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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21
  • 유사(2)(遺事(2))
  • 효자 조공 유사(孝子趙公遺事)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21 / 유사(2)(遺事(2))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21.0001.TXT.0021
효자 조공 유사
지난 정유년(1897, 고종34)에 내가 듣건대 향리의 많은 선비들이 천거장에 연명(聯名)하여 조경제(趙慶濟)와 그의 처 이씨(李氏)의 효행을 관사(官司)에 보고했는데 항간의 여론이 칭송하지 않음이 없었다. 13년 후인 기유년(1909, 순종2)에 효자 후손 내성(來成)이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후세에 길이 전할 글을 요청하기에 가장을 살펴보니 다음과 같았다. "경제(慶濟)는 집이 몹시 가난해서 품팔이로 어버이를 모시면서 몸을 편하게 하는 물건과 입에 맞는 음식을 모두 해드리지 않음이 없었다. 어버이가 기이한 병이 있어서 3년이 되도록 낫지 않자 부부가 번갈아 모시면서 밤낮으로 떠나지 않았다. 눕고 일어날 때면 부축하고, 옴으로 가려워하면 문질러 긁어드리며, 변을 보시면주 69) 움켜서 치웠다. 의원에게 묻고 약을 조제하며, 북두성에 기도하고 하늘에 축원하며, 정성을 다하고 힘을 쏟기를 3년을 하루처럼 하였다. 하루는 홀연 올빼미가 꿩을 쳐서 뜰에 떨어뜨리니 가져다 드린 일이 있었다. 이는 우연이 아니라 실로 효성에 감응한 소치였다. 운운." 이 가장(家狀)의 내용이 실제보다 지나치다면 어찌 당일의 칭송이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이에 그 실행(實行)과 실적(實蹟)에 속일 수 없는 점이 있다는 것주 70)을 알 수 있다. 효자 조씨는 함안(咸安)의 저명한 성씨로 덕곡(德谷) 선생 휘 승숙(承肅)이 그 중조(中祖)이다. 휘 종례(從禮)에 이르러 우리 조정에 들어와서 직제학(直提學) 벼슬을 지내고, 휘 희광(希匡)이 참봉(參奉) 벼슬을 지내면서 동복(同福)에 우거하였다. 4대를 전하여 휘 옥생(玉生)은 호가 청계(淸溪)인데 감정(監正) 벼슬을 지내고 동복에서 또 능주(綾州)로 옮기면서 자손들이 그로 인해 거주하게 되었다. 고조는 휘가 달운(達運)이다. 증조는 휘가 시복(時福)인데 호는 가정(嘉亭)이다. 조부는 휘가 두열(斗烈)인데 호는 희암(希庵)이다. 부친의 휘는 용후(鏞厚)로 세상에 문장과 덕행으로 드러났다. 모친은 함풍 이씨(咸豊李氏) 돈효(敦孝)의 따님이다. 생부(生父)의 휘는 용필(鏞弼)인데 소후부(所後父 양부)의 오종(五從) 형제이고, 생모(生母)는 밀양 박씨(密陽朴氏) 영철(英哲)의 따님이다. 철종(哲宗) 병진년(1856, 철종7) 12월 23일에 공은 산음리(山陰里)에서 태어났다. 지극한 효성은 천성으로 타고났고 부모상을 당해서는 한결같이 예제(禮制)를 따랐다. 부인은 전주 이씨(全州李氏) 종근(鍾根)의 따님으로 온화하고 유순하며 정숙하고 아름다워 지극한 부덕(婦德)이 있었다. 시부모를 잘 모시고 남편을 어김이 없었으니 친척과 이웃들도 이구동성으로 찬탄하며 "그 남편에 그 부인이다."라고 하였다. 효자는 갑진년(1904, 고종41) 6월 15일 세상을 마쳤고 단양면(丹陽面) 천곡(泉谷) 오른쪽 기슭 방축동(防築洞) 좌좌(子坐)의 언덕에 안장하였다. 1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바로 이 글을 요청한 자이고, 딸은 남평(南平) 문채호(文彩浩)에게 시집을 갔다. 내가 늙고 병들어 남의 집안의 글을 짓기가 어렵지만 평소 보고 느낀 바가 있어 차마 굳게 사양하지 못하였다.
주석 69)변을 보시면
원문의 '유시(遺矢)'로 시(矢)는 똥〔屎〕이다. 《사기(史記)》 〈염파인상여열전(廉頗藺相如列傳)〉에 "염 장군이 늙었어도 아직 밥을 잘 먹습니다. 하지만 신과 함께 앉아 있으면서 얼마 되지 않는 시간 동안 세 번이나 변소에 갔습니다.〔廉將軍雖老. 尚善飯. 然與臣坐, 頃之三遺矢矣.〕"라고 하였는데 사마정(司馬貞)의 색은(索隱)에 "자주 일어나 변소에 갔음을 말한 것이다. 시(矢)는 어떤 본에는 시(屎)라고 되어 있다.〔謂數起便也, 矢一作屎.〕"라고 하였다.
주석 70)속일……것
저본은 '有不可誣耆'로 되어 있는데 '耆'는 '者'의 잘못인 듯하다.
孝子趙公遺事
往在丁酉。余聞鄕裏多士。聯名擧狀。以報趙慶濟及其妻李氏孝行于官司。而閭巷物議。莫不稱愜焉。後十三年己酉。孝子遺胤來成持其狀。謁不朽之文。按狀有曰。慶濟家貧甚。行傭供親。而其便身之物。適口之味。無不畢給。親有奇疾。三年彌留。夫妻替侍。晝夜不離。臥起則扶持之。苛癢則抑搔之。遺矢則掬除之。問醫合藥。祈斗祝天。殫誠竭力。三年如一日。一日忽有鴟鴞。摶稚墜庭中。持以供之。此非適然。實是孝感所致云云。夫此狀之辭。如其浮實。則豈當日之稱愜。有如是耶。于以見其實行實蹟。有不可誣耆矣。孝子咸安著姓。德谷先生諱承肅。其中祖。至諱從禮。入我朝。官直提學。諱希匡。官參奉。寓居同福。四傳諱玉生。號淸溪。官監正。自同福又移綾州。子孫因居焉。高祖諱達運。曾祖諱時福。號嘉亭。祖諱斗烈。號希庵。考諱鏞厚。世著文行。妣咸豊李氏敦孝女。生考諱鏞弼。於所後爲五從兄弟也.妣密陽朴氏英哲女。哲宗丙辰十二月二十三日。公生于山陰里。誠孝根天。遭內外艱。一遵禮制.配李氏全州人鍾根女。溫柔靜嘉。極有婦德。善事舅姑。無違夫子。親戚隣里。一口歎賞以爲是夫是婦。孝子以甲辰六月十五日終。葬丹陽面泉谷右麓防築洞子坐原。有一男一女。男卽謁文者。女適南平文彩浩。余老且病。有難犯手於人家文字。而觀感有素。有不忍牢辭云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