대해 찬한 나도규의 「백석헌기(柏石軒記)」, 기양연의 농소에 대해 기재(奇宰)가 찬한 「농소기(農巢記)」, 맨 끝에『백석헌유집』을 간행한 경과를 담은 안종선의 발문(跋文) 등이 실려 있다.

『백석헌유집』은 노사 기정진 문하에 있던 관료의 문집이라는 점에 의의가 있으며, 삼정 문란의 시기에 이를 타개하기 위한 대책과 서양문물을 접하고 대응책을 세운 한말 지식인의 경세관과 말년의 향촌생활의 실상을 살피는 데에 도움을 준다. 아울러 조선후기 과거제의 운영 상황을 짐작할 수 있는 편지글이 있어 주목된다. 또한 기정진과 그 문하생이 갖고 있던 경세관과 척사위정(斥邪衛正)의 시대정신을 이해할 수 있는 의미있는 문집이라 할 수 있다. 「백석헌운(柏石軒韻)」에서, "우리 집 뜰 앞에 동백나무가 있고, 동백나무 아래에는 바위가 있다. 동백나무는 세한의 절개를 지녔고, 바위는 벽처럼 우뚝 선 기상을 지녔으니, 이것을 가지고 사랑채에 편액하여 경계할 것으로 삼는다(吾家庭前有柏, 柏下有石。柏有歲寒之節 石有壁立之像, 取以扁其軒, 以備警策)"라고 노래하였는데, 그의 담대한 기백을 잘 보여준다.


3. 세부목차
卷一
詩 : 謹次蘆沙老先生六十除夕韻(三首), 次梅塢壁上韻, 洛舘會話, 輓安進士(重燮), 洛社偶吟, 次閔都事(致完)大人回甲韻, 洛社會吟(二首), 贈人, 京友晬宴, 栢石軒, 農巢, 巢旣成四從弟弘衍遂以四律賦事相贈仍以其詩爲原韻從以和之, 次東塢亭韻, 別趙月臯(性家○五首),
書 : 上親庭(十七), 答許會源(濬○三), 答李聲震(鍾澤○三), 答禮洞友人(姓名缺○五), 答桂陽友人(姓名缺○二), 與鄭友(名缺), 與友人(姓名缺○六), 與許星甫(極○五), 寄家兒(十), 寄次兒(三),
雜著 : 三政策, 孝策, 庸學序言心言性策, 斥洋邪論, 休暇時自警文, 癸酉日記
栢石軒遺集

卷二
序 : 答問類編序, 朗州崔氏族譜序, 奇氏族譜序, 春坡遺集序, 梁松圃回甲詩軸序,
記 : 烈婦奇氏㫌閭重修記, 尙玄庵記, 德巖記, 栢石軒記, 農巢記


全南長城郡長城邑梅花洞 10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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