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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신재집(日新齋集) / 발문 / 발(跋)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25.0001.TXT.0002
신종록 후 소지
어떤 사람이 나에게 논란하여 말하기를 "일신재(日新齋) 정 선생(鄭先生)이 세상을 떠난 뒤에 친필의 원집(原集)을 바로 간행하였는데, 위로 종유(從遊)한 큰 덕망을 지닌 분으로부터 아래로 직접 가르침을 받은 생도에 이르기까지 성씨와 이름, 지극한 말과 요체가 되는 가르침이 책 속에 환하게 드러나 있어 당대에 두루 유행하고 아래로 먼 후세에까지 전해 질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오직 마땅히 원집을 돈독히 믿어 선생의 학문을 배우고 선생의 마음을 느끼는 자는 이른바 부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지극함이라고 할 만하다. 하지만 도리어 이 일을 거듭 설행한다면 아름다운 명예를 구한다는 폐단이 있다고 하면서 후세에 비난하는 사람이 있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아, 태산이 무너지고 들보가 꺾였으니주 3) 상을 치른 뒤에 짐을 챙겨 각자 돌아갔다. 처음에 다시 돌아와서 집을 짓고 홀로 더 거처한 자공(子貢)처럼주 4) 하지 못하였고, 나중에는 자하(子夏)처럼주 5) 친구들과 떨어져 홀로 지내는 처지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성인의 의론도 70명 제자의 반열에서 금방 괴리되었는데, 더구나 성인이 떠나고 말씀은 사라져 극도로 괴란(壞亂)된 때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이에 동문의 벗 박준기(朴準基) 씨가 이렇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여 마침내 동문들과 함께 해진 문권을 수집하여 행장(行狀) 및 언행(言行) 약간 편을 실어서 서권을 만들어 선사(先師)에 대한 끝없는 그리움을 의탁하였다. 또 후세에 우리 선사의 도덕과 광휘가 온축됨과 제자가 복종하고 믿고 따른 성대함을 알 수 있게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논란하던 자가 잘 알았다고 하고는 물러났다. 이에 글을 쓴다.
정묘년(1927) 동짓날에 문인 풍산(豐山) 홍승환(洪承渙)이 삼가 기록한다.
주석 3)태산이……꺾였으니
훌륭한 스승의 죽음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일신재 정의림이 세상을 떠난 것을 가리킨다. 공자(孔子)가 세상을 떠나기 일주일 전에 "태산이 무너지려 하는구나. 들보가 쓰러지려 하는구나. 철인이 시들려 하는구나.[泰山其頹乎, 梁木其壞乎, 哲人其萎乎.]"라고 읊조렸는데, 자공(子貢)이 이 소식을 듣고는 "태산이 무너지면 우리는 장차 어디를 우러러보며, 들보가 쓰러지고 철인이 시들면 우리는 장차 어디에 의지하겠는가?[泰山其頹, 則吾將安仰, 梁木其壞, 哲人其萎, 則吾將安放?]"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禮記 檀弓上》
주석 4)다시……자공(子貢)처럼
공자가 별세했을 때 모든 문인(門人)들이 심상 삼년(心喪三年)을 치른 다음 모두 짐을 챙겨 떠났으나, 자공(子貢)만은 다시 돌아와서 공자의 묘의 마당에 집을 짓고 홀로 3년을 더 거처하여 6년을 지낸 데서 온 말이다. 《孟子 滕文公上》
주석 5)자하(子夏)처럼
《예기》 〈단궁 상(檀弓上)〉에 "자하가 말하기를 '내가 벗을 떠나 쓸쓸히 홀로 산 지 또한 이미 오래되었다.[吾離群而索居, 亦已久矣.]'하였다. " 하였다.
信從錄後小識
有人難於余曰。日新齋鄭先生奠楹後。手墨原集在卽剞劂。上自從遊長德。下及親灸生徒。姓氏名啣與至言要訓。昭烈卷中。可以旁行於一時。下達於千世。則惟宜篤信原集。學先生之學。心先生之心者。可曰報答佛恩之至。而乃者疊設斯役。有不以好名要美之弊。議之於後歟。余曰。嗚呼。山樑旣頹。治任各歸。初不得子貢之反築。後未免子夏之離索。聖人議論。將乖于七十子之列。況聖遠言湮。壞亂極矣之日耶。此同門友朴準基氏。爲是之懼。乃與同門諸雅。裒粹摩擦。弁載行狀及言行略干。成編縹緗。以寓江漢無窮之思。且使來世有以知我先師道德光輝之蘊。與夫諸弟子思服信從之盛云爾。難者唯唯而退。於是乎書。
丁卯陽復。門人豐山洪承渙謹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