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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신재집(日新齋集) / 일신재신종록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22.TXT.0002
행장
공의 휘는 의림(義林)이요 자는 계방(季方)으로 학자들은 일신(日新) 선생이라 칭한다. 정씨(鄭氏)는 그 선조가 광산인(光山人)으로 고려 때 찬성(贊成)인 휘 신호(臣扈)가 그 시조이다. 감사(監司)인 휘 인진(麟晉)이 처음 조선조에 벼슬을 하였고, 응교(應敎)인 휘 웅(熊), 절도사(節度使)인 휘 응규(應奎), 사직(司直)인 휘 연(演)은 호조 판서주 17)에 추증되어 3세가 연이어 현달하였다. 3대를 전하여 휘 찬(纘)에 이르러서는 벼슬살이에 담박하여 금성(錦城)주 18)에 은둔하면서 대대로 유자의 덕행을 독실하게 하였다. 증조 휘 채(埰)는 낭주(朗州)주 19)로 옮겼고 조부 휘 가석(加錫)은 금릉(金陵)주 20)으로 옮겼다. 선고(先考)의 휘는 제현(濟玄)으로 두 세에 걸쳐 수직(壽職)주 21)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가 되었고 부모를 충심으로 봉양하였으며 자식을 가르치는데 법도가 있었다. 일찍이 한양에서 유학할 때 "명예와 이익은 사람을 그르치니 우리 도(道)의 한 맥은 마땅히 산림 아래 있어야 한다."라고 하면서 마침내 당세(當世)에 대한 뜻을 끊고 밭 갈고 글 읽는 것을 가계(家計)로 삼았다. 선비(先妣) 진원 박씨(珍原朴氏)는 부친이 치성(致聖)으로 위남(葦南) 희중(熙中)의 후손이며 정숙하고 예절이 있었다. 헌종 을사년(1845, 헌종11) 11월 갑자에 능주(綾州)의 대덕동(大德洞) 집에서 공을 낳았는데 꿈에 달이 품속으로 들어왔다. 공은 나면서부터 총명하고 어려서부터 눈을 흘겨보지 않으며 항상 눈을 감고 묵묵히 앉아서 말하기를 "눈은 한 몸의 일월(日月)이니 일월이 어둡고 이지러지면 천지가 막히고 닫힌다."라고 하였다. 겨우 말을 할 수 있을 무렵에 글방 아이들이 《소학(小學)》을 읽는 것을 곁에서 듣고 능히 많은 뜻을 이해하고는 말하기를 "물 뿌리고 청소하는 일이 치평(治平)의 근본이다."라고 하면서 손수 물 뿌리고 청소하는 일을 신중히 하였다. 일찍이 장로(長老)를 따르다가 화이(華夷)와 존양(尊攘)주 22)에 대해 듣고는 문득 묻기를 "똑같은 사람인데 어찌하여 화(華)와 이(夷)로 나눕니까?"라고 하니, 장로가 답하기를 "땅에는 안과 밖이 있고 풍속도 아름다운 것과 나쁜 것이 있다."라고 하였다. 공이 한참동안 묵묵히 생각하다가 말하기를 "사람의 한 몸에도 또한 화(華)와 이(夷)가 있으니, 아름다운 것은 화(華)요 나쁜 것은 이(夷)입니다. 사람은 마땅히 먼저 한 몸에 있는 화(華)를 높이고 이(夷)를 물리쳐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듣는 자들이 크게 놀라고 기이하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이 말은 노사(老師) 숙유(宿儒)도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유문(儒門)의 대사업이 장차 이 아이에게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한 번은 밖을 나가서 비를 만난 적이 있었다. 여러 아이들이 모두 달려가는데 홀로 서서히 태연자약하면서 말하기를 "나의 마음은 천지와 나란하고 나의 성(性)은 성현과 같으니 그 무거움이 어떠한데 가벼이 달려서 예용(禮容)을 잃겠는가?"라고 하였다. 매양 나가 놀면서 아이들이 어지럽게 노는주 23) 경우를 만나면 반드시 급히 돌아와 말하기를 "부모가 경계한 바였습니다."라고 하고, 장로들 곁에 있었으면 서서히 돌아와 말하기를 "부모가 좋아하는 바였습니다."라고 하였다. 항상 말하기를 "스스로 자기의 마음을 마음으로 삼고서 부모의 마음을 마음으로 삼지 않는다면 훌륭한 자제가 아니다."라고 하면서 기쁘고 화순한 기색으로 아침저녁으로 보살펴 드리며주 24) 찬 지 따듯한 지를 살폈다.주 25) 전후로 당한 상(喪)에서는 모두 애훼(哀毁)함이 심하였고 일과로 정하여 묘소에 올라갔다. 대대로 전해온 선대의 원고를 수집하여 소중히 보관하였다. 처음 입학하여 《효경(孝經)》을 배울 때 구절마다 훤히 이해하고, 이해하면 번번이 체험을 하니 통정공(通政公)이 그 지향하는 바가 있음을 알고는 다른 일로 방해되지 않게 하였다. 또 말하기를 "사람은 업(業)이 있는 것이 귀하고, 업은 성취가 있는 것이 귀하다."라고 하였다. 공은 이 말씀을 받들어 가슴 속의 경구(警句)주 26)로 삼고 조용한 데 처하여 애써 공부하면서 먹고 자는 것도 잊으며 많은 책과 경전을 상세하게 익히니 약관(弱冠)을 전후하여 학업이 이미 두각을 드러냈다. 이에 사조(詞藻)주 27)를 부화(浮華)한 것으로 여기고 공령(功令)주 28)을 자신을 자랑하는 것으로 여겼다. 가계(家計)를 꾸리는 데는 냉담하고 강송(講誦)을 다반사로 여기면서, 남들이 맛보지 못한 것을 맛보고, 남들이 즐거워하지 않는 것을 즐거워하니 견식이 이미 시유(時儒)들보다 탁월하였다. 이 때 유학의 학술이 분열되어 성명(性命)의 학설이 제멋대로 터져 나오고 이기(理氣)의 학설이 어지러워져서 하늘은 주재하는 것을 잃어버리고 본원(本源)은 허위(虛位)가 되었다. 대략 제가(諸家)를 두루 고찰하고 실마리를 궁구하면서, 참된 지식과 실질적 식견도 없이 입으로 다투어 떠들어대는 것을 병폐로 여겼다. 24세 때인 무진년(1868, 고종5)에 노사(蘆沙) 선생을 사상(沙上)주 29)에서 배알하였는데 선생이 공을 한 번 보고는 자주 칭찬하며 말하기를 "타고난 자품이 화락하고 평이하며 식견이 매우 바르다."라고 하고, 또 말하기를 "'사미(沙彌)가 병든 중의 문을 두드리는데 미목(眉目)이 시원하게 밝아 학문할 만한 기틀이다.'라고 하였는데 내가 계방(季方, 정의림)에게 그렇게 말하겠다."라고 하였다. 공은 선생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칼을 맞은 대가 쪼개지듯 시원스럽게 제가(諸家)의 쭉정이를 쓸어버리고 성철(聖哲)의 참된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그리고는 만족스럽게 돌아와서 말하기를 "세상에 사도(師道)를 자임한 자가 모두 오류를 인습하면서 단지 한 쪽만을 보고서, 들은 것을 기술하고 강설(講說)하니 틈 사이의 빛과 한 국자의 물주 30)을 얄팍하게 늘어놓은 것에 불과하다. 오직 선생의 자질은 생지(生知)주 31)에 가깝고 도는 《중용(中庸)》에 근본을 두고서 곧바로 주자(朱子)를 접하여 대체(大體)을 세웠으니 말씀마다 본원(本源)에서 흘러나온 것이 아님이 없었다. 마치 큰 집 천만 칸에 허다한 황금과 비단을 저장해놓으니 사람들이 구하는 대로 따라 써도 다하지 않은 것과 같았다."라고 하였다. 제대로 보았고 제대로 말한 것이다. 한 번 보고 대번에 이렇게 일컬었으니 자기의 조예가 높고 깊으며 터득한 바가 참되고 절실하지 않다면 이처럼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일찍이 개연(慨然)히 탄식하기를 "고금에 허다한 유지자(有志者)들이 가르침을 받을 터전을 얻고서도 오히려 탁 트이게 꿰뚫지 못한 것은 단지 중도에 그치는 것이 병폐였던 것이다. '일신우신(日新又新)'주 32)이 이 병폐에 대한 약이다."라고 하고 '일신(日新)' 두 글자를 자리 오른쪽에 걸어놓고 항상 보면서 힘을 다하였다. 이전에 아무런 일이 없었는데도 개연히 탄식한 것은 안자(顔子)가 위연(喟然)히 탄식한 것과 일맥상통한 것이니, 그 아래의 말들은 무궁한 스승의 도를 우러르며 따르고자 한주 33) 지극한 뜻이 아님이 없다. 묘계(妙契)의 관문을 꿰뚫을 수 있는 것이 대개 여기에 있었다. 그리하여 선생에게 편지를 써서 여쭈니 답하기를 "또한 좋지 않은가? 이것이 바로 세상과는 서로 잊고 내가 좋아하는 바를 따르는주 34) 하나의 기틀이다. 다만 이곳에 입장을 확고히 정해야 비로소 의론할 만하다."라고 하였으니 대개 또한 허여함이 깊었다. 동문 중에 대곡(大谷) 김석귀(金錫龜)ㆍ애산(艾山) 정재규(鄭載圭)와 가장 사이가 좋았는데 대개 그 지향이 같고 견해도 같았다. 물러나서는 강해(講解)하고 나아가서는 질정(質正)을 받으면서 강직하면서도 부드러우니주 35), 항상 부자(夫子)의 미소를 띠게 하였다.주 36) 하루는 상자에 보관해 둔 〈납량사의(納凉私議)〉와 〈외필(猥筆)〉을 꺼내 보여주셨는데 대개 선생의 심오한 이치를 편 것이었다. 이른 바 성(性)과 천도(天道)주 37) 및 제자들이 쉽게 들을 수 없는 것이었는데 세 군자가 이 때에 듣게 되었다. 선생의 뜻은 대략 "세상에 진절(眞切)한 견해를 가진 사람이 없어서 후세의 자운(子雲)과 요부(堯夫)주 38)를 기다렸는데, 세 사람은 견식이 있으니 내가 너희에게 숨길 것이 없다."라는 것이었다. 일관(一貫)의 요지주 39)는 오직 증자가 들었고 태극(太極)의 묘리는 단지 양정(兩程)주 40)이 들었는데, 논자들은 이것을 선생이 도를 진전(眞傳)한 것이라고 여겼으니 대개 옳은 것이다. 애산(艾山)과는 서로 떨어진 거리가 십사(十舍)41)41)ㅍ 십사(十舍) : 사(舍)는 옛날 중국의 군제(軍制)에서 군대(軍隊)의 하루 행정(行程)인 삼십 리를 이르던 말이니, 십사는 삼백 리가 되는데, 일정하지는 않다.
인데 매번 사문에서 약속하지도 않았는데 만난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대개 그 기류(氣類)주 42)가 서로 감응하였기에 그 응함이 이와 같았던 것이다. 한 바탕 화합을 하면 조화로운 음악 가락주 43)과 같을 뿐만이 아니었으니 곁에 있던 사람들도 그 흥미진진한 모습을 보았다. 선생이 대곡(大谷)에게 일러 말하기를 "두 사람은 성(姓)이 같고 뜻이 같으며 사는 마을〔里〕의 이름도 같은데 매번 이렇게 자리도 같이 하니, 기록하여 훗날의 고사(故事)로 삼을 만하다."라고 하자 모두 기뻐해마지 않았다. 집이 몹시 가난하여 그 거처가 일정하지 않고, 먹고 마시는 것조차 누차 거르기 일쑤였다. 그러나 편안히 여겨 개의치 않고 그 즐거워하는 것을 바꾸지 않았으니 거의 도에 가까웠다.주 44) 원근의 배우는 자들이 믿고 따르며 책 상자를 지고 와서 학당에 수용할 수 없게 되었다. 사도(師道)의 명망이 저절로 모였으나 겸손하여주 45) 빈 듯 없는 듯하였다. 그러나 생도를 계도하는 방도는 이런 것으로 혹시라도 허술히 하지 않았고, 상세하고 간절하게 인도하고 격려하여 점차 다듬어 이루게 하였다. 혹 고요히 앉고 체험케 하며 혹은 변론하고 반증주 46)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진전을 바랄만하면 기쁨이 안색에 드러났고, 둔하고 막혀서 깨우치기 어려우면 잘못이 자기에게 있는 것처럼 여겼다. 나아간 경지가 정밀하고 깊은 자는 도와서 작은 성취에 안주하지 않도록 하고, 국한되고 편협하게 보는 자는 가르쳐 달통의 경지에 나아가게 하였다. 훤하게 깨우쳐주니 듣는 자가 쉽게 깨우쳐서 고갈된 자는 두루 적셔지고 얽매인 자는 벗어났다. 절근(切近)하고 긴요한 곳은 교묘하게 천착하려 하지 않았고, 평탄하고 명쾌한 곳이라도 대략 흘려버리려 하지 않았다. 일찍이 말하기를 "책을 볼 때는 모름지기 마음에 붙게 하고 몸에 간절하게 하면 의미가 자연히 깊어진다. 범범하게 널리 읽고 애매모호하게 이해하여 귀결처가 없기보다는 차라리 정밀함을 지극히 하여 요해처를 차지함이 낫지 않겠는가. 한 치를 얻고 한 자를 얻어 가면 진보처가 있는 것이다. 독서가 어찌 문인재자(文人才子)가 되어 급제(及第)를 추구하고 봉록을 구하는 계책으로 삼으려는 것이겠는가. 단지 한 글자에는 한 글자의 유익함이 있고, 하루에는 하루의 진보가 있을 뿐이다. 아득한 만사는 흉중에 둘 것이 없고, 득실(得失)과 귀천(貴賤)주 47)은 저 하늘주 48)에 맡기는 것이다. 뜻이 서지 않으면 한 때의 선한 마음은 기름에 그림을 그리고 얼음에 조각을 새기는주 49) 것에 불과하며, 많은 경전의 격언과 중요한 말도 문구(文具)나 책방에 불과하다. 사람이 황금 조각이나 옥 부스러기를 얻어도 오히려 애호하여 실추할까 두려워하면서, 이 몸이 얼마나 중요한데 애호하는 방도를 다하지 않겠는가. 일언일행(一言一行)을 삼가지 않고 일각일시(一刻一時)를 삼가지 않으면 모두 스스로 그 몸을 잃으며, 스스로 거만한 자는 남이 반드시 업신여기고, 스스로 버리는 자는 남도 역시 버린다. 의리는 무한하고 사업은 무궁하다. 7, 8분(分)의 공부를 하면 7, 8분의 사람이 되고 10분의 공부를 하면 10분의 사람이 되니, 자기 지위의 고저(高低)는 자기 노력의 다과(多寡)에 달려 있다. 우리들이 이미 세상에서 큰일을 할 수 없다면, 할 수 있는 것은 성현의 책을 읽고 성현의 도를 지켜서 붕우들과 함께 하고, 또 이를 후세에 전하여 사문(斯文)의 일맥을 무궁하게 보존하는 것이다. 이를 제2의(第二義)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무거운 짐은 한쪽 팔로 움직일 수 없고, 달려드는 물결은 한 줌의 흙으로 막을 수 없다. 비록 고치실ㆍ좁쌀ㆍ모발주 50) 같은 사소한 현능이나 두공(斗拱)ㆍ빗장ㆍ문설주주 51) 같은 하찮은 재목이라도 쌓고 쌓아 더욱 기발해지고 서로 의기투합한 연후에야 많은 세상사를 수습할 수 있고 많은 세교(世敎)를 도울 수 있는 것이다. 크게 입을 떠벌리며 이(理)를 말하고 기(氣)를 말하는 것은 일상생활에 나아가서 옳은 것을 찾아 구하고 그른 것을 결연히 제거함만 못하다. 아마도 이것이 이기(理氣)의 실제 일일 것이다. 몸소 행하고 마음으로 터득한 것이 발현되어 가르침이 되었으니, 흐름을 따라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그 실천의 실제를 대략 엿볼 수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일찍이 지인ㆍ생도들과 서석산(瑞石山) 정상에 올라서 풍영(諷咏)하고 돌아왔는데 유연(悠然)히 기우(沂雩)주 52)의 즐거움이 있었다. 많은 선비들이 정자를 지어 설강(設講)을 하고 '영귀(咏歸)'로 편액을 하였다. 오성사현(五聖四賢)의 초상을 봉안하고 매년 봄가을로 석채(舍菜)주 53)ㆍ여수(旅酬)주 54)ㆍ상읍례(相揖禮)를 마친 뒤에 청강하는 경학생(經學生)과 배우는 자들이 빙 둘러 모시고 질문을 하니 삼대(三代)의 유풍이 있었다. 영남(嶺南)주 55)을 한 번 유람하면서 애산(艾山)과 최계남(崔溪南)주 56) 등 제공을 만났는데 따르는 문인이 수 십 인이었고, 계남과 애산도 각기 모시고 따르는 제자들이 있었다. 유명한 정자와 명승지를 두루 다녔는데 이르는 곳마다 경서를 갖고 묻고 논란하며주 57) 문답을 한 뒤에 도리(道理)를 익히고 연마하였다. 보는 사람들이 "추로(鄒魯)주 58)의 유풍이 모두 여기에 있다."라고 하였다. 그 뒤에 또 애산(艾山)과 계남(溪南) 및 족형인 월파(月波)와 약속하여 방장(方丈 지리산)의 종산(鍾山)에서 만났다. 영호남 선비들이 설강을 하고 더 가르쳐주기를 청하니주 59) 군자 서너 명이 절충하고 문답을 하는데 위로 선왕의 전례(典禮)부터 학문을 하는 절도에 이르기까지 설파하지 않음이 없었다. 삼산(三山) 권기덕(權基德)이 이를 모두 기록하여 〈종산강록(鍾山講錄)〉을 만들었다. 이날 술이 반쯤 거나해지자 공이 술잔을 들고 말하기를 "공문제자(孔門諸子)들이 대성(大聖)을 얻어 스승으로 삼고 대현(大賢)을 얻어 벗으로 삼으며 스승에게 묻고 벗에게 익혔다. 그 지극한 즐거움을 상상하면 천년 뒤에도 오히려 느끼는 바가 있다. 선비가 오늘에 태어나서 비록 당우(唐虞)의 임금주 60)과 고기직설(皐虁稷契)주 61)을 만나 대낮처럼 밝은 때에 토론주 62)을 할 수는 없더라도, 맹자(孟子)가 이른 바 '천하에 왕 노릇하는 것은 삼락(三樂)에 끼지 않는다.'주 63)고 하여 그 경중에 구분을 두었으니, 차라리 저것을 버릴지언정 이것을 잃을 수는 없다. 우리들은 노사(蘆沙) 선생 같은 스승을 얻었고 대곡(大谷)ㆍ애산(艾山) 등 제군자와 같은 벗들을 얻어서 교화를 입고 은덕에 적셔졌다. 수사(洙泗)주 64)의 성대함을 옛날과의 거리가 이미 멀어진 날에도 직접 보게 되었으니 이는 일생에 다시 만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홀연 선사(先師)께서 돌아가시고주 65) 대곡(大谷)도 이어 세상을 떠났으며, 계남(溪南)과 애산(艾山) 제군자는 멀리 십사(十舍)의 밖에 있다. 그러니 대의가 칠십 제자주 66)의 몸에서 어긋나고, 떨어져 살면서 서하(西河)의 죄주 67)를 면치 못하는 것처럼 될까 두렵다. 원컨대 종산(鍾山)의 모임을 결성하여 1년에 한 번 만나는 바탕이 되었으면 한다."라고 하니 사람들이 모두 승낙하였다. 그러나 세상이 어지러워 이뤄지지 못했으니 사우(士友)들이 한스러워 했다. 조정에서 병자년(1876, 고종13)에 외교를 한 뒤로 해적들이 교통주 68)을 하게 되자 세도(世道)의 근심을 깊이 품고 유인(幽人)의 정조주 69)를 굳게 지켰다. 매번 비바람이 치는 밤이면 옷을 입고 관을 쓰고 앉아서 장남헌(張南軒)주 70)의 "평생 비바람 치는 저녁이라, 매양 명절(名節)을 지키기 어려움을 생각하네."라는 시구를 크게 외우니, 처연하여 눈물을 흘릴 것 같았다. 을미년(1895, 고종32) 8월의 사변주 71)이 있고 계속하여 단발령(斷髮令)주 72)으로 협박하는 일이 있자 분연(奮然)히 말하기를 "이런 때의 일은 단지 목숨을 버려 죽는 한 길이 있을 뿐이다."라고 하면서 애산(艾山)에게 편지를 급히 보내 함께 모여 의논하기로 약속을 하였다. 병신년(1896, 고종33) 봄에 내가 의병을 일으켜 토복(討復)하자는 것으로 능성(綾城)에 격문을 보냈다. 격문에 답해오기를 "질그릇으로 온전하기보다는 옥으로 부서지는 것이 나으며,주 73) 물고기도 바랄 바이지만 어찌 곰발바닥만큼 좋겠는가.주 74)"라고 하였다. 내가 무릎을 치며 일어나서 말하기를 "이것은 내 벗 정일신(鄭日新)의 말투이다. 절의가 마음에 뿌리하고 충용이 의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면 이런 글귀를 지어 낼 수 없다."라고 하였다. 그 후에 물어보니 과연 그러하였다. 격문의 내용을 듣고는 한 지방 사람들을 부르고 맹세문을 지어 말하기를 "우리 동방에 진실로 한 푼이라도 사람의 마음을 가진 자라면 누군들 원수와 하늘을 함께 하는주 75) 수치를 갖지 않겠는가? 더구나 지금 온 세상이 머리털을 자르는데 오직 청구(靑邱)주 76)의 한 편에서만 상투를 매는 것을 지키고 있다. 이 상투마저 만약 없다면 만세토록 비태(否泰)와 소식(消息)의 기틀은 끊어질 것이다."라고 하였다. 논란(論難)하는 자들이 말하기를 "비유하자면 저 쪽은 칼이고 우리 쪽은 고깃덩이니 반드시 요행이란 없을 것이다. 일명(一命)의 군자도 없는데 이럴 필요가 무엇이 있는가.주 77)"라고 하였다. 공이 늠연히 말하기를 "난신적자(亂臣賊子)는 사람마다 토벌을 하는 것이 《춘추(春秋)》의 의리이니주 78) 의리를 논하고 힘은 논하지 말아야 한다. 군자가 의리를 지키는데 어찌 다시 바라고 기대하는 것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 때 나는 금성관(錦城舘)에서 주둔하며 진을 치고 있었는데 공이 필마로 와서 모여 함께 방략을 논의했고, 돌아가서도 여전히 여러 번 편지로 서로 면려하였다. 진을 광산관(光山舘)으로 옮기자 공과 다소의 뜻있는 선비들이 나와 함께 광산(光山)에서 사생(死生)의 계책을 세우려 했다가 선유(宣諭)주 79)를 듣고는 의병 군대를 파하고 중지하였다. 그런데 계속하여 의거를 한 사람들을 체포하고 협박하는 명령이 있었으니, 대개 적신(賊臣)들이 임금의 권위를 끼고 조령(詔令)을 사칭하여 이런 짓을 한 것이다. 내가 의리를 함께 한 이들에게 글을 보내서 "이것은 우리 임금의 뜻이 아니다. 죽임에 나아가는 것은 의리가 아니니 종적을 숨기고 때를 기다리는 것이 가장 좋은 계책이다."라고 하니 공도 그렇다고 하였다. 공이 산간을 떠돌다가 내가 체포되었다는 거짓말을 듣고는 마침내 집으로 돌아와서 체포를 기다리며 말하기를 "의리상 혼자만 살 수 없다."라고 하였는데 곧 거짓말이었음을 알고는 그 일은 묻어두고 묻지 않았다. 후배 계도를 자기의 임무로 삼고 생도들에게 말하기를 "옛사람은 감옥 안에서도 《상서(尙書)》를 배웠고주 80) 배 안에서도 《대학(大學)》을 배웠는데주 81) 어찌 세상이 어지럽다하여 강학(講學)을 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고 한 달에 한 번 강학하는 학규를 정하여 혹 산재(山齋)에서 혹 계정(溪亭)에서 종일토록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때 영남 사람 권봉희(權鳳熙)와 최동민(崔東敏) 무리들이 시유(時儒)들의 뜻에 영합하여 "〈납량사의(納凉私議)〉와 〈외필(猥筆)〉이 선현을 범하고 배척했다."라고 하면서 서로 어울리며 분분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저들이 비록 스스로 끊고자 해도 어찌 일월(日月)의 밝음을 손상하겠는가.주 82) 선현을 머리에 이고서 후배를 현혹하여 그 해로움이 없지 않으니 변론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말하기를 "선생께서는 율옹(栗翁)주 83)에 대해서 독실하게 믿고 높이 흠모하셨으니 여러 문집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다만 '음(陰)과 양(陽)이 동(動)하고 정(靜)하는 것은 기틀이 절로 그러한 것이지 시키는 것이 있지 않다.'주 84)는 한 구절은 계합하지 않는 바가 있어서 매양 유행(流行)의 한 측면을 폭넓게 보려 하셨다. 그런데 세유(世儒)들이 이 한 단락을 가지고 주기(主氣)의 증거로 삼는 것을 보고 나서는, 근원을 따져서 변론하여 통쾌하게 말씀한 것이다. '피음사둔(詖淫邪遁)주 85)과 전도(顚倒)주 86)되고 창피함'주 87)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뒷사람의 폐단을 밝히려 하신 것이다. 온공(溫公)은 《맹자(孟子)》를 의심했지만주 88) 그의 아들 강(康)은 경연(經筵)에서 《맹자(孟子)》를 강학할 것을 권했고,주 89) 유원성(劉元城)주 90)은 온공의 문인이지만 회와 구운 고기처럼 《맹자(孟子)》를 즐겨했다. 남헌(南軒)은 오봉(五峰)주 91)의 잘못된 곳을 분별했으며, 면재(勉齋)도 혹 고정(考亭)주 92)의 정설에 어긋나는 것이 있었다. 주자(朱子)는 '주자(周子)는 황로(黃老)와 같다.'고 했고, '정자(程子)는 황로의 유풍(流風)이 있다.'고 했다. 이러한 것 또한 그 부사(父師)와 전현(前賢)을 무훼(誣毁)하였다고 규정할 수 있겠는가. 전현(前賢)이 우연히 살피지 못한 것을 후현(後賢)이 변론하여 밝혔다면 바로 존모(尊慕)의 도리를 십분 다한 것이다. 이것이 어찌 권(權)과 최(崔) 등이 아는 바이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리고 영남의 선비들에게 통고하여 그 죄를 분명히 알게 하였다. 또 호남의 선비들을 영귀정(咏歸亭)에 모아서 간절하게 변론을 하면서 말하기를 "우리 당의 선비들은 금일의 변론을 한 번 보라. 이기설(理氣說) 같은 것은 그 득실을 후학들에게 맡겨둘 수 없으니 마땅히 곧장 살펴서 밝혀야 한다. 만약 자기는 식견도 없으면서 남을 따라 칭찬하고 비방한다면, 그대로 답습하고 구차히 하는 사이에, 이 몸이 편파적인 죄과에 빠지지 않을지 어찌 알겠는가. 이것은 자신과 가문의 대계(大計)이니 어찌 이 한 가지 일만을 마치는 것에 그칠 뿐이겠는가."라고 하였다. 또 시유(時儒) 몇 사람이 권(權)과 최(崔)의 여론(餘論)을 따라 반박하고 조목조목 변론했다는 것을 듣고, 조목을 따라 변론하여 밝혔는데 전문이 원집(原集)에 실려 있다. 그 말단에 이르기를 "근세에 주기론(主氣論)이 한 가지가 아니다. 태극(太極)을 분(分)이 없는 일(一)주 93)로 여기는 것이 있고, 오성(五性)주 94)을 기(氣)를 띤 사물로 여기는 것이 있고, 명덕(明德)주 95)을 형이하(形而下)로 여기는 것이 있다. 일본만수(一本萬殊)주 96)를 말하면 만수(萬殊)는 기(氣)가 되고, 대본달도(大本達道)주 97)를 말하면 달도(達道)가 기가 된다. 음양오행(陰陽五行)을 본연(本然)이 아니라고 말하고, 사람과 사물의 치우침과 온전함을 정분(定分)이 아니라고 말한다. 주재(主宰)와 묘용(妙用), 조리(條理)와 단락(段落)에서 한결같이 기(氣)를 중시하여 기(氣)가 이(理)의 자리를 빼앗는다면, 신하가 임금의 자리를 빼앗고, 자식이 아비의 자리를 빼앗고, 아내가 남편의 자리를 빼앗고, 소인이 군자의 자리를 빼앗고, 이적(夷狄)이 화하(華夏)의 자리를 빼앗는 것 또한 하나의 예사(例事)가 될 것이다. 선사(先師)께서 이것을 두려워하여 주장을 발휘하여 척결하고 차례로 절충하였다. 그런데 일변의 논리만을 오히려 고집하니 단지 자기의 역량을 알지 못함을 드러냈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혹자가 묻기를 "오늘날 동방에 주기(主氣)의 한 학설이 있는데, 종유(從遊)하는 데에 신중하지 않을 수 없으니 마땅히 어떻게 가려서 대처할까요?"라고 하였다. 공이 답하기를 "벽계(蘖溪)주 98) 이(李) 선생의 척사위정(斥邪衛正)의 계책이 광명정대하여 우리 선사와 맥락을 같이한다. 저술한 평소 말씀은 스스로 주재(主宰)가 되어 도기수역(道器帥役)주 99)의 분수를 밝히고 일종의 명기론(明氣論)을 배척하는 것이다. 이 또한 선사와 한 입에서 나온 것 같았으니 진실로 천하의 도(道)는 하나임을 알았다."라고 하였다. 적신(賊臣)들이 나라를 팔고 5조약주 100)을 강제로 체결했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 근심하고 분노하여 소장을 썼다. 첫머리에는 섬 오랑캐는 물리쳐야지 화친할 수 없으며 나라의 적신들은 참해야지 용서할 수 없음을 말하고, 중간에는 종묘를 품고 사직을 위해 순절하는 의리를 말하여 임금의 마음을 굳건하게 하였으며, 끝에는 죽음을 바쳐 떠나지 않겠다는 의리를 말하였다. 소장을 이미 작성하였는데 유소(儒疏)주 101)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개연히 원고를 불살라버렸다. 얼마 뒤에 면암(勉庵)과 애산(艾山)이 궐리방(闕里房)에서 만나기로 약속하여 의병을 일으킨다는 계획을 듣고 말하기를 "나의 일을 의탁할 곳이 있구나."라고 하였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궐리방의 약속도 저지되니 책상을 치고 탄식하며 말하기를 "접어(鰈魚)의 등 위의 한 조각 땅주 102)이 저들이 들어와 물고기를 그물질하는 곳이 되겠구나. 진(晉)나라가 화하(華夏)의 맹주였을 때 계씨(季氏)의 뇌물을 받고 소공(昭公)을 건후(乾侯)에서 죽게 했는데주 103) 지금 외딴 지역 오랑캐주 104) 부류들이 유독 그 뇌물에 취하지 않을지 어찌 알겠는가? 우리나라 선비들의 여론이나 백성의 여론이 굳이 꺼리는 것이 없고 백성들은 위를 향하는 마음이 없다. 사람이 짐승으로 변했으니, 온 하늘 아래가 큰 오랑캐와 작은 오랑캐들이다. 신포서(申包胥)처럼 통곡주 105)을 한들 그 보존할 땅도 없어졌는데 초(楚)나라주 106)를 보존하려는 계책을 어찌 바랄 날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는데, 그 근심과 분노가 병이 되었다. 대개 천하가 침몰주 107)하여 갈 곳도 없었기에 사는 집을 서산(西山)으로 삼고 앉은 곳을 동해(東海)로 삼아, 차라리 굶어 죽고 동해에 빠져 죽겠다는 뜻주 108)을 누차 안색과 말에 드러냈다. 하루는 입으로 시를 읊기를 "노사(蘆沙) 선생의 병인년 상소는 대의가 삼엄하여 일월처럼 밝았으니, 당시에 만약 두세 가지 계책만 썼더라도 어찌 오늘날에 사직이 기울었으랴."라고 하였다. 또 읊기를 "예로부터 나라를 잃기로서니 어찌 지금만 같으랴, 하늘이 뒤집히고 땅이 엎어지며 해와 달도 잠겼구나. 문을 닫고 자정(自靖)주 109)의 계책만 있을 뿐, 서산과 동해는 찾아갈 것이 없도다."라고 하면서 문하 제자들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이곳이 내가 입명(立命)주 110)할 곳이다."라고 하였다. 제자들이 초상을 그리자고 청하니 공이 손을 내저으며 말하기를 "선사(先師)께서 달가워하지 않은 것이었고, 더구나 지금은 온 세상이 재난에 빠져주 111) 무덤의 해골도 땅이 없는데 하필 헛된 초상을 남기겠는가?"라고 하였다. 문인들이 이르기를 "이 일은 생도들의 일이지 선생의 일이 아니다."라고 하고는 사사로이 서로 어울려 초상화를 그려냈다. 공이 뒤에 알고는 찾아서 그 위에 쓰기를 "너의 생이 측은하구나. 의당 너를 두어야 할 곳은 두어(蠹魚)주 112)의 곁이로다."라고 하였다. 나라가 망했다는 기별을 듣고는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말하기를 "옛날에 나라가 망하면 죽어야할 의리가 하나이니 신하가 사직에 죽는 것이었다. 지금 나라가 망함에는 죽어야할 의리가 둘이니 사람과 짐승이 나뉘는 때라 사람이라면 죽지 않을 수 없다. 다만 마땅히 문을 닫고 구멍을 막으며, 우리의 옷을 입고 우리의 두발을 보존하며 우리의 도를 지켜서 자정(自靖)주 113)의 계책을 행할 뿐이다."라고 하였다. 생도들이 병문안을 오니 병을 무릅쓰고 일어나 앉아서 말하기를 "그대들은 서책을 가까이 하고 있는가? 바다가 마르고 산이 무너져도 이 학업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석과(碩果)주 114)의 성쇠가 우리 당을 말미암지 않으면 장차 그것을 누구에게 맡길 것인가?"라고 하였다. 곁에서 넌지시 아뢰는 자가 있어 말하기를 "광택(光澤) 산인(山人)은 사영(四營)주 115)이 이미 궤멸된 이후에도 붙잡히지 않고 그 종적을 숨기면서 우리의 도(道)를 껴안고 있으니 굳이 필사의 계책을 지을 필요는 없겠습니다."라고 하니 답하기를 "군자가 의리에 대처하는 데에는 때가 있을 뿐이다. 어찌 같을 수 있겠는가. 사람은 하늘의 새나 바다의 물고기 같은 물건이 아닌데 오늘날 어찌 붙잡히지 않는 방법이 있겠는가. 광택 산인도 사람인데 그 날이 얼마나 되겠는가."라고 하였다. 병이 심해지자 제자 5~6인이 모시는데 공이 말하기를 "두심언(杜審言)이 말하기를 '조물주에게 고통을 받는다.'주 116)라고 하였는데 나 또한 그렇다. 그러나 나의 죽음은 진실로 유쾌하다.주 117) 내가 죽은 뒤에 그대들은 내가 평소 권면하던 말을 잊지는 않겠지?"라고 하고는 자리를 바르게 하고 치관(緇冠)주 118)을 씌우도록 하고는 태연히 세상을 떠났다. 때는 경술년(1910, 순종3) 10월 10일 계유(癸酉)였다. 문인들이 백건(白巾)에 환질(環絰)주 119)을 두르고 신산(薪山) 뒤편 곤좌(坤坐)의 언덕에 안장하니 치전(致奠)과 뇌문(誄文)이 길에 잇달았다. 부인은 여흥 민씨(驪興閔氏) 치환(致煥)의 따님으로 부드럽고 아름다워 내조(內助)가 있었는데 공에 앞서 세상을 떠나 모(某) 산에 안장하였다. 1남 상묵(尙默)은 일찍 죽었고, 세 딸은 광산(光山) 이진휴(李進休)ㆍ홍주(洪州) 송광수(宋光壽)ㆍ밀성(密城) 박경동(朴敬東)에게 시집갔다. 손자 2남은 헌규(憲圭)가 가업을 잘 계승하였고주 120) 범규(範圭)가 있으며, 손녀 하나는 남평(南平) 문제준(文濟俊)에게 시집갔다. 문하 제자들이 그 유문을 수습하여 판각(板刻)을 이미 마치고 또 언행 중에 평일에 드러난 것을 기초(起草)했다. 대개 소위 잘 관찰하고 잘 말한 것으로 예컨대 청수온직(淸粹溫直)ㆍ화엄온장(和嚴溫莊)ㆍ기량관홍(器量寬弘)ㆍ표리형철(表裏泂澈)한 것들이다. 성동(成童, 15세)의 나이를 전후하여 이미 시대의 중망(重望)을 졌으며 기른 덕(德)이 날로 성대해지고 참된 성심이 해로 쌓여갔다. 스승의 문하에 올라서는 그 진결을 터득하여 홀로 밝고 트인 경지에 섰다. 끽긴활발(喫緊活潑)하며, 재능을 품고 있어서 세상을 경륜하고 시대에 쓰일 수 있었다. 그러나 상응하는 예우주 121)가 이르지 않아서 비록 사업에 발휘할 수는 없었으나 내면에 쌓여 덕행이 된 것이 아름다워 볼만하였다. 그 겉모습을 본 자는 몸가짐을 삼간 한 가난한 선비주 122)로 여겼고, 그 논하는 것을 들은 자는 경전을 읽는 한 노숙한 서생으로 여겼으며, 그 참으로 알고 실제로 본 자는 '차라리 성인을 배우다가 이르지 못할망정 한 가지 선(善)으로 이름을 이루려 하지 않은'주 123) 사람으로 여겼다. 뜻이 치택(致澤)주 124)에 있었는데 행해지지 못했으나 그 도(道)를 작게 쓰려 하지 않았다. 광휘를 감추고 문채를 없앴어도 비단옷의 아름다움이 날로 드러났다.주 125) 비록 홀로 그 자신을 선하게 하면서주 126) 곤궁하게 처했지만 바른 학문을 밝히고 선비들의 의취를 바로잡아 사문(斯文)을 도왔으니 그 공적이 어떠한가? 영민한 자질을 갖고도 지둔하게 공부를 하였으며, 관대하고 유쾌하게 마음을 쓰면서도 세밀하고 치밀하게 하였다. 주리(主理)를 가계(家計)로 삼고 지경(持敬)주 127)을 생애(生涯)로 삼았다. 조용한 가운데 깊이 생각하였으며 담담한 가운데 참된 재미를 가졌다. 그 마음가짐은 마치 창해가 비록 광활해도 그치지 않고 노를 저어가면 그 해안에 닿을 수 있고, 태산이 비록 높아도 멈추지 않고 걸어가면 그 정상에 오를 수 있으며, 외로운 군사가 강한 적을 만나면 목숨을 버리고 앞으로 향하여 적이 죽지 않으면 내가 죽는 것처럼 하였다. 쇠털이 그 섬세함을 싫어하지 않고 고치실이 그 치밀함을 싫어하지 않듯, 혹 올바르게 보고 뒤집어 보기도 하고, 혹 떼어놓고 보기도 하고 합쳐서 보기도 하면서 쉽게 풀리지 않는 공부에 항상 신고(辛苦)의 노력을 다하였다. 가까이서 취하고 멀리서 취하여주 128) 조리와 두서를 명백히 살피고주 129) 올바른 뜻과 곁가지의 뜻은 한계를 정연히 하여 지극히 쌓아나가니 얼음이 풀어지듯 시원스럽고 빗물이 적시듯 흡족하였다. 저 피부(皮膚)처럼 표피적인 학문주 130)에나 공력을 쓰고 아침저녁으로 실효를 바라는 자가 어찌 그 심오함을 흉내낼 수 있겠는가. 일찍이 말하기를 "내가 타고난 바탕이 몹시 약한데다 어려서 병이 많아 힘써 매진하지 못하였는데, 거칠게나마 문자를 알고 대략 도리를 이해하는 것은 깊이 사색하고 완미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후생 소년들로서 받은 기품이 완후(完厚)한 자주 131)가 궁격(窮格)의 공부주 132)를 더한다면, 도에 나가는 데 어렵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만년에 또 주서(朱書)에 마음을 붙이고 말하기를 "내가 많이 쇠해져서 피 흘려 싸우듯 공부를 할 수 있는주 133) 때가 아니다. 그러나 사색하는 능력 한 가지는 예전과 비교해 줄어든 것은 없다. 다만 심히 쇠잔해져서 힘써 행할 수 없는 것이 한탄스럽고 한탄스럽다."라고 하였다. 매양 생도들을 모아놓고 강의하고 예를 익히는 것 외에 나머지 일이 없었다. 혹이 이르기를 "모임에 참석한 자가 모두 진실한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혹 명성을 좋아하는 혐의가 없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마음에 진실이 없으면 그 진실을 더욱 권면하고 행실에 실효가 없으면 더욱 그 실효를 책려해야 한다. 만약 명성을 좋아하는 혐의를 피한다면 선(善)을 행할 길이 없으니 어찌 이것을 혐의하여 마땅히 해야 할 일까지 함께 폐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일찍이 '안색은 온화하게 한다'주 134)는 것과 '안색은 장엄하게 한다'주 135)는 것이 서로 배치되는 것으로 의심하였는데, 오랫동안 공력을 들인 뒤에야 용모를 장엄하게 하는 것이 안색을 온화하게 하려는 생각 밖에 있는 것이 아니고, 마음을 수렴하고 총괄하여 한 몸의 생리(生理)를 두루 흘러 통하게 하면 지각(知覺) 또한 날로 열린다는 것을 비로소 알았다. 이를 아울러 선생에게 아뢰니 선생이 답하기를 "그것은 자신이 겪어본 가운데서 나온 것이니 매우 좋다."라고 하였다. 대개 그 마음 씀이 주밀하고 상세하며 향상되기를 잊지 않음이 이와 같았다. 항상 일찍 일어나서 세수를 하고 머리를 빗으며, 의관을 바르게 하고 시선을 존엄하게 하며,주 136) 엄연히 생각하는 듯하고주 137) 어깨와 등을 세워 곧게 하였는데, 비록 심히 노쇠하고 병이 들어도 오히려 그렇게 하였다. 혹자가 이르기를 "병중에 고통이 없으십니까?"라고 하니 공이 말하기를 "내가 평일에 앉은 것이 이와 같고, 병 때문에 마음을 더한 것은 아니지만 또한 어찌 병 때문에 스스로 나태해지겠는가."라고 하였다. 형 하나와 동생 하나가 모두 일찍 죽었다. 자매와는 거리가 아주 가까운 것은 아니었는데 해마다 두 세 번은 가서 보고 정성을 다하였다.주 138) 종부제(從父弟)인 구계(九溪) 창림(昌林)이 학업을 같이하고 방소를 함께 하면서 늙도록 변함이 없었다. 족대부(族大父)인 석당공(石塘公)이 일찍부터 유림에 명망이 있어서 어려서부터 복종하고 섬겼다. 무릇 서로 아는 사이에는 태어남에는 서로 기뻐하고 죽음에는 서로 슬퍼하였으며 예의(禮意)를 빠뜨림이 없었다. 친구가 죽자 유고를 수습하고 책을 만들어 그 아들에게 주었다. 그 어린 고아를 가르치면서 잘하면 가상히 여기고 능하지 못하면 안타깝게 여기면서 또 말하기를 "유명(幽明) 간에 도리를 저버릴까 두렵다."라고 하였다. 무사(無邪) 박(朴) 공은 어렸을 때의 숙사(塾師)였는데 해마다 반드시 성묘를 하였고, 각 집안의 상자에서 유문(遺文)을 찾아 점검하여 한데 모아주 139) 책을 만들고 손수 2본을 베껴서 그 집안 후손에게 돌려주고 하나는 집에 보관하였다. 허름한 토담집은 쓸쓸하였고 비바람도 가릴 수 없었으며, 척박한 전답은 죽을 만들어 먹기도 부족하였으나 여유롭게 처신하였다. 일찍이 말하기를 "선비라면 마땅히 지푸라기 하나라도 취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가슴에 새겨야 하니, 그런 뒤에야 비로소 천사만종(千駟萬鍾)주 140)이라도 돌아보지 않는 바가 있게 된다.주 141)"라고 하였다. 공이 문장을 지을 때는 말은 뜻을 전달하고주 142) 이치는 순조로우면 그뿐이고, 번잡하게 수식하는 것은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공은 일찍이 선비들이 사부(詞賦)를 두고 경쟁하여 본원(本源)을 버리는 것을 병통으로 여겨 "어찌 정주(程朱)를 배워놓고 끝내 잡역부가 되겠는가. 반마가(班馬家)주 143)에 들어가 상객이 되고 싶지 않다."라고 까지 하였으니 대개 당시의 폐단을 구제하며 억제하는 뜻이었다. 이 때문에 당시 사람들이 공의 문장을 두고 '포백(布帛) 같은 글이요 숙속(菽粟) 같은 맛이다.'주 144)이라고 추켜세웠으니, 선조를 드러내서 후세에 전하려는주 145) 자는 반드시 공의 신실한 문장을 얻으려고 하였다. 일찍이 말하기를 "어렸을 때 항상 병기(兵機)ㆍ산술(筭術)ㆍ율력(律曆)ㆍ풍토(風土) 따위에 마음을 썼으나, 뒤에 자신을 닦고 삼가는 것에도 미처 겨를이 없음을 깨닫고 점차 중지하였고 지금은 바로 냉담해졌다."라고 하였다. 운치 있는 물가나 이름난 산에서 바람을 쐬며 읊기를 좋아하였고, 따듯한 봄과 서늘한 가을에는 벗들을 이끌고 술을 갖고 가서 날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그 그윽이 쌓인 심정을 쏟아냈으니 그 흉금이 초탈하여 세상일에 얽매이지 않았기에 그런 것이다. 그 평일의 서소(書疏) 중에 강해(講解)한 문답으로서 간직할 만하고 빠뜨릴 수 없는 것 및 그 성품과 행실을 살펴볼 수 있는 것은 모두 원집(原集)에 실려 있으므로 지금은 우선 생략한다. 배우는 데 뜻을 둔 자라면 어찌 이 글들을 가지고 상고하지 않겠는가. 헌규(憲圭)와 문인들이, 내가 선사(先師)의 손자로서 공의 덕을 아는 데에는 의당 나만한 사람이 없다하여 공의 덕을 기술하는 글을 부탁하기에 삼가 그 문인이 기록한 것을 근거로 하고 대략 산삭과 윤색을 가하여 이상과 같이 서술하였다. 공이 일찍이 김대곡(金大谷)의 전(傳)을 지어 말하기를 "정주(程朱)로부터 세대가 멀어지자 의론하는 문파가 많아지니 후생(後生) 만학(晩學)들이 딱히 추향할 곳이 없다. 대공지정(大公至正)하고 여러 학설을 모아 절충함으로써 정주(程朱)의 강토를 예전처럼 넓고 말끔히 만든 사람으로 말하자면 노선생(老先生)이 바로 그런 분이다. 비록 그렇지만 선생의 문하에 공이 없었다면 천고토록 전해지지 않은 비결과 한 마음에 홀로 터득한 묘리를 거의 거두어 품고서 말할 곳도 없었을 것이니 이것은 천재일우의 기이한 만남이라고 할 만하다. 그 평생을 살펴보건대, 가리켜 논의할 만한 출사(出仕)를 조금도 하지 않고 초연히 멀리 떠나서 시종 허물이 없던 사람이 누구인가? 온갖 고난을 겪고 극성스런 야유에도 호탕하여 안색에 기미도 없던 사람이 누구인가? 박문(博文)과 약례(約禮)주 146)를 함께 닦아 나가면서 천덕(天德)과 왕도(王道)에 체(體)도 있고 용(用)도 있던 사람이 누구인가? 해박하되 잡스럽지 않고, 무성하되 어지럽지 않으며, 긍지가 있되 넘치지주 147) 않았고, 간결하되 오만하지 않아서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도 모르게 숙연히 공경하고 기쁘게 복종하게 한 사람이 누구인가?"라고 하였다. 공과 대곡(大谷)ㆍ애산(艾山)은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였으며 함께 진전(眞傳)을 전수받아서 성대하게주 148) 유문(儒門)의 의표가 되었다. 그 대곡(大谷)의 전(傳)을 쓴 것은 바로 자기의 전(傳)을 쓴 것이었으니, 내가 무슨 흠잡을 것이 있겠는가. 삼가 이것으로 끝을 맺고 묘도에 새길 자가 채택하기를 고하노라.

숭정후 5주(崇禎後五周) 임자년(1912, 순종5) 동지(冬至)주 149)에 행주(幸州) 기우만(奇宇萬)이 쓰다.
주석 17)호조 판서
원문의 '지관(地官)'은 호조(戶曹)의 별칭이다.
주석 18)금성(錦城)
전라도 나주(羅州)의 옛 이름이다.
주석 19)낭주(朗州)
전라도 영암(靈巖)의 옛 이름이다.
주석 20)금릉(金陵)
전라도 강진(康津)의 옛 이름이다.
주석 21)수직(壽職)
조선 시대에 노인을 우대하여 주는 벼슬로, 노인직(老人職)이라고도 한다. 매년 정월에 80세 이상인 관원과 90세 이상인 서민(庶民)에게 은전(恩典)으로 벼슬을 내려 주었다.
주석 22)존양(尊攘)
중화(中華)를 존중하고 이적(夷狄)을 배척하는 것을 말한다.
주석 23)어지럽게 노는
원문에는 '繳緩'으로 되어 있으나 문의가 통하지 않아, 《송사집(松沙集)》 권48 〈일신재정공행장(日新齋鄭公行狀)〉에 '繳繞'으로 되어 있는 것을 따라 번역하였다.
주석 24)아침저녁으로 보살펴 드리며
원문의 '정성(定省)'으로, 자식이 이른 아침에 부모님의 침소를 찾아 문안을 올리고 저녁에 잠자리를 정돈해 드리는 것을 말한다. 《예기(禮記)》 〈곡례(曲禮)〉에 "모든 자식이 된 사람의 예는 겨울이면 어버이를 따뜻하게 해 드리고 여름이면 서늘하게 해 드리며, 저녁에는 잠자리를 편안하게 보아 드리고 새벽에는 안부를 살피는 것이다.〔凡爲人子之禮, 冬溫而夏凊, 昏定而晨省.〕"라고 하였다.
주석 25)찬 지……살폈다
부모의 음식을 잘 살피는 것을 말한다. 《예기(禮記)》 〈문왕세자(文王世子)〉에에 "음식을 올릴 적에 반드시 차가운지 따뜻한지의 적절함을 살피며, 상을 물리거든 드신 음식을 물으셨다.〔食上, 必在視寒暖之節, 食下, 問所膳.〕"라고 하였다.
주석 26)가슴 속의 경구(警句)
원문의 '회중간(懷中簡)'은 '가슴 속의 간서(簡書)'라는 뜻으로 여기서는 경계하는 문구의 의미이다. 《시경》 〈출거(出車)〉에 "국사가 어려움이 많아 편안히 쉴 수가 없네. 어찌 돌아가고 싶지 않겠는가마는 이 간서가 두렵다네.〔王事多難, 不遑啓居. 豈不懷歸, 畏此簡書.〕"라고 한 것을 원용한 것이다.
주석 27)사조(詞藻)
시가(詩歌)나 문장을 말한다.
주석 28)공령(功令)
과거시험에 쓰이는 시문을 말한다.
주석 29)사상(沙上)
스승인 노사 기정진이 있는 장성(長城)을 말한다.
주석 30)틈……물
작고 하찮은 지식을 비유한 것이다.
주석 31)생지(生知)
'생이지지(生而知之)'의 준말로, 태어나면서부터 이치를 아는 매우 뛰어난 자질을 말한다. 《논어》 〈계씨(季氏)〉에 "태어나면서 아는 자는 상등(上等) 자질이고, 배워서 아는 자는 그 다음 자질이고, 많은 노력을 들여 배우는 자가 또 그 다음 자질이니, 많은 노력을 들여 배우지 않으면 백성으로서 하등(下等)의 자질이 된다.〔生而知之者, 上也; 學而知之者, 次也; 困而學之, 又其次也, 困而不學, 民斯爲下矣.〕"라고 하였다.
주석 32)일신우신(日新又新)
《대학장구》 전(傳) 2장에, 은(殷)나라 탕왕(湯王)의 반명(盤銘)을 끌어와 "진실로 어느 날에 새로워졌거든 나날이 새롭게 하고 또 나날이 새롭게 하라.〔苟日新, 日日新又日新.〕"라고 한 것을 바탕으로 삼아 이렇게 말한 것이다.
주석 33)무궁한……한〔仰鑽瞻忽欲從末由〕
안연(顔淵)이 일찍이 공자의 도(道)가 한없이 깊고 커서 따라가고자 해도 할 수 없음을 말한 것인데, 정의림이 노사의 학문에 대해 감탄한 것을 이에 비유한 것이다. 《논어》 〈자한(子罕)〉에 안연(顔淵)이 크게 탄식하며, "부자(夫子)의 도(道)는 우러러볼수록 더욱 높고 뚫을수록 더욱 견고하며, 바라볼 때 앞에 있더니 홀연히 뒤에 있도다. 부자께서는 차근차근히 사람을 잘 이끄시어 문(文)으로써 나의 지식을 넓혀 주시고 예(禮)로써 나의 행동을 요약해 주시므로 공부를 그만두고자 해도 그만둘 수 없어 나의 재주를 다하니, 부자의 도가 내 앞에 우뚝 서 있는 듯한지라, 그를 따라가고자 하나 어디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仰之彌高, 鑽之彌堅, 瞻之在前, 忽焉在後. 夫子循循然善誘人, 博我以文, 約我以禮, 欲罷不能, 旣竭吾才, 如有所立卓爾, 雖欲從之, 末由也已.〕"라고 하였다.
주석 34)내가……따르는〔從吾所好〕
부귀(富貴)와 같은 외물에 연연하지 않고 의리(義理)를 따를 것임을 말한 것이다. 《논어》 〈술이(述而)〉에 "부를 추구해서 얻을 수 있다면 비록 말채찍을 잡는 자의 일이라도 내가 또한 그것을 하겠지만, 추구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내가 좋아하는 바를 따르리라.〔富而可求也, 雖執鞭之士, 吾亦爲之, 如不可求, 從吾所好.〕"라고 하였다.
주석 35)강직하면서도 부드러우니
원문의 '간간은은(侃侃誾誾)'으로 아랫사람과 대화를 할 때 강직하고 윗사람과 말할 때는 부드럽게 간쟁하는 것을 말한다. 《논어》 〈술이(述而)〉에 공자가 향당(鄕黨)에 있을 때 "조정에서 하대부와 말을 할 적에는 강직하게 하고, 상대부와 말을 할 적에는 부드러운 태도로 간쟁하였다.〔朝與下大夫言, 侃侃如也, 與上大夫言, 誾誾如也.〕"라고 하였는데, 주자가 《허씨설문(許氏說文)》을 인용하여 "간간은 강직(剛直)한 것이요, 은은은 화열(和悅)하되 시비는 다투는 것이다.〔許氏說文, 侃侃, 剛直也, 誾誾, 和悅而諍也.〕"라고 하였다.
주석 36)항상……하였다
스승으로 하여금 만족스러운 웃을 짓게 하였다는 뜻이다. 《논어》 〈양화(陽貨)〉에 공자가 제자 자유(子游) 다스리는 무성(武城)에 가서 현가 소리를 듣고 "공자가 빙그레 웃으셨다.〔夫子莞爾而笑.〕"라고 하였다.
주석 37)성(性)과 천도(天道)
《논어》 〈공야장(公冶長)〉에서 자공이 "부자의 문장은 들을 수 있었지만, 부자께서 성과 천도를 말씀하시는 것은 들을 수 없었다.〔夫子之文章, 可得而聞也, 夫子之言性與天道, 不可得而聞也.〕"라고 하였다.
주석 38)자운(子雲)과 요부(堯夫)
자운은 한(漢)나라 양웅(揚雄)의 자(字)이고, 요부는 송(宋)나라 소옹(邵雍)의 자인데, 보통 당대(當代)에는 알아줄 사람이 없어서 후세에 제대로 평가해 줄 만한 식견이 높은 사람을 기다린다고 할 때 거론되는 인물들이다. 전한(前漢)의 양웅(揚雄)이 《태현경(太玄經)》을 지어 놓고 "후세에 양자운(揚子雲 양웅)이 나면 반드시 이 책을 좋아할 것이다." 하였고, 송대의 소옹(邵雍)이 《황극경세(皇極經世)》를 지어 놓고 "요부(堯夫 소옹)가 후세의 요부에게 드린다."라고 했다.
주석 39)일관(一貫)의 요지
일이관지(一以貫之)로, 일리(一理)가 만사(萬事)를 관통한다는 말이다. 공자가 일찍이 증자(曾子)를 불러 "삼(參)아, 내 도는 한 가지로 꿰뚫고 있다.〔參乎, 吾道, 一以貫之.〕"라고 하니, 증자가 이 의미를 즉시 이해하여 의심 없이 대답하기를 "예, 옳습니다."라고 하였다. 《論語 里仁》
주석 40)양정(兩程)
송(宋) 나라의 정호(程顥)ㆍ정이(程頤) 형제를 말한다. 《태극도설(太極圖說)》을 지은 주돈이(周敦頤)의 제자이다.
주석 42)기류(氣類)
지기(志氣)가 비슷한 동류로, 《주역》 〈건괘(乾卦) 문언(文言) 구오(九五)〉의 "같은 소리끼리는 서로 응하고, 같은 기운끼리는 서로 찾게 마련이니,……이는 각자 그 비슷한 것끼리 어울리기 때문이다.〔同聲相應, 同氣相求,……則各從其類也.〕"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주석 43)조화로운 음악 가락
두 사람 사이가 음악이 화음을 이룬 것 같았다는 것이다. 원문의 '궁상(宮商)'은 오음(五音) 가운데 궁음(宮音)과 상음(商音)으로, 흔히 음률이나 악곡을 뜻하는 말로 쓰이고, '율려(律呂)'는 육률(六律)과 육려(六呂)로 역시 음악의 뜻으로 쓰인다.
주석 44)먹고……가까웠다
매우 가난했으나 안빈낙도의 삶을 살았다는 뜻이다. 《논어》 〈안연(顔淵)〉에 공자가 안연을 칭찬하며 말하기를 "한 그릇의 밥과 한 표주박의 물로 누추한 시골에서 생활하는 것에 대해 다른 사람들은 그 근심을 견뎌 내지 못하는데, 안회는 그 즐거움을 고치지 않으니, 어질구나, 안회여!〔一簞食一瓢飮, 在陋巷, 人不堪其憂, 回也不改其樂, 賢哉回也!〕"라고 하였고, 또 《주역》 〈계사전(繫辭傳)〉에는 "안연은 도에 가까울 것이다.〔顔氏之子, 其殆庶幾乎.〕"라고 하였다.
주석 45)겸손하여
원문의 '죽죽(粥粥)'으로, 본래 유약하여 무능한 듯 보이는 것을 말하는데 겸손한 모양이다. 《예기》 〈유행(儒行)〉에 "선비는 의관이 바르고 동작이 신중하며……나아가는 것을 어렵게 여기고 물러나는 것을 쉽게 하며 유약하여 무능한 듯이 보이니, 그 용모에 이와 같은 점이 있다.〔儒有衣冠中, 動作愼,……其難進而易退也, 粥粥若無能也, 其容貌有如此者.〕"라고 하였다.
주석 46)반증
원문의 '반우(反隅)'로, 하나의 사실을 가지고 나머지를 유추해서 아는 것을 말한다. 《논어》 〈술이(述而)〉의 "한 귀퉁이를 들어보였는데 나머지 세 귀퉁이로 반증하지 못하면 다시 말해주지 않는다.〔擧一隅, 不以三隅反, 則不復也.〕"라는 공자(孔子)의 말에서 나온 것이다.
주석 47)귀천(貴賤)
원문의 '헌지(軒輊)'로 수레가 앞이 높고 뒤가 낮은 것을 헌(軒)이라 하고, 수레가 앞이 낮고 뒤가 높은 것을 지(輊)라고 한다. 《시경》 〈유월(六月)〉에 "융거가 이미 편안하니 지(輊)와 같고 헌(軒)과 같다.〔戎車旣安, 如輊如軒.〕"라고 하였다. 여기서는 귀천(貴賤)을 비유한 것이다.
주석 48)하늘
원문의 '피창(彼蒼)'으로 《시경》 〈황조(黃鳥)〉에, "저 푸른 하늘이여. 우리 좋은 사람을 죽이도다. 만약 대속(代贖)할 수 있다면 사람마다 그 몸을 백번이라도 바치리라.〔彼蒼者天, 殲我良人. 如可贖兮, 人百其身.〕"라고 하였다.
주석 49)기름에……새기는
수고만 할 뿐, 보람이 없음을 뜻한다. 한(漢)나라 환관(桓寬)의 《염철론(鹽鐵論)》 〈수로(殊路)〉에 "안으로 바탕이 없이 겉으로 문만 배운다면, 아무리 어진 스승이나 훌륭한 벗이 있더라도 마치 기름에 그림을 그리거나 얼음에 조각하는 것과 같아서 시간만 허비하고 보람은 없을 것이다.〔內無其質而外學其文, 雖有賢師良友, 若畫脂鏤氷, 費日損功.〕"라고 하였다.
주석 50)고치실ㆍ좁쌀ㆍ모발〔絲粟毛髮〕
하찮은 것들을 말한다.
주석 51)두공(斗拱)ㆍ빗장ㆍ문설주〔欂櫨店楔〕
건물을 짓는데 필요한 작은 소재들이다.
주석 52)기우(沂雩)
기수(沂水)와 무우(舞雩)를 가리키는데, 초연히 산수 간에 노니는 즐거움을 언급할 때 나오는 지명이다. 《논어》 〈선진(先進)〉에, 공자의 제자 증점(曾點)이 자신의 뜻을 말하라는 공자의 명에 따라 "늦봄에 봄옷이 이루어지거든 어른 대여섯 사람, 동자 예닐곱 사람과 함께 기수에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을 쐬고 시를 읊으면서 돌아오겠습니다.〔暮春者, 春服旣成, 冠者五六人, 童子六七人, 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라고 하였다.
주석 53)석채(舍菜)
석채(釋菜)라고도 하는데, 예전에 학교에 입학할 때 선성(先聖)과 선사(先師)에게 채소류를 제물로 하여 제사를 지내는 전례(典禮)를 이른다.
주석 54)여수(旅酬)
정제(正祭)가 끝난 뒤에, 제사에 참여했던 친족이나 빈객들이 술잔을 들어 술을 마시고, 서로 공경의 예를 표하며, 술잔을 권하는 의례이다.
주석 55)영남(嶺南)
원문의 '교남(嶠南)'으로 조령(鳥嶺) 이남(以南)인 영남(嶺南)을 말한다. 교는 중국의 교령(嶠嶺)으로, 우리나라의 조령을 교령에 비유한 것이다.
주석 56)최계남(崔溪南)
최숙민(崔琡民, 1837~1905)을 말한다. 자는 원칙(元則), 호는 계남(溪南),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 두양리에서 살았다.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에게 수학하였다.
주석 57)경서를……논란하며
많은 선비들이 토론하는 모습을 말한 것이다. "향사례가 끝나고 천자가 정좌하여 직접 강(講)하면 제유가 경서를 지니고 그 앞에서 묻고 논란하는데, 관대를 하고 홀을 꽂고 띠를 맨(搢紳) 사람들로 교문을 에워싸고 구경하는 자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饗射禮畢, 帝正坐自講, 諸儒執經問難於前, 冠帶搢紳之人, 圜橋門而觀聽者蓋億萬計.〕"라는 말이 《후한서》 〈유림열전(儒林列傳)〉 서문에 보인다.
주석 58)추로(鄒魯)
공자(孔子)ㆍ맹자(孟子)의 학문을 말한다. 추(鄒)는 맹자의 출생지이고, 노(魯)는 공자의 출생지이다.
주석 59)더 가르쳐주기를 청하니
원문의 '청익(請益)'으로, 《논어》 〈자로(子路)〉에 "자로가 정사를 묻자,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솔선할 것이며 부지런히 해야 한다' 하자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시기를 청하자,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라고 하셨다.〔子路問政, 子曰, 先之勞之, 請益曰, 無倦.〕"라고 한 데서 유래한 말이다.
주석 60)당우(唐虞)의 임금
요(堯) 임금과 순(舜) 임금을 가리킨다. '당우'는 당요(唐堯)와 우순(虞舜) 시대로, 곧 요순(堯舜) 시대를 가리킨다.
주석 61)고기직설(皐虁稷契)
현신(賢臣)들을 가리킨다. 순 임금의 신하로 법의 집행을 맡았던 고요(皐陶), 전악(典樂)으로서 교육과 음악을 전담한 기(虁), 후직(后稷)으로서 농업을 담당한 직(稷), 민정 장관이라 할 사도(司徒)의 직책을 관장한 설(契)을 가리킨다.
주석 62)토론
원문의 '도유우불(都兪吁咈)'로, 본래 군주와 신하가 서로 자유롭게 정사를 의논하고 의견을 교환한다는 뜻이다. 도(都)와 유(兪)는 찬성의 의미, 우(吁)와 불(咈)은 반대의 의미를 나타내는 감탄사이다. "우가 말하였다. '아, 훌륭합니다. 제이시여. 자리에 있을 때를 삼가소서.' 제순(帝舜)이 말씀하셨다. '그 말이 옳다.'〔禹曰都帝, 愼乃在位, 帝曰兪.〕"라고 하였다. 또 《서경》 〈요전(堯典)〉에 "제가 말씀하셨다. '아니다. 그 말이 옳지 않다.'〔帝曰吁, 咈哉.〕"라고 한 예가 있다.
주석 63)천하에……않는다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군자에게 세 가지 즐거움이 있으니, 천하에 왕 노릇하는 것은 여기에 끼지 않는다. 부모가 다 생존하고 형제가 무고한 것이 첫 번째 즐거움이요, 위로는 하늘에 부끄럽지 않고 아래로는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은 것이 두 번째 즐거움이요, 천하의 영재를 얻어서 교육시키는 것이 세 번째 즐거움이다.〔君子有三樂, 而王天下不與存焉. 父母俱存, 兄弟無故 一樂也, 仰不愧於天, 俯不怍於人, 二樂也, 得天下英才而敎育之, 三樂也.〕" 한 데서 온 말이다.
주석 64)수사(洙泗)
수강(洙江)와 사강(泗江)으로, 중국 산동성(山東省) 곡부(曲阜)를 지나는 강이다. 공자의 고향에 이곳과 가깝고 또 그 강물 사이의 지역에서 제자들을 가르쳤기 때문에, 보통 공자의 학문 내지 학파를 뜻하는 말로 쓰인다.
주석 65)돌아가시고
원문의 '전영(奠楹)'은 두 기둥 사이에서 제사를 받는 것으로, 죽음을 에둘러 표현할 때 쓰는 말이다. 공자가 두 기둥 사이에 앉아서 전(奠) 올리는 것을 받은 꿈을 꾸고 자공(子貢)에게 자신이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였는데, 병으로 누운 지 7일 만에 별세한 데서 유래하였다. 《禮記 檀弓上》
주석 66)칠십 제자
공자의 제자 70명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노사의 걸출한 문하생을 뜻하는 말이다.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70명의 제자가 공자에게 열복(悅服)하였다.〔七十子之服孔子也.〕"라는 말이 나온다.
주석 67)떨어져……죄
무리와 헤어져 지낸다는 뜻이다. 공자의 제자 자하(子夏)가 서하(西河)에 은둔해 있었는데, 아들이 죽자 너무 슬퍼한 나머지 실명(失明)하였다. 증자(曾子)가 문병을 오자, 자하는 죄도 없는 자신에게 불행이 찾아왔다고 한탄하였다. 이에 증자가 자하의 죄를 낱낱이 따지자, 자하가 그 말에 수긍하면서 "내가 지나쳤다, 내가 지나쳤다. 내가 벗들을 떠나 홀로 머물러 지낸 지가 너무 오래되었다.〔吾過矣, 吾過矣. 吾離羣而索居, 亦已久矣.〕"라고 하였다. 《禮記 檀弓上》
주석 68)병자년(1876, 고종13)에……교통
고종 13년(1876)에 우리나라와 일본 양국 간에 맺은 병자수호조약(丙子修好條約)으로 부산ㆍ인천ㆍ원산의 3항(港)을 개항하고 서울에 일본 공사관을 설치하게 된 일을 말한다.
주석 69)유인(幽人)의 정조〔幽人之貞〕
'유인(幽人)'은 은사(隱士)를 가리킨다. 《주역》 〈이괘(履卦) 구이(九二)〉에 "행하는 도가 평탄하니 그윽한 사람이라야 정하고 길하다.〔履道坦坦, 幽人貞吉.〕"라고 하였는데, 이는 굳센 정조를 지키는 것을 가리킨다.
주석 70)장남헌(張南軒)
남송의 학자인 장식(張栻)의 호로, 자는 경부(敬夫)ㆍ흠부(欽夫)이다.
주석 71)을미년 8월의 사변
1895년 8월 일본이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시해한 사건을 말한다.
주석 72)단발령(斷髮令)
일본이 1895년(고종32) 8월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11월에 단발령을 내린 것을 말한다.
주석 73)질그릇으로……나으며
차라리 정의(正義)를 위해서 죽을지언정 구차히 생명을 보전하기를 원치 않는다는 강한 절의를 비유한 말이다. 《북제서(北齊書)》 권41 〈원경안열전(元景安列傳)〉에 "대장부가 차라리 옥그릇으로 부서짐을 당할지언정, 질그릇으로 온전하기를 바랄 수는 없다.〔大丈夫, 寧可玉碎, 不能瓦全.〕"라고 하였다.
주석 74)물고기도……좋겠는가
생사(生死)의 선택에 있어 구차히 살기보다 떳떳하게 의리(義理)를 따라 죽는 것을 택하는 것을 말한다. 《맹자》 〈고자 상(告子上)〉에, "물고기도 내가 원하고 곰 발바닥도 내가 원하지만 이 두 가지를 모두 가질 수 없다면 물고기를 버리고 곰 발바닥을 가지겠다. 삶도 내가 원하고 의리도 내가 원하지만 이 두 가지를 모두 가질 수 없다면 삶을 버리고 의리를 취하겠다.〔魚我所欲也, 熊掌我所欲也, 二者不可得兼, 舍魚而取熊掌者也. 生亦我所欲也, 義亦我所欲也, 二者不可得兼, 舍生而取義者也.〕"라고 하였다.
주석 75)원수와……하는
원수를 갚고자 하는 뜻을 말한다. 자하(子夏)가 공자에게 부모의 원수에 대처하는 방법을 묻자, 공자가 "거적을 깔고 방패를 베개 삼아 자며 벼슬하지 않고 더불어 천하를 함께하지 않는다. 시장과 조정에서 만나면 병기(兵器)를 가지러 되돌아가지 않고 싸운다.〔寢苫枕干, 不仕, 弗與共天下也. 遇諸市朝, 不反兵而鬪.〕"라고 하였다. 《禮記 檀弓上》
주석 76)청구(靑邱)
우리나라의 이칭이다. 중국의 동쪽에 있고 동방은 오행(五行)에 있어 청색이기 때문에 이렇게 칭한 것이다.
주석 77)일명(一命)의……있는가
'일명(一命)의 군자'는 최하급 관리를 말한다. 주대(周代)의 일명에서 구명(九命)까지의 관계(官階)에서 유래하였다. 최하급의 관직도 하지 않았으니 죽어야 할 의리가 없다는 뜻이다.
주석 78)난신적자(亂臣賊子)는……의리이니
《맹자》 〈등문공 하(滕文公下)〉의 "말로써 양주(楊朱)와 묵적(墨翟)을 막을 수 있는 이라면 성인의 문도이다.〔能言距楊墨者, 聖人之徒也.〕"에 대한 주자의 주석에 "《춘추》의 법도에 따른다면 난신적자는 사람마다 다 토벌할 수 있으니, 꼭 사사(士師)여야 할 필요는 없다.〔如春秋之法, 亂臣賊子, 人人得而討之, 不必士師也.〕"라는 말이 나온다.
주석 79)선유(宣諭)
임금의 유지(諭旨)를 선포하는 것이다.
주석 80)옛사람은……배웠고
한(漢)나라 때 순리(循吏)인 황패(黃霸)가 하후승(夏侯勝)과 함께 3년 동안 감옥살이를 할 때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聞道 夕死可矣〕"라는 말을 인용하면서 간곡히 요청한 결과 하후승에게 《상서(尙書)》를 배워 뒤에 현달했던 고사가 전한다. 《漢書 卷75 夏侯勝傳 卷89 循吏傳 黃霸》
주석 81)배……배웠는데
송나라의 충신 육수부(陸秀夫)가 금(金)나라 군사에게 쫓겨 남쪽 바닷가 애산(厓山)에서 떠돌던 위급한 상황에도 배 안에서 매일 《대학장구(大學章句)》를 써서 어린 황제에게 강독을 권했다. 애산(崖山)의 방어선이 무너지자 먼저 처자식을 빠져 죽게 하고는 자신은 왕을 업고 바다로 뛰어들어 죽었는데, 이때 배 안에서 죽기 직전까지 강독했다고 한다.《宋史 卷451 陸秀夫傳》
주석 82)저들이……손상하겠는가
험담하고 비방하여도 손상을 입힐 수 없다는 말이다. 《논어》 〈자장(子張)〉에 숙손무숙(叔孫武叔)이 공자를 비방하자 자공(子貢)이 "그러지 말라. 중니는 헐뜯을 수 없느니라. 다른 사람의 어짊은 언덕 같아서 넘을 수 있지만 중니는 해와 달 같아서 넘을 수 없느니라. 사람이 비록 스스로 끊고자 하나 해와 달을 어찌 손상하리오. 다만 자기의 역량을 알지 못함을 보일 뿐이로다.〔無以爲也, 仲尼不可毁也. 他人之賢者, 丘陵也, 猶可踰也, 仲尼, 日月也, 無得而踰焉. 人雖欲自絶, 其何傷於日月乎. 多見其不知量也.〕"라고 한 것을 인용하였다.
주석 83)율옹(栗翁)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를 가리킨다.
주석 84)음(陰)이……아니다
이이(李珥)가 〈성호원에 답함〔答成浩原〕〉에서 "음(陰)이 정(靜)하고 양(陽)이 동(動)하는 것은 기틀이 절로 그러한 것이지 시키는 것이 있는 것이 아니다. 양이 동하면 이(理)가 동(動)에 타는 것이요 이가 동하는 것은 아니며, 음이 정하면 이가 정(靜)에 타는 것이요 이가 정하는 것은 아니다.〔陰靜陽動, 機自爾也, 非有使之者也. 陽之動則理乘於動, 非理動也, 陰之靜則理乘於靜, 非理靜也.〕"라고 한 내용이 있다. 《栗谷全書 卷10》
주석 85)피음사둔(詖淫邪遁)
병폐가 있는 4가지 종류의 말을 가리킨다.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나오는 내용으로 지언(知言)에 대한 물음에 대해 맹자(孟子)는 "편벽된 말에 그 가리운 바를 알며, 방탕한 말에 빠져 있는 바를 알며, 부정한 말에 괴리된 바를 알며, 도피하는 말에서 논리가 궁함을 알 수 있다.〔詖辭知其所蔽, 淫辭知其所陷, 邪辭知其所離, 遁辭知其所窮.〕"라고 하였다.
주석 86)전도(顚倒)
저본에는 '顚側'로 되어 있으나 '顚倒'의 오기인 듯하다. 《노사집(蘆沙集)》 제16권 〈외필(猥筆)〉과 《송사집(松沙集)》 권48 〈일신재정공행장(日新齋鄭公行狀)〉에도 '顚倒'로 되어 있다.
주석 87)피음사둔(詖淫邪遁)과 전도(顚倒)되고 창피함
이일분수(理一分殊)의 주리론(主理論)을 주장한 기정진이 《노사집(蘆沙集)》 제16권 〈외필(猥筆)〉에서 "지금 사람들은 '도리(道理)' 두 글자를 아득하여 생각도 논의도 할 수 없는 곳으로 몰아내고, 조금만 발현하고 환히 드러난 것이 있으면 한결같이 기(氣)에 속하게 한다. 이러한 사람은 이기(理氣)를 안다고 하고, 이렇지 않은 사람은 이기를 모른다고 하니, 헛된 이름과 과거의 말로 도를 말하고 이를 말하지만, 그 실상은 기(氣)가 이(理)의 자리를 빼앗아 모든 사물의 본령으로 삼을 뿐이다. 이와 같다면 천하에 다시는 피음사둔이 없을 것이니 전도되고 창피함이 무슨 일엔들 없겠는가. 〔今人驅道理二字於冥漠不可思議之地, 而纔有發見昭著, 一屬之氣. 如此者爲識理氣, 不如此者爲不識理氣, 雖以虛名過去說, 說道說理, 而其實則氣奪理位, 爲萬事本領而已. 若是則天下更無詖淫邪遁矣, 顚倒昌披, 何事不有.〕라고 한 내용을 말한다.
주석 88)온공(溫公)은 맹자(孟子)를 의심했지만
온공(溫公)은 송나라의 사마광(司馬光)으로, 사후 온국공(溫國公)에 봉해졌으므로 사마온공으로 부른다. 맹자(孟子)의 말에 대해 의심스러운 것을 평론하고 산정(刪正)한 《의맹(疑孟)》을 지었다.
주석 89)그의……권했고
사마강(司馬康)은 사마광의 아들로, 철종(哲宗)에게 말하기를 '《맹자》는 글이 가장 순정하고, 왕도(王道)를 진술한 것은 더욱 살펴보기에 마땅합니다.〔孟子爲書最醇正, 陳王道, 尤所宜觀覧.〕'라고 한 내용이 《송명신언행록(宋名臣言行錄)》 후집(後集) 권7에 보인다.
주석 90)유원성(劉元城)
송나라 때의 학자 유안세(劉安世)를 말한다. 원성은 그의 봉호이다. 자는 기지(器之), 사마광(司馬光)의 문인이다.
주석 91)남헌(南軒)은 오봉(五峰)
'남헌'은 송나라의 학자 장식(張栻)으로, 자는 경부(敬夫)이며 남헌은 그의 호이다. '오봉'은 호굉(胡宏, 1106~1161)의 호이다. 그의 자는 중인(仲仁)으로 제자로 남헌(南軒)을 두었다.
주석 92)면재(勉齋)도 혹 고정(考亭)
'면재'는 송(宋)나라 문신 황간(黃幹)이다. 주자(朱子)의 제자이다. 자는 직경(直卿), 호는 면재(勉齋)이다. '고정'은 송(宋)나라 주희(朱熹)가 만년에 거했던 곳으로, 고정서원(考亭書院)의 사액(賜額)을 받으면서 그를 일컫는 말이 되었다.
주석 93)분(分)이 없는 일(一)〔無分之一〕
여기서 말하는 '분(分)'과 '일(一)'은 이일분수(理一分殊)라고 할 때의 이일(理一)과 분수(分殊)를 말한다. 참고로 노사 기정진은 논란이 되었던 〈납량사의(納凉私議)〉에서 분(分)이 없는 일(一)은 있을 수 없다고 하였다. 《노사집(蘆沙集)》 제16권 〈납량사의(納凉私議)〉 참조.
주석 94)오성(五性)
인(仁)ㆍ의(義)ㆍ예(禮)ㆍ지(智)ㆍ신(信)을 말한다.
주석 95)명덕(明德)
《대학장구》 경 1장에서 주희는 "명덕을 밝히는 데에 있고〔在明明徳〕"를 풀이하면서 "명덕은 사람이 하늘에서 얻은 것으로, 허령하고 어둡지 않아 모든 이치를 갖추고 만사에 응하는 것이다.〔明徳者, 人之所得乎天而虚靈不昧, 以具衆理而應萬事者也.〕"라고 하였다.
주석 96)일본만수(一本萬殊)
하나의 근본에서 만 가지 다른 것이 생겨난다는 뜻이다. 공자(孔子)가 일찍이 증자(曾子)에게 이르기를 "삼아, 우리 도는 한 이치로써 오만 일을 관철시키는 것이다.〔參乎 吾道一以貫之〕" 한 데 대하여, 증자가 말하기를 "선생님의 도는 충과 서뿐이니라.〔夫子之道 忠恕而已矣〕"라고 하였는데, 《주자어류(朱子語類)》에 의하면, 충서(忠恕)를 논함에 있어, 서(恕)가 충(忠)에서 분파(分派)되는 것을 가지고 말하기를 "만수가 한 근본이 되는 것과 한 근본이 만 가지로 다르게 되는 것이 마치 한 근원의 물이 흘러 나가서 만 갈래의 지류가 되고, 한 뿌리의 나무가 나서 허다한 지엽이 나오게 되는 것과 같다.〔萬殊之所以一本 一本之所以萬殊 如一源之水流出爲萬派 一根之木生爲許多枝葉〕"고 한 데서 온 말이다. 《論語 里仁》 《朱子語類 卷29》
주석 97)대본달도(大本達道)
대본은 중(中)이고, 달도는 화(和)이다. 《중용장구(中庸章句)》 제1장에 "희로애락의 정이 발하지 않은 상태를 중이라고 하고, 발하여 모두 절도에 맞는 것을 화라고 하니, 중은 천하의 큰 근본이고 화는 천하의 공통된 도이다. 중과 화를 지극히 하면 천지가 제자리를 편안히 하고 만물이 길러진다.〔喜怒哀樂之未發, 謂之中; 發而皆中節, 謂之和. 中也者, 天下之大本也; 和也者, 天下之達道也. 致中和, 天地位焉, 萬物育焉.〕"라고 하였다.
주석 98)벽계(蘖溪)
이덕수(李德壽)의 호이다.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인로(仁老)이다. 선조의 덕으로 직장(直長)을 지내다가 1713년 증광 문과에 급제하여 문의 현감(文義縣監)에 임명되고, 이후 대제학(大提學), 형조 판서(刑曹判書), 이조 판서(吏曹判書) 등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주석 99)도기수역(道器帥役)
'형이상'이 도(道), '형이하'가 기(器), 수(帥)는 이(理), 역(役)은 기(氣)를 말한다.
주석 100)5조약
1905년(광무9) 10월에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하여 강제로 조약(條約)을 체결한 조약을 말한다.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 을사오조약(乙巳五條約) 등으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주석 101)유소(儒疏)
유생들이 연명(連名)하여 올리던 상소를 말한다.
주석 102)접어(鰈魚)의……땅
조선을 비유한 것이다. 우리나라 바다에 접어(鰈魚 가자미)가 난다 하여, 우리 나라를 접해(鰈海)니 접역(鰈域)이니 한다.
주석 103)진(晉)나라가……했는데
노소공(魯昭公) 25년에 소공이 삼가(三家)의 핍박을 받아 제(齊)나라로 피신하였다가 노나라로 돌아올 때, 계씨(季氏)가 제나라에 뇌물을 써서 노 소공이 빨리 들어오지 못하게 한 것을 가리킨다. 《춘추좌씨전》 소공(昭公) 26년의 전(傳)에 "여름에 제후(齊侯)가 소공(昭公)을 노나라로 들여보내고자 하여 신하들에게 노나라 계씨의 뇌물을 받지 말라고 명하였다.……〔夏, 齊侯將納公, 命無受魯貨.……〕"라고 하였다. 그러나 결국 계씨의 가신이 비단 두 필을 말아 폐백을 만들어 제나라 고기(高齮)를 통해 자유(子猶)를 움직여 소공이 순탄히 돌아오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소공은 결국 건후에서 죽었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소공(昭公) 25년~32년조 참조.
주석 104)오랑캐
원문의 '인개(鱗介)'로, 비늘이 있는 물고기와 딱딱한 껍질을 지닌 개충(介蟲)을 가리키는데, 오랑캐를 가리키는 말로도 쓰인다. 《후한서(後漢書)》 권78 〈양종전(楊終傳)〉에 "광무제(光武帝)가 서역(西域)의 나라들과 국교를 단절하여, 개린으로 하여금 우리의 의상으로 바꿔 입지 못하게 하였다.〔光武絶西域之國, 不以介鱗易我衣裳〕"라고 하였는데, 이현(李賢)의 주에, "개린은 먼 오랑캐를 비유한다.〔介鱗, 喻遠夷.〕"라고 하였다.
주석 105)신포서(申包胥)처럼 통곡
'포서(包胥)'는 신포서(申包胥)로, 춘추 시대 초(楚)나라 대부이다. 오자서(伍子胥)가 오(吳)나라 군대를 이끌고 초나라를 공격하여 멸망의 위기에 처하자, 신포서가 진(秦)나라 조정에 구원을 요청하러 가서 7일 밤낮을 통곡하니, 진(秦)나라 애공(哀公)이 감동을 받은 나머지 구원병을 출동시켜 구해 주었던 고사가 전한다. 《春秋左氏傳 定公4年》
주석 106)초(楚)나라
여기서는 조선을 비유한 것이다.
주석 107)침몰
원문의 '육침(陸沈)'으로, 나라가 외적(外賊)에게 침입을 당하여 망함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세설신어(世說新語)》 〈경저(輕詆)〉에 "환공(桓公)이 개연히 이르기를, '드디어 신주(神州)로 하여금 육침(陸沈)되게 하여 백 년 동안 폐허가 되게 하였으니, 왕이보(王夷甫) 등 여러 사람들은 그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桓公慨然曰, 遂使神州陸沈, 百年丘墟, 王夷甫諸人, 不得不任其責.〕'"라고 하였다.
주석 108)서산(西山)으로……뜻
무도한 세상에서 살 수 없어 차라리 목숨을 끊겠다는 의지를 말한 것이다. 원문의 '嗟殂'는 '嗟徂'의 뜻과 같다. '서산(西山)'과 '차조(嗟徂)의 탄식'은 백이(伯夷)와 숙제(叔齊)가 수양산, 즉 서산(西山)에 은거하여 고사리를 캐먹고 살다가 굶어 죽기에 이르러 노래를 지었는데, "저 서산에 올라, 그 고사리를 캐도다.……아아 떠나가리라, 천명이 쇠하였구나.〔登彼西山兮, 采其薇矣.……於嗟徂兮, 命之衰矣!〕"라고 한 데서 인용한 것이다. 《史記 卷61 伯夷列傳》. '동해(東海)'와 '욕도(欲蹈)의 뜻'은 전국 시대 제(齊)나라의 고사(高士) 노중련(魯仲連)이 만약 포악무도한 진(秦)나라가 황제로 천하에 군림할 경우에는 "동해(東海)를 밟고 죽을지언정 차마 그 백성이 될 수는 없다.〔有蹈東海而死耳, 吾不忍爲之民也.〕"라고 말한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 《史記 卷83 魯仲連鄒陽列傳》
주석 109)자정(自靖)
자신의 분의(分義)에 맞게 의리를 실천한다는 뜻이다. 주(紂)의 폭정으로 은(殷)나라가 망해 가자 미자(微子)가 어찌해야 하느냐고 묻자, 기자(箕子)는 "스스로 분의에 편안하게 하면서 사람마다 선왕에게 뜻을 바쳐야 할 것이니, 저는 떠나가 은둔하는 것을 고려하고 있지 않습니다.〔自靖, 人自獻于先王, 我不顧行遯.〕"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書經 微子》
주석 110)입명(立命)
몸을 닦고 천명을 기다리는 것을 말한다. 《맹자》 〈진심장구 상(盡心章句上)〉에 "그 마음을 보존하여 그 성을 기름은 하늘을 섬기는 것이요, 요절하거나 장수하는 것에 의심하지 않고 몸을 닦고 천명을 기다림은 명을 세우는 것이다.〔存其心, 養其性, 所以事天也, 夭壽不貳, 修身以俟之, 所以立命也.〕"라고 하였다. 이에 대한 주희의 집주에 "입명은 하늘이 부여해 준 것을 온전히 보존하여 인위로 해치지 않음을 이른다.〔立命, 謂全其天之所付, 不以人爲害之.〕"라고 하였다.
주석 111)재난에 빠져
원문의 '혼점(昏墊)'으로, 재해를 입어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것을 말한다. 《서경》 〈익직(益稷)〉에 "홍수가 하늘까지 닿아 질펀하게 산을 삼키고 언덕을 넘으니 백성이 재난에 빠졌다.〔洪水滔天, 浩浩懷山襄陵, 下民昏墊.〕"라는 말이 나온다.
주석 112)두어(蠧魚)
책을 갉아먹는 좀인데, 여기서는 서적을 뜻한다.
주석 113)자정(自靖)
자정은 자신의 분의(分義)에 맞게 의리를 실천한다는 뜻이다. 주(紂)의 폭정으로 은(殷)나라가 망해 가자 미자(微子)가 어찌해야 하느냐고 묻자, 기자(箕子)는 "스스로 분의에 편안하게 하면서 사람마다 선왕에게 뜻을 바쳐야 할 것이니, 저는 떠나가 은둔하는 것을 고려하고 있지 않습니다.〔自靖, 人自獻于先王, 我不顧行遯.〕"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書經 微子》
주석 114)석과(碩果)
과일나무의 높은 가지 끝에 달려 있는 한 개의 큰 과일로서, 종자가 되어 훗날을 기약할 수 있는 군자를 지칭할 때 많이 쓰인다. 《주역》 〈박괘(剝卦) 상구(上九)〉에 "큰 과일이 먹히지 않았다.〔碩果不食.〕"라고 하였다.
주석 115)사영(四營)
훈련원(訓鍊院)ㆍ금위영(禁衛營)ㆍ어영청(御營廳)ㆍ총융청(摠戎廳)을 이른다.
주석 116)두심언(杜審言)이……받는다
생사는 운명이라는 것을 해학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당(唐)나라 두심언(杜審言)의 병이 위독해졌을 때, 송지문(宋之問) 등 동료 문인들이 찾아가서 위문하자, "조화 소아에게 몹시 괴롭힘을 당하고 있으니, 더 무슨 말을 하겠는가〔甚爲造化小兒相苦, 尙何言.〕"라고 대답했다는 고사가 있다. 《新唐書 卷201 杜審言列傳》
주석 117)나의……유쾌하다
죽어서 본래의 자리로 되돌아가는 것이니 죽음을 유쾌하게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주석 118)치관(緇冠)
선비들이 평상시에 쓰는 검은 베로 만든 관을 이른다.
주석 119)환질(環絰)
저본의 '環經'은 '環絰'의 잘못인 듯하다. 한 가닥의 삼줄을 바탕으로 하고 다시 그것을 다른 삼줄로 감아 상복의 허리나 머리에 두르는 띠를 말한다. 《禮記 雜記》
주석 120)가업을 잘 계승하였고
원문의 '극가(克家)'로, 조상의 사업과 집안일을 잘 계승할 수 있는 훌륭한 자제를 지칭하는바, 《주역》 〈몽괘(蒙卦) 구이(九二)〉에 "구이는 몽매함을 포용해주면 길하고 부인의 말을 받아들이면 길할 것이니, 자식이 집안일을 잘하도다.〔九二, 包蒙吉, 納婦吉, 子克家.〕"라고 한 데에서 나온 말이다.
주석 121)상응하는 예우
원문의 '선가(善價)'로, 좋은 값인데 능력에 상응하는 예우를 말한다. 《논어》 〈자한(子罕)〉에 자공(子貢)이 "아름다운 옥이 여기에 있다면 궤에 담아서 감춰 두시겠습니까, 아니면 좋은 값을 받고 파시겠습니까?〔有美玉於斯, 韞櫝而藏諸? 求善賈而沽諸?〕" 하니, 공자가 "팔겠다, 팔겠다. 그러나 나는 좋은 값을 기다리는 사람이다.〔沽之哉! 沽之哉! 我待賈者也.〕"라고 하였다.
주석 122)가난한 선비
원문의 '조대(措大)'로 큰일을 조치할 수 있다는 뜻에서 가난한 선비를 가리킨다.
주석 123)차라리……않은
이 말은 여대림(呂大臨)이 명도(明道) 정호(程顥)의 애사(哀詞)를 지으면서 "차라리 성인을 배우다가 이르지 못할지언정 한 가지 선으로 이름을 이루려고 하지 않았고, 차라리 한 사람이 은택을 입지 못하는 것으로 자신의 병통을 삼을지언정 일시적인 이익으로 자신의 공을 삼으려고 하지 않았다.〔寧學聖人而未至, 不欲以一善成名, 寧以一物不被澤, 爲己病, 不欲以一時之利爲己功.〕" 한 데서 인용한 것이다. 《近思錄 觀聖賢》
주석 124)치택(致澤)
치군택민(致君澤民)의 준말로 임금을 요순(堯舜) 같은 성군(聖君)으로 만들고 백성에게 은택(恩澤)을 끼치는 것을 말한다.
주석 125)비단옷의……드러났다
군자(君子)의 성대한 도(道)는 은은하게 가리어져 있으나 날로 밝게 드러난다는 뜻이다. 《중용장구》 제33장에 "《시경》에 '비단옷을 입고 홑옷을 덧입는다.' 하였으니, 이는 문채가 너무 드러나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군자의 도는 어두운 듯하지만 날로 드러나고, 소인의 도는 반짝 빛나지만 날로 없어진다.〔詩曰, 衣錦尙絅, 惡其文之著也. 故君子之道, 闇然而日章, 小人之道, 的然而日亡.〕"라고 하였다.
주석 126)홀로……하면서
원문의 '독선(獨善)'인데, 독선기신(獨善其身)의 준말로, 세상에 나가 뜻을 펴지 못하면 자기 일신을 선하게 하는 것이다.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옛사람은 뜻을 얻으면 은택이 백성에게 가해지고 뜻을 얻지 못하면 몸을 닦아 세상에 드러나니, 곤궁하면 홀로 그 자신을 선하게 하고 영달하여 뜻을 펴면 천하를 선하게 하였다.〔古之人得志, 澤加於民, 不得志, 修身見於世. 窮則獨善其身, 達則兼善天下.〕"라고 하였다.
주석 127)지경(持敬)
공경하는 마음을 항상 지니고서 지켜 나가는 것을 말한다. 성리학에서 심성을 수양하는 대표적인 방법이다.
주석 128)가까이서……취하여
원문의 '근취원취(近取遠取)'로, 《주역》 〈계사전 하(繫辭傳下)〉에서 복희씨(伏羲氏)가 천지를 관찰하여 팔괘(八卦)를 만들 때를 설명하면서 "가까이로는 자신에게서 취하고 멀리로는 물건에서 취한다.〔近取諸身, 遠取諸物.〕"라고 하였다.
주석 129)명백히 살피고
원문의 '근근(斤斤)'으로, 《시경》 〈집경(執競)〉에 "저 성왕과 강왕으로부터 곧 사방을 소유하시니 밝게 살피는 그 현명한 분이로다.〔自彼成康, 奄有四方, 斤斤其明.〕"라고 하였다. 모전(毛傳)에서는 "'근근(斤斤)'은 명백히 살피는 것이다.〔斤斤, 明察也.〕"라고 하였다.
주석 130)피부(皮膚)처럼 표피적인 학문
'피부(皮膚)'는 표피적인 천근한 학문을 비유한 것이다. 《문자(文子)》 〈도덕(道徳)〉에, 노자가 말하기를 "상등의 학문은 정신으로 듣고 중등의 학문은 마음으로 듣고 하등의 학문은 귀로 들으니, 귀로 듣는 자는 학문이 피부에 있고 마음으로 듣는 자는 학문이 살에 있고 정신으로 듣는 자는 학문이 골수에 있다. 〔上學, 以神聽; 中學, 以心聽; 下學, 以耳聽. 以耳聽者, 學在皮膚; 以心聽者, 學在肌肉; 以神聽者, 學在骨髓.〕"라고 하였다.
주석 131)후생 소년들로서 받은 기품이 완후(完厚)한 자
저본에는 "得於天性, 以知後生少年, 受氣完厚者"로 되어 있으나 문세가 순하지 않아서 "後生少年受氣完厚者"로 되어 있는 《송사집(松沙集)》 권48 〈일신재공행장(日新齋鄭公行狀)〉을 따라 번역하였다.
주석 132)궁격(窮格)의 공부
궁(窮)은 거경궁리(居敬窮理)를 뜻하고, 격(格)은 격물치지(格物致知)를 뜻하는데, 거경궁리는 잠시도 쉬지 않고 마음을 집중하여 원리를 규명한다는 뜻이고, 격물치지는 실제적인 사물을 통하여 이치를 궁구함으로써 온전한 지식에 도달하는 것을 말한다.
주석 133)공부를……있는
원문의 '공견(攻堅)'은 학문을 잘 하는 것을 뜻하는 말로, 《예기》 〈학기(學記)〉에 "학문을 잘하는 사람은 마치 목수가 견고한 나무를 다듬듯이 한다.〔善問者, 如攻堅木.〕" 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주석 134)안색은 온화하게 한다
원문의 '색온(色溫)'으로, 군자가 생각하는 아홉 가지 일 즉 구사(九思) 가운데 "안색은 온화하기를 생각한다〔色思溫〕"는 것을 말한다. 《論語 季氏》
주석 135)안색은 장엄하게 한다
원문의 '용장(容莊)'으로, 구용(九容) 즉 군자가 갖추어야 할 아홉 가지 몸가짐 가운데 '안색은 장엄하게 한다〔色容莊〕'는 것을 말한 것이다. 《禮記 玉藻》
주석 136)의관을……하며
《주자어류》 권12에 "경에 대한 설은 많은 말이 필요 없다. 단지 '정제엄숙'과 '엄위 엄각'과 '동용모 정사려'와 '정의관 존첨시'와 같은 이 몇 마디 말에 대해 충분히 음미하면서 실제로 공부를 해 나간다면, 이른바 '직내'와 '주일'의 상태가 자연히 이루어져서 굳이 안배할 필요도 없이 몸과 마음이 숙연해지며 안과 밖이 여일하게 될 것이다.〔敬之說, 不必多言. 但熟味整齊嚴肅. 嚴威儼恪. 動容貌. 整思慮. 正衣冠. 尊瞻視. 此等數語. 而實加功焉. 則所謂直內. 所謂主一. 自然不費安排. 而身心肅然. 表裏如一矣.〕"라고 하였는데, 정제엄숙(整齊嚴肅) 이하 정의관(正衣冠) 존첨시(尊瞻視)까지의 말들은 정이(程頤)가 주일(主一)하는 방법으로 제시한 것들이다.
주석 137)엄연히 생각하는 듯하고〔儼若思〕
《예기(禮記)》 〈곡례(曲禮)〉에 "공경하지 않은 것이 없어, 엄연히 무엇을 생각하는 것처럼 한다.〔毋不敬 儼若思〕"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주석 138)정성을 다하였다
저본에는 '致欸洽'으로 되어 있으나 문맥상 '致款洽'의 잘못인 듯하다.
주석 139)한데 모아
저본에는 '裒粹'로 되어 있으나 《송사집(松沙集)》 권48 〈일신재공행장(日新齋鄭公行狀)〉을 참고하여 '裒稡'로 고쳐 번역하였다.
주석 140)천사만종(千駟萬鍾)
사(駟)는 네 마리의 말이 끄는 수레를 뜻하며 종(鍾)은 용량의 단위로 한 섬에 해당한다. 따라서 천사만종은 아주 많은 봉록을 가리킨다.
주석 141)지푸라기……된다
신념이 확고하여 부귀공명 따위에 흔들리지 않는다는 말이다. 맹자가 "이윤(伊尹)이 유신(有莘)의 들에서 밭을 갈면서 요순의 도를 좋아하여 그 의가 아니고 그 도가 아니면 천하로써 녹을 주더라도 돌아보지 않고 말 천사를 매어 놓아도 돌아보지 않았으며, 그 의가 아니고 그 도가 아니면 지푸라기 하나라도 남에게 주지 않았으며 지푸라기 하나라도 남에게서 취하지 않았다.〔伊尹耕於有莘之野, 而樂堯舜之道焉. 非其義也, 非其道也, 祿之以天下, 弗顧也, 繫馬千駟, 弗視也. 非其義也, 非其道也, 一介不以與人, 一介不以取諸人.〕"라고 하였다. 《孟子 萬章上》
주석 142)말이 뜻을 전달하고
원문의 '사달(辭達)'로, 《논어》 〈위령공(衛靈公)〉에 공자가 "말은 뜻을 전달할 뿐이다.〔辭達而已矣.〕"라고 하였는데, 문장은 아름다운 수사보다는 의미를 정확하게 전달하는 데 중점을 두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주석 143)반마가(班馬家)
문장가를 말한다. 반마(班馬)는 《한서(漢書)》를 쓴 반고(班固)와, 《사기(史記)》를 쓴 사마천(司馬遷)을 병칭한 말로, 한나라 때의 대표적인 문장가들이다.
주석 144)포백(布帛)……맛이다
평범하면서도 맛이 깊고 세상에 큰 도움이 되는 문장을 말한다. 포백(布帛)은 옷감이고 숙속(菽粟)은 곡물인데, 일상생활의 필수품으로써 없어서는 안 될 물건이다. 《송사(宋史)》 권127 〈정이열전(程頣列傳)〉에 정자를 찬미하여 "그 말씀의 아름다움이 포백과 숙속 같았다.〔其言之旨, 若布帛菽粟然.〕"라고 하였다.
주석 145)후세에 전하려는
저본에는 '乖後'로 되어 있으나 《송사집(松沙集)》 권48 〈일신재공행장(日新齋鄭公行狀)〉을 참고하여 '垂後'로 고쳐 번역하였다.
주석 146)박문(博文)과 약례(約禮)
학문을 배워 식견을 넓히고, 그 지(知)를 예(禮)로 요약하여 행(行)으로 실천하는 것을 말한다. 《논어》 〈자한(子罕)〉에 안연(顔淵)이 스승인 공자의 도에 대해서 감탄하며 술회한 뒤에 "선생님께서는 차근차근 사람을 잘 이끌어 주시면서, 학문으로 나의 지식을 넓혀 주시고 예법으로써 나의 행동을 단속하게 해 주셨다.〔夫子循循然善誘人 博我以文 約我以禮〕"라고 하였다.
주석 147)넘치지
저본에는 "隘"로 되어 있으나, 《대곡유고(大谷遺稿)》 권6 〈傳〉과 《송사집(松沙集)》 권48 〈일신재공행장(日新齋鄭公行狀)〉에는 "溢"로 되어 있어 고쳐 번역하였다.
주석 148)성대하게
저본에는 '蒙然'으로 되어 있으나 《송사집(松沙集)》 권48 〈일신재정공행장(日新齋鄭公行狀)〉을 참고하여 '菀然'으로 고쳐 번역하였다.
주석 149)동지(冬至)
원문의 '양복일(陽復日)'로, 순음(純陰)에서 양(陽)이 다시 회복되기 시작한 날인데 동지(冬至)를 가리킨다.
行狀
公諱義林字季方。學者稱日新先生。鄭氏其先光山人。高麗贊成諱臣扈其肇祖。監司諱麟晉。始仕國朝。應敎諱熊。節度諱應奎。司直諱演贈地官卿。三世連顯。三傳至諱纘。泊於仕進。遯錦城。世篤儒行。曾祖諱埰移朗州。祖諱加錫移金陵。考諱濟玄。兩世壽通政。忠養二親。敎子有法度。嘗遊漢師。謂名利誤人。吾道一脈。當在林下。遂斷當世意。耕讀爲家計。妣珍原朴氏父致聖。韋南熙中后。貞淑有禮。憲宗乙巳十一月甲子。生公于綾之大德第。夢月入懷中。生而聰穎。自幼目無睇視。常合眼默坐曰。眼爲一身上日月。日月晦蝕。天地否閉。甫能言。傍聽塾兒讀小學。能會多少義。乃曰灑掃爲治平之本。手執灑掃惟謹。 嘗從長老聞華夷尊攘。輒問均是人也。何分華夷。曰地有內外。俗有美惡。默念良久曰。人於一身上。亦有華夷。美者爲華。惡者爲夷。人當先尊攘一身上華夷。聞者大驚異之曰。嘗出外遇雨。羣兒皆奔走。獨徐緩自如曰。吾心參天地。吾性同聖賢。其重何如。而輕走失容耶。每出遊遇羣兒繳繞。則必遄返曰父母所戒。在長老之側。遲遲而歸曰父母所樂。常曰。自心其心。不心父母心。非佳子弟。愉婉定省。在視寒暖。前後喪皆毁甚。課日上塚。世傳先稿。蒐粹珍藏焉。始上學授孝經。逐句另解。解輒軆驗。通政公知其志尙有在。不使他業閒之。且曰人貴有業。業貴有成。受爲懷中𥳑。處靜攻苦。忘食忘寢。羣書羣經。講貫詳密。弱冠前後。學已頭顱矣。於是以詞藻爲浮華。功令爲自衒。冷淡爲家計。講誦爲茶飯。味人所不味。樂人所不樂。而見識已卓然於時儒矣。于時儒術分裂 性命橫決 理氣汩亂 上天失主宰本源爲虛位衆嘗遊歷諸家 以究緖餘 而病其無眞知實見 而喙口爭爲二十四戊辰。拜蘆沙先生於沙上。一見而亟稱曰。天資樂易。識見已正。且曰沙彌來叩病僧扉。眉目通明可學機。吾於季方云爾。言下迎刃。掃諸家之釁粃。溯聖哲之異源。充然而歸曰。世之以師道自任者。皆承襲差繆。祇見一邊記聞講說。不過爲隙光勺水淺淺排着。而惟先生資近生知。道本中庸。直接朱子。建立大軆。言言無非自本源上流出來。如大廈千萬間。貯藏許多金帛。隨人所求而用之不竭。善觀而善言。一見而遽以是稱。非自家所造之崇深。所得之眞切。道不得如此。嘗慨然歎曰。古今許多有志者。得受敎之地。而猶不能洞豁貫熟者。只是閒斷爲病。日新又新。爲對病之藥。以日新二字揭座右。常目而致力焉。其無上事而慨然。與顔子喟然者。一串貫來。而其下說話。罔非仰鑽瞻忽。欲從末由之至意。透得妙契關。盖將在此。而因以書稟于先生。答曰。不亦善夫。此正與世相忘。從吾所好之一副機括。但於此處確定脚跟。始可議到。槪亦許之深也。同門有金大谷錫龜,鄭艾山載圭最相善。蓋其志尙同而見解亦同也。退而講解。進而就正。誾誾侃侃。常發夫子之莞爾。而一日出篋藏凉議猥筆以示之。蓋先生之蘊奧所發。而所謂性與天道。及門諸子所不容易得聞。而三君子至是得聞之。先生之意槪曰 世無眞切見解。以待後世之子雲堯夫。而三子者知見。吾可以無隱乎爾也。一貫之旨。惟曾子聞之。太極之妙。惟兩程聞之。謝者以是爲先生眞傳者。槪是耳。與艾山相距十舍。每師門不期而遇。非止一再。蓋其氣類相感。其應有如此者。其一場該洽。不啻宮商律呂。傍人亦見其津津。先生謂大谷曰。二君同姓而同志。居里同名。每此同席。可記之以爲異日故事。蓋喜之無已也。家窶甚。不恒厥居。簞瓢不啻屢空。而晏然不以爲意。不改其樂。殆庶乎。而遠近學者。信從負笈。以致黌舍不能容。師道之望自歸。而粥粥然若虛若無。導迪之方。不以是而或歇后。委曲懇到。誘掖激勵。漸磨成就。或使之靜坐而軆驗。或使之辨論而反隅。步趣可望則喜形於色。鈍滯難開則若癏在己。造詣精深者。贊其莫安於小成。局定偏見者。諭之使進於圓通。曉譬昭然。聽者易曉。枯渴者浹洽。繳繞者脫灑。切近喫緊而不欲巧曲穿鑿。寬坦明快而不欲活略流蕩。嘗曰看書。須要貼心切己。意味自然深長。與其泛濫閑汩而無所歸宿。曷若致精據要。得寸得尺。爲有進步處。讀書豈欲爲文人才子。爲覓第干祿計耶。只是一字有一字之益。一日有一日之進。悠悠萬事。無足置胸中。得喪軒輊。任諸彼蒼。志不立。則一時之善心。不過爲畫脂鏤冰。羣經之格言要語。不過爲文具書肆。人得片金零玉。猶愛護而恐其失墜。此身何等至重。而不盡愛護之方乎。一言一行之不謹。一刻一時之不謹。皆自失其身。自慢者人必慢之。自棄者人亦棄之。義理無限。事業無竆。做得七八分工夫。爲七八分人。做得十分工夫。爲十分人。自家地位高低。在自家用力之多寡。吾輩旣不得有爲於世。則所可爲者。讀聖賢書。守聖賢道。以與朋友共之。又以傳於後。以存斯文一脈於無竆。此不可看作第二義。重任非隻肘可運。奔波非捧土可塞。雖絲粟毛髮之賢。欂櫨店楔之材。積積愈奇。交驩相得然後。可以收拾得多少世事。裨補得多少世敎。大開口說理說氣。不如就日用事物。尋求其是。決去其非。似是理氣實事。蓋公躬行心得。發之爲訓。因流溯源。其踐履之實。槪可覰見矣。嘗與知舊生徒。登瑞石絶頂。風詠而歸。悠然有沂雩之樂。多士築亭。設講扁用詠歸。奉五聖四賢遺眞。每春秋舍菜。旅酬相揖。禮畢聽講。經生學者環侍質問。有三代之遺風。一遊嶠南。會艾山及崔溪南諸公。門人從者數十人。溪艾亦各有弟子陪從。名亭勝地。屨及殆遍。所至執經問難。答問之餘。講劘道理。觀者以爲鄒魯遺風。盡在是矣。後又約溪艾及其族兄月波會方丈之鍾山。嶺湖士。設講請益。三四君子。折衷答問。上自先王典禮。以至爲學節度。靡不說到。權三山基德並記爲鍾山講錄。是日酒半。公揚觶而言曰。孔門諸子。得大聖以爲師。得大賢以爲友。問於師講於友。想像其至樂。千載猶感。士之生於今日。雖不得唐虞之君。與皐夔稷契。都兪吁咈於亭午之日。以孟氏所謂王天下不與三樂。其輕重有分。寧可遺於彼。不可失於此。吾輩得師如蘆沙先生。得友如大谷艾山諸君子。薰蒸涵濡。親見洙泗之盛於去古已遠之日。是一生難再之遇。而忽焉先師奠楹。大谷繼逝。溪艾諸君子。又遠在十舍之外。大義恐乖於七十子之身。離索亦不免西河之罪。願結鍾山之會。以爲一年一遇之地。衆皆唯唯。而世亂而未諧。士友恨之。國朝自丙子外交之後。海寇交通。深懷世道之憂。固守幽人之貞。每風雨夜。衣服冠而坐。大誦張南軒平生風雨夕每念名節難之句。悽然若將泣下。乙未有八月之變。繼有毁髮脅制。奮然曰。此時事只有捐殉一路而已。馳書艾山。約與會議。丙申春。余以擧義討復。發檄綾城。答檄有曰瓦而全。不如玉而碎。魚之欲。曷若熊之美。余擊節而起曰。此吾友鄭日新口氣。非義節桹於心。忠勇發於義。則做不得此句來。及後叩之。果是也。及聞其檄召一方人。作誓言曰。我東方苟有一分人心者。孰不有共天之羞。况今四海淨髮。髮獨靑邱一片。得保撮髻。此髻若亡。則萬世否泰消息絶矣。難之者謂彼方爲刀。我方爲肉。必無幸矣。未有一命之君子。何有於是。公凜然曰。亂賊人人討之。春秋之義論義而不論力。君子之仗義。豈復有希覬哉。時余駐陣在錦城館。匹馬來會。與論方略。歸猶屢書相勉。及移陣光山館。公與多少志士。將同余于光山。爲死生計。聞宣諭罷兵而止。續有義擧諸人逮捕脅令。蓋賊臣挾天矯詔爲此也。余貽書諸同義。此非吾君之意。就戮無義。匿跡待時。爲深得計。公亦云爾。棲屑山間。聞余被逮。訛言。遂還家待逮曰義無獨生。旋聞爲訛而事亦寢不問。以訓迪後輩爲己任。謂生徒曰。古人獄中猶尙書。舟中猶大學。豈可以世亂而忘講學乎。定爲一朔一講之規。或山齋或溪亭。終日無倦。時有嶺人權鳳煕,崔東敏輩。承望時儒風旨。謂凉議猥筆。犯斥先賢。相與紛紜。公謂彼雖欲自絶。何損於日月之明。而頭戴先賢。眩惑後輩。不無其害。不可以不辨。乃曰先生於栗翁。篤信而尊慕。攷諸文集可見。但於陰陽動靜。其機自爾。非有使之一句語有所未契。每欲活看。以流行一邊。及見世儒執此一段。爲主氣證案。推原辨之謂發之太快。而其曰詖淫邪遁。顚倒猖披。所以明後人之弊也。溫公疑孟。而其子康勸講於經筵。劉元城其門人而嗜如膾炙。南軒辨五峯差處。勉齋或有違於考亭定說。朱子謂周子似黃老。謂程子有黃老流風。此亦可以誣毁其父師及前賢律之乎。前賢之偶失照管。後賢辨而明之。乃十分尊慕之道。此豈權崔輩之所知乎。通告嶺中章甫。使明知其罪。又會湖儒於詠歸亭。懇懇辨論曰。吾黨之士。試觀今日所辨。如理氣之說。其得失不可委之於後。當卽下究覈。若己無知見。隨人毁譽。則因仍苟且之頃。安知此身不陷於偏側之科乎。此則身家大計。豈止爲了此一事而已耶。又聞有時儒若而人。從權崔之餘論。有所記辨。駁爲條辨。 遂條辨駁。全文在原集。其末段曰。近世主氣之論不一。有以太極爲無分之一。有以五性爲帶氣之物。有以明德爲形而下。言一本萬殊則萬殊爲氣。言大本達道則達道爲氣。陰陽五行謂非本然。人物偏全謂非定分。主宰妙用。條理段落。一歸重於氣。氣奪理位。則臣奪君。子奪父。妻奪夫。小人奪君子。夷狄奪華夏。亦一例事。先師爲是之懼。發揮剔抉。次第折衷。而一邊之論猶齗齗。多見其不知量也。或問今日東方。有主氣一學。所從遊不可不愼。當何擇處。曰蘗溪李先生。其斥邪衛正之策。光明磊落。與我先師。同條共貫。所著雅言。所以自作主宰。明道器帥役之分。斥夫一種明氣之論。又與先師。若出一口。信知天下之道一而已。及聞賊臣賣國。勒成五條。憂憤忿草疏。首言島夷可攘而不可和。國賊可斬而不可貸。中言毅宗殉社之義。以堅上心。末言效死不去之義。旣成。聞儒疏不納。慨然焚稿。已而聞勉菴艾山。約會闕里。爲擧義之計。曰吾事有託矣。居無何。闕約亦沮。拍案而歎曰。鰈魚背上一片地。爲彼入網鱗哉。晉爲華夏盟主。而受季氏之賂。使召公卒於乾侯。今安知絶域鱗介之類。獨不醉於彼賂乎。我國之士論民論。亦必無所忌憚。民無向上。人化爲獸。一天之下。大倭小倭。包胥之哭。亦無其地。存楚之計。何望有日。憂忿成疾。盖以天下陸沈。無可往矣。居室爲西山。坐處爲東海。嗟殂之嘆。欲蹈之志。屢形於色辭。一日口占曰。蘆沙夫子丙寅疏。大義森嚴日月明。當時若用二三策。安有今朝社稷傾。又自古喪邦孰若今。天飜地覆日星沈。惟有杜門自靖計。西山東海不須尋。顧謂門弟子曰。此吾立命之地。門弟子請寫眞。搖手曰。先師之所不屑。矧今寰宇昏墊。塚骨無地。何必以虛影留之。門人謂此生徒事。非先生事。私相與寫出。後覺之。索之書其上曰。爾生可惻。宜爾置之蠧魚之側。及聞無邦之報。潸然下淚曰。古之亡國也。可死之義一。臣死於社稷。今之亡國也。可死之義二。人獸之判。人不可以不死。只當掩戶塞竇。衣吾衣存吾髮守吾道。爲自靖計而已。諸生問疾而來。強病扶坐曰。君輩能親近書冊乎。海枯山崩。此業不可忘。碩果消息。不由吾黨。將委諸何人。有從傍微禀者曰。光澤山人。不被執於四營已潰之後。隱其跡袍吾道。不必作必死計。曰君子之處義。時而已。何可同也。人非翼天鱗海之物。今日豈有不被執之術。光澤山人亦人其日奈何。疾革。弟子五六人侍。公曰杜審言言爲造化所苦。吾亦云爾。然吾死固快活。吾死之後。君輩能不忘吾平日勸勉之言乎。命正席整緇冠。恬然而逝。時庚戌十月十日癸酉。門人白巾環絰。葬薪山後坤原。奠誄相屬於道。夫人驪興閔氏致煥女。柔嘉有內相。先公圽。葬某山一男尙默早卒。三女適光山李進休洪州宋光壽密陽朴敬東。孫二男。憲圭克家。範圭。一女適南平文濟俊。門弟子收拾其遺文。剞劂已畢。又草其言行之著於平日者。蓋所謂善觀而善言者。若曰淸粹溫直。和嚴溫莊。器量寬弘。表裏泂澈。成童前後。已負時望。而養德日茂。眞誠歲積。及登師門。得其眞詮。獨立昭曠。喫緊活潑。懷抱才具。可以經世需時。而善價不至。雖不得發於事業。而蘊之爲德行者。約綽可見。見其外者以爲勅躬一措大。聞其論者以爲讀經一老生。而其眞知而實見者以爲寧學聖人而未至。不欲以一善成名。志在致澤而不行。不欲小用其道。韜光鏟采。錦絅日章。雖其獨善竆居。而其明正學正士趨。羽翼斯文。其功爲何如哉。以敏底質。做鈍底工。用寬快心。着細密地。主理爲宗計。持敬作生涯。從容中有深思量。平淡中有眞滋味。其執心如滄海雖關。撓棹不停則可達其岸。泰山雖屹。運步不駐則可躋其頂。孤軍遇勁敵。舍死向前。敵不死則我死。牛毛不厭其細。蠶絲不厭其密。或正倒看。或離合看。常用極辛苦不快活工夫。近取遠取。條緖斤斤。正義傍義。界限井井。積累之至。渙然如冰釋。洽然如膏潤。彼用工於皮膚。責效於朝暮者。何能髣髴其壼奧也。嘗曰吾稟質甚癯。小少多疾。不能努力趲進。而粗識文字。略曉道理者。潛思玩索。得於天性。以知後生少年受氣完厚者。加以竆格之工。則於進道也不難矣。晩年。又着心於朱書曰。衰甚非血戰攻堅時節。而思索一路。較昔無減。但摧頹之甚。不能力行。爲可歎。可歎每會生徒。講義習禮之外。無餘事。或謂彼在會者。未必皆有誠心。好名或不無其嫌。公曰。心有未誠。益勉其誠。行無實效。益責其效。若避好名之嫌。則無爲善之路。豈嫌於是而幷廢其所當爲者耶。嘗疑色溫容莊或相背。用力之久。始知容莊不在思溫外。收斂管攝。使一身生理。周流通徹。則知覺亦曰開。並擧似於先生。答曰。此是自身經歷中出。甚善。盡其用心周詳。不忘向上。有如此者。常夙興盥櫛。正衣冠尊瞻視。儼然若思。肩背聳直。雖衰病之甚猶然。或謂病裏得無苦惱。曰吾平生所坐如此。非以病而加之意也。亦何以病而自惰。一兄一弟皆早夭。姊妹相距非甚近。歲二三往見。致款洽。從父弟九溪昌林。同業共方。至老無替。族大父石塘公早有儒望。自少服事。凡於相知。生相慶而死相哀。禮意無闕。朋友死。收遺墨。編摩而遺其子。訓其孤幼。嘉善而矜不能。且曰。恐負幽明。無邪朴公。童子時塾帥。歲必展墓。搜檢遺文於各家巾衍。裒粹成袠。手寫二本。歸其家孫。一藏于家。環堵蕭然。不蔽風雨。薄田不足以供饘粥。而處之裕如。嘗曰。士當以一介不取意思。鏤在肝膈上。方於千駟萬鍾。有所不顧。其爲文章。辭達理順。枝蔓雕飭。所不屑焉。嘗病時士競詞藻遺本源。至謂寧學程朱。卒爲廝役。不欲入班馬家作上客。蓋救時抑揚之意也。是以當時以布帛之文菽粟之味推許之。而闡先乖後者。必欲得其信筆也。嘗曰小少嘗用心於兵機筭術律曆風土之類。後覺自己修勅。有不暇及。漸次銷歇。至今直是冷淡耳。韻水名山。雅好風詠。春暄秋凉。挈朋攜酒。竟曰而歸。以陶寫其幽菀。盖其襟懷飄灑。不爲世故所惹絆者然也。其平日書疏中講解答問。可有而不可闕者。與其照管性行。皆載在原集。今姑略之。有志於學者。盍就而攷諸。憲圭與諸門人。以宇萬爲先師之孫。知德宜莫余若。屬筆於狀德。謹据其門人所記而略加刪潤。序次如右。公嘗傳金大谷。有曰程朱世遠。議論多門。後生晩進。莫適所向。而若其大公至正。集衆折衷。使程朱疆土。依舊廓淸。老先生其人也。雖然若先生之門。未有公則千古不傳之訣。一心獨得之妙。幾於卷而懷之。無可告語。而此可謂千載奇遇。觀其平生。無小小出脚。可以指議。而超然遐擧。始終無累者何人。千辛萬苦。極其揶揄。而蕩蕩然無幾微色者何人。博文約禮。交修並臻。而天德王道有軆有用者何人。博而不雜。繁而不亂。矜而不隘。簡而不傲。使人不覺肅然而敬。怡然而服者何人。蓋公與大谷,艾山。一而二。二而一。同受眞傳。蒙然爲儒門之表率。其所以傳大谷者。適所以自傳也。吾何間然。謹以是終焉。以告表隧者採焉。
崇禎後五周壬子陽復日幸州奇宇萬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