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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신재 신종록 서(日新齋信從錄序)

일신재집(日新齋集) / 일신재신종록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22.TXT.0001
일신재 신종록 서
성학(聖學)주 1)에는 연원이 있으니 수사(洙泗)주 2)에서 시작하여 염락(濂洛)주 3)에서 성대했다. 세도(世道)의 명암(明暗)과 국가의 성쇠(盛衰)가 여기에서 비롯되지 않음이 없다. 이는 실로 천지의 원기(元氣)요 정맥(正脈)이니 그 뜻이 어찌 무겁게 않겠는가? 우리 선생은 노문(蘆門)주 4)이 선성(先聖)을 잇고 후학을 인도하는주 5) 때를 맞아 입실조과(入室操戈)주 6)하여 천인성명(天人性命)주 7)의 심오한 말과 은미한 뜻을 홀로 터득하고 묵묵히 깨달았다. '이일(理一)과 분수(分殊)는 서로 포함하고, 만수(萬殊)와 일본(一本)이 두루 융화한다.주 8) 이(理)가 장수(將帥)이고 기(氣)는 역졸(役卒)이니 주가 되는 것은 이(理)에 있다.'라는 이 적료(寂廖)한 몇 마디는 뭇 성현들의 비건(秘鍵)이다. 오직 선생이 마음으로 이해하고 몸으로 체득하여 융통하고 활발하여 좌로 가도 우로 가도 근원을 만나니, 그 높은 조예와 바른 행실은 대곡(大谷)주 9)ㆍ애산(艾山)주 10) 두 옹과 함께 염문(濂門)의 양정(兩程)주 11)에 비견되었다. 다만 때가 어긋나고 명(命)이 어그러져 세상에 큰일을 할 수 없으니 광채를 숨기고서 후생 계도를 자기의 임무로 삼았다. 남녘의 선비들로 가까이 있는 사람들은 기뻐하고 멀리 있는 사람은 찾아오니주 12) 인도하고 격려하여 점차 연마하여 성취시켰다. 둔하고 막혀 열어주기 어려운 자는 점차 달통(達通)의 경지에 나아가게 하고, 조예가 정밀하고 깊은 자는 작은 성취에 안주하지 않게 하였다. 혹 정좌(靜坐)하고 체험하게 하고 혹은 변론하고 반증주 13)하게 하여 각자 그 재질(才質)에 따라 계도하였다. 다만 문하(門下)의 생도들이 비록 독실한 바탕이 없지 않더라도 작은 성취에 안주하면 도의 극치에 나아가기를 추구할 수 없다. 더구나 다시 스승이 돌아가신주 14) 후 떨어져 산주 15) 것이 이미 오래되어 대의(大義)가 장차 어그러지고 선생의 가르침이 쓸어버린 듯 없어지게 된다면 어찌 탄식하고 애석해하지 않겠는가? 제생(諸生) 중에 의론하는 자가 있어서 말하기를 "우리 동문(同門)의 선비들이 이미 선생의 도를 계승할 수도 없고 또한 장차 옛날 수업하던 의리도 잊어버릴 것이니, 감히 선현들의 〈문생록(門生錄)〉을 본떠서 〈수업록(受業錄)〉을 만든다면 장차 제생을 흥기시키고 도를 추구하는 뜻에 도움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오호라! 우리 동문 사람들은 속유(俗儒)들의 문구(文具)에 급급해하는 것을 능사(能事)로 여기지 말고, 이제부터 더욱 더 격려하여 그 책을 책으로 여기고 그 도(道)를 도로 여겨서주 16) 광명정대한 영역을 끝까지 궁구한다면 후일에 야사씨(野史氏)가 〈유학연원편(儒學淵源編)〉에 채록해 넣을 것이니 어찌 다만 〈종유급문록(從遊及門錄)〉이 되는데 그치겠는가? 〈신종록(信從錄)〉을 장차 출판하게 되니 선생의 행장(行狀) 등 문자를 책의 첫머리에 놓아서 후생들이 덕을 상고하는 터전으로 삼노라.

정묘년(1927) 6월 상순에 문인 제주(濟州) 양회락(梁會洛)이 삼가 쓰다.
주석 1)성학(聖學)
공자(孔子)의 학문을 말한다.
주석 2)수사(洙泗)
수수(洙水)와 사수(泗水)를 가리킨다. 공자는 수수와 사수 사이에서 제자들을 모아 강학하였다고 한다. 《예기(禮記)》 〈단궁 상(檀弓上)〉에 "나와 너는 수수와 사수 사이에서 부자(夫子)를 섬긴다.〔吾與女事夫子于洙泗之間.〕"라고 하였다. 이후 '수사(洙泗)'는 공자와 유가(儒家)의 대칭으로 쓰인다.
주석 3)염락(濂洛)
염(濂)은 염계(濂溪)로 주돈이(周敦頤)가 살았던 곳이고, 낙(洛)은 정호(程顥)와 정이(程頤)가 살았던 낙양(洛陽), 송대의 성리학을 지칭한다.
주석 4)노문(蘆門)
노사(蘆沙)인 기정진(奇正鎭)의 문파를 말한다. 기정진(1798~1879)의 본관은 행주(幸州), 자는 대중(大中), 호가 노사이다. 송대(宋代)의 성리학을 독자적으로 연구함으로써 대성하였다. 성리학의 6대가(六大家)로 일컬어진다.
주석 5)선성(先聖)을……인도하는
원문의 '계개(繼開)'로, 과거 성현의 학문을 잇고 앞으로 올 후학(後學)의 길을 열어 준다는 뜻이다. 주자(朱子)가 〈중용장구서(中庸章句序)〉에서 공자의 덕을 찬양하면서, "옛 성인을 잇고 후대의 학자를 열어 줌은 그 공이 요순보다도 낫다.〔繼往聖開來學, 其功反有賢於堯舜者.〕"라고 하였다.
주석 6)입실조과(入室操戈)
본래 상대의 논리를 써서 상대를 공격하는 경우를 비유하는 말로 쓰이는데 여기서는 스승의 학문을 배운 것을 말한다. 후한(後漢) 때에 하휴(何休)의 저술을 정현(鄭玄)이 반박하자, 하휴는 이를 보고 "정강성(鄭康成 정현)이 내 집에 들어와 내 창을 들어서 나를 공격하였구나.〔康成入吾室, 操吾矛以伐我乎.〕"라고 탄식하였다고 한다. 《後漢書 卷65 鄭玄列傳》
주석 7)천인성명(天人性命)
천도(天道)와 인사(人事), 인간의 본성과 천명을 말한다.
주석 8)이일(理一)과……융화한다
이치는 하나이면서 현상은 만 가지로 다른 것으로, 성리학의 '이일분수(理一分殊)'의 이론을 말한 것이다. 《性理大全 理氣 總論》
주석 9)대곡(大谷)
김석귀(金錫龜, 1835~1885)이다. 자는 경범(景範), 호는 대곡(大谷)이다. 본관은 김해(金海)이다. 정재규(鄭載圭), 정의림(鄭義林)과 함께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노사학파의 3대 제자로 불렸다. 문집으로 《대곡선생문집》이 있다.
주석 10)애산(艾山)
정재규(鄭載圭, 1843~1911)이다. 자는 영오(英五) 또는 후윤(厚允), 호는 노백헌(老柏軒)ㆍ애산(艾山), 본관은 초계(草溪)이다.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의 문인이다. 당시 국권이 일제의 손에 넘어가는 시기였던 만큼, 벼슬은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저술과 후진 양성에 주력하였다. 문집으로는 《노백헌집》이 있다.
주석 11)염문(濂門)의 양정(兩程)
'염문(濂門)'은 송나라 때 성리학을 창도한 주돈이(周敦頤)의 염계학파를 말한다. 염계(濂溪)는 주돈이의 호이다. 신유학의 기초 이론을 정리하였다. '양정(兩程)'은 주돈이의 제자인 정호(程顥)ㆍ정이(程頤) 형제를 일컫는 말이다.
주석 12)가까이……찾아오니〔近悅遠來〕
초(楚) 나라 섭현(葉縣)의 윤(尹)이 공자에게 정치에 대해서 묻자, 공자가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 기쁜 마음으로 복종하고 멀리 있는 사람들이 사모하여 찾아오게 해야 한다.〔近者悅, 遠者來.〕"라고 한 말이 《논어》 〈자로(子路)〉에 나온다.
주석 13)반증
원문의 '반우(反隅)'로, 하나의 사실을 가지고 나머지를 유추해서 아는 것을 말한다. 《논어》 〈술이(述而)〉에 "한 모퉁이를 가르쳐 주었는데 나머지 세 모퉁이를 유추하여 반증하지 못한다면 다시 가르쳐 줄 수 없다.〔擧一隅不以三隅反, 則不復也.〕"라고 하였다.
주석 14)스승이 돌아가신
원문의 '산퇴(山頹)'로, 태산(泰山)이 무너졌다는 말인데 스승의 죽음을 말한다. 공자(孔子)가 자신이 별세할 꿈을 꾸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 뒷짐을 지고 지팡이를 짚은 채 문 앞에서 한가로이 거닐며 노래하기를 "태산이 무너지겠구나. 들보가 부러지겠구나. 철인이 죽게 되겠구나.〔泰山其頹乎, 梁木其壞乎, 哲人其萎乎.〕"라고 하였다. 이후 태산이 무너진다는 것으로 스승이나 철인의 죽음을 의미하게 되었다. 《禮記 檀弓上》
주석 15)떨어져 산
원문의 '이삭(離索)'으로, 친구들과 떨어져 홀로 생활하는 것을 말한다. 《예기》 〈단궁 상(檀弓上)〉에 "자하(子夏)가 말하기를 '내가 벗을 떠나 쓸쓸히 홀로 산 지 또한 이미 오래이다.〔吾離群而索居, 亦已久矣.〕' 하였다." 하였다.
주석 16)그……여겨서〔書其書道其道〕
경서(經書)를 소중히 여기고 그 도(道)를 따라 행하라는 뜻이다.
日新齋信從錄序
聖學之有淵源。始於洙泗。而盛於濂洛。世之晦明。國之汚隆。未嘗不由於此。此實天地之元氣正脈。其義豈不重哉。惟我先生。當蘆門繼開之日。入室操戈。天人性命之奧言微旨。獨契黙悟。理分相涵。萬一圓融。理帥氣役。所主在理。此寂廖數語。爲千聖秘鍵。而惟先生。會之心而體之身。融通活潑。左右逢原。其造詣之高。踐履之正。與大谷艾山兩翁。擬之於濂門兩程。但時乖命舛。不得有爲於世。鞱光鏟采。以開迪後生爲己任。南方之士。近悅遠來。誘掖澈勵。漸摩成就。鈍滯難開者。使之漸進於圓通。造詣精深者。使之莫安於小成。或使之靜坐而體驗。或使之辨論而反隅。各隨其才質而導迪之。但脚下諸生。雖不無篤實之資。而安於小成。不能求造道之極。況復山頹之後。離索已久。大義將乖。使先生之敎。將歸於掃如。豈不歎惜哉。諸生中有議者。以爲吾同門之士。旣無以承先生之道。而亦將忘舊日受業之義。敢效先賢門生之錄。以修受業之錄。則將與起諸生。而有助於求道之志矣。嗚呼。惟我同門之人。勿規規於俗儒文具。以爲能事。自是後而益加激勵。書其書道其道。卒究於光明正大之域。則他日野史氏。採人于儒學淵源之編。豈止爲從遊及門錄而已哉。錄將入梓。以先生行狀等文字。冠之于首。爲後生考德之地云爾。
歲丁卯六月上澣。門人濟州梁會洛謹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