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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21
  • 유사(2)(遺事(2))
  • 매사 민공 유사(梅史閔公遺事)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21 / 유사(2)(遺事(2))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21.0001.TXT.0020
매사 민공 유사
공의 휘는 치규(致圭)요, 자는 우문(遇文), 호는 매사(梅史)이다. 민씨(閔氏)의 선계는 여흥(驪興)에서 나왔고 상의봉어(尙衣奉御) 휘 칭도(稱道)가 그 비조(鼻祖)이다. 호가 의암(義庵)인 휘 회삼(懷參)에 이르러 벼슬이 병조판서에 이르렀고 우리 세조(世祖) 때 대정 현감(大靜縣監)에 전보되었다가 방환(放還)되어 그대로 능주(綾州) 월곡리(月谷里)에 거주하였다. 증조의 휘는 정사(挺泗)로 사복시 정(司僕寺正)에 추증되었고, 조부의 휘는 상일(相一)이다. 부친의 휘는 향방(響邦)이고, 모친은 평택 임씨(平澤林氏) 수중(守重)의 따님으로 헌종(憲宗) 신묘년(1831)주 59) 3월 11일 송석방(松石坊) 오류촌(五柳村)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수염이 아름답고 얼굴이 좋았다. 언사는 온화하고 선량했으며 행동은 안정되고 조용하였다. 그 용모를 쳐다보면 근칙(謹勅)한 선비임을 알 수 있고, 그 말을 들으면 화락한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 집안이 매우 가난하여 산에서 땔나무하고 물에서 고기를 낚아 어버이에게 맛있는 음식을 갖춰 드렸다.
한가한 날에는 경전(經典) 공부에 힘썼는데 확실하게 과정(課程)을 두었다. 구용구사(九容九思)주 60) 및 경재잠(敬齋箴)주 61)을 자리 옆에 걸어놓고 보면서 몸을 다스리는 근본으로 삼았다. 일찍이 말하기를 "어버이를 사랑하고 어른을 공경하며 스승을 높이고 벗을 친히 하는 것과, 성의(誠意)ㆍ정심(正心)ㆍ수신(修身)ㆍ제가(齊家)주 62)는 선비의 본분과 실지(實地)이다. 이 밖으로는 이단이요 사설(邪說)이다."라고 하였다. 평소 함부로 말하거나 웃지 않았고 함부로 교유하지도 않았다. 몸가짐은 담담하고 조용하여서 영위(營爲)하는 바가 없는 것 같았고, 남을 대할 때는 관대하고 여유로워서 취하고 버리는 바가 없는 것 같았다.주 63) 오솔길을 내서주 64) 글방을 짓고 꽃을 가꾸며 대나무를 심어서 빈객과 붕우들이 글 짓고 술 마시는 장소로 삼았다. 묘실(墓室)을 중수하여 서적주 65)을 쌓아놓고 가문 자제들이 노닐며 학업을 하는 곳으로 삼았다. 향당(鄕黨)의 학교주 66)에도 출입하며 마음껏 의론하고주 67) 도우면서 가리킬 수주 68) 있었으니 우뚝하게 한 고을의 의표(儀表)가 되었다. 갑신년(1884, 고종21) 4월 8일에 세상을 뜨니 본방(本坊)의 풍정(風亭) 계좌(癸坐)의 언덕에 안장하였다. 부인은 문화 유씨(文化柳氏) 명수(明樹)의 따님으로 2남 방호(方鎬)ㆍ찬호(璨鎬)를 두었다. 찬호는 출계(出系)하여 당숙인 치은(致殷)의 후사가 되었다. 내가 어려서부터 외람되이 공의 지우(知遇)를 받아서 사원(詞垣)과 한묵(翰墨)의 마당ㆍ학교와 연향의 자리에 출입하며 모시고 따르면서 적셔진 여훈(餘薰)이 충만할 뿐만이 아니었다. 오호라! 선배와 숙유(宿儒)들이 대부분 세상을 떠나 향리에서 다시는 당일의 풍도와 의용을 볼 수 없으니 고금을 돌아보매 눈물이 줄줄 흐른다. 이제 그 남은 후손 영언(泳彦)의 부탁을 받고 보니 차마 내가 마땅한 사람이 아니라고 하여 사양할 수 없었다.
주석 59)헌종(憲宗) 신묘년(1831)
원문에 '헌종'으로 되어 있으나 헌종의 재임기에는 신묘년이 없으니, 착오가 있는 듯하다.
주석 60)구용구사(九容九思)
'구용(九容)'은 군자가 지녀야 할 아홉 가지 몸가짐으로, 《예기》 〈옥조(玉藻)〉에 "군자의 용모는 펴지고 느려야 하니, 존경할 사람을 보고는 더욱 공경하고 삼가야 한다. 발 모양은 무겁게 하며, 손 모양은 공손하게 하며, 눈 모양은 단정하게 하며, 입 모양은 그치며, 소리 모양은 고요하게 하며, 머리 모양은 곧게 하며, 숨 쉬는 모양은 엄숙하게 하며, 서 있는 모양은 덕스럽게 하며, 얼굴 모양은 장엄하게 해야 한다.〔君子之容舒遲, 見所尊者齊遫. 足容重, 手容恭, 目容端, 口容止, 聲容靜, 頭容直, 氣容肅, 立容德, 色容莊.〕"라고 하였다. '구사(九思)'는 또한 군자가 지녀야 할 아홉 가지 마음가짐으로, 《논어》 〈계씨(季氏)〉에 "보는 데 밝게 볼 것을 생각하며, 들을 때는 밝게 들을 것을 생각하며, 낯빛은 온화할 것을 생각하며, 태도는 공손할 것을 생각하며, 말은 충직하게 할 것을 생각하며, 일은 공경스럽게 할 것을 생각하며, 의심난 것은 물을 것을 생각하며, 분이 날 때는 어려운 일이 있을 것을 생각하며, 얻을 것을 보면 의리를 생각해야 한다.〔視思明, 聽思聰, 色思溫, 貌思恭, 言思忠, 事思敬, 疑思問, 忿思難, 見得思義.〕"라고 하였다.
주석 61)경재잠(敬齋箴)
주희(朱熹)가 '경(敬)'에 관련된 글을 모아 자신을 경계하는 뜻으로 지은 글이다. 《朱子大全 卷85 敬齋箴》
주석 62)성의(誠意)ㆍ정심(正心)ㆍ수신(修身)ㆍ제가(齊家)
《대학》에 나오는 8조목을 가리킨다. 8조목은 격물(格物)ㆍ치지(致知)ㆍ성의(誠意)ㆍ정심(正心)ㆍ수신(修身)ㆍ제가(齊家)ㆍ치국(治國)ㆍ평천하(平天下)이다.
주석 63)취하고……같았다
상황에 따라 사람을 가리지 않았다는 뜻이다.
주석 64)오솔길을 내서
원문의 '개경(開逕)'으로, 한(漢)나라 때의 은사(隱士) 장후(蔣詡)가 일찍이 정원에 세 오솔길을 내고 오직 좋은 친구 구중(求仲), 양중(羊仲)하고만 종유했던 데서 온 말이다. 도잠(陶潛)의 〈귀전원(歸田園)〉에 "내 본심이 정히 이와 같으니, 오솔길 내고 좋은 친구만 바라노라.〔素心正如此, 開逕望三益.〕"라고 하였다.
주석 65)서적
원문의 '분전(墳典)'으로, 삼황오제(三皇五帝) 시대의 책이라고 하는 삼분 오전(三墳五典)의 준말인데, 여기서는 유교 서적 등을 말한다.
주석 66)학교
원문의 '상서(庠序)'로, 지방의 학교를 말한다. 《맹자》 〈양혜왕 상(梁惠王上)〉에 맹자가 양혜왕에게 왕자(王者)의 다스림에 대해 논하면서 이르기를 "상서의 가르침을 삼가서 효제의 의리로써 거듭한다면 머리가 반백이 된 자가 길에서 짐을 등에 지거나 머리에 이지 않을 것입니다.〔謹庠序之敎, 申之以孝悌之養, 頒白者不負戴於道路矣.〕"라고 하였다.
주석 67)출입하며……의론하고
저본에는 '出人風儀'로 되어 있으나 문맥상 '出入風議'의 잘못인 듯하다. 《시경》 〈북산(北山)〉에 "혹은 출입하며 마음껏 말하거늘 혹은 하지 않는 일이 없도다.〔或出入風議, 或靡事不爲.〕"라고 하였다.
주석 68)가리킬 수
원문의 '지획(指畫)'으로, 손가락으로 그려 보이며 가리키는 것이다.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가 외효(隗囂)를 치기 위하여 친정(親征)했을 때, 제장(諸將)의 의견이 엇갈리자, 농서(隴西)에서 복파장군(伏波將軍) 마원(馬援)을 불러 자문을 구했는데, 마원이 '쌀을 모아 쌓아서 산과 골짜기의 모양을 만들어서 지형을 가리켜가며 여러 군대가 경유할 곳을 분명히 알 수 있게 하자〔聚米爲山谷, 指畫形勢, 開示軍衆所從道徑.〕' 광무제가 "오랑캐가 내 눈 안에 들어왔다."고 기뻐했다는 고사가 전한다. 《後漢書 卷24 馬援傳》
梅史閔公遺事
公諱致圭。字遇文。號梅史。閔氏系出驪興。尙衣奉御諱稱道。其鼻祖也。至諱懷參。號義庵。仕至兵判。我世祖朝。補大靜縣監放還因居綾州月谷里。曾祖諱挺泗。贈司僕寺正。祖諱相一。考諱響邦。妣平澤林氏守重女。憲宗辛卯三月十一日。生公于松石坊之五柳村。美鬚髥。好容顔。言辭溫良。動止安詳。瞻其容。可知其爲謹勅士也。聽其言。可知其爲愷弟人也。家貧甚。樵山釣水。備供親旨。餘日劬經。的有課程。九容九思及敬齋箴揭之座側。視爲律身之本。嘗曰。愛親敬長。隆師親友。誠意正心修身齊家。是士子本分實地。外此則異端也邪說也。平居不妄言笑。不妄交遊。持身恬靜。若無所營爲。處物寬裕。若無所取舍。開逕結塾。栽花種竹。爲賓朋文酒之所。重修墓室。貯積墳典。爲門子弟遊業之地。至於鄕黨庠序之間。有以出人風儀。左右指畫。偉然爲一鄕之儀表。甲申四月八日卒。葬本坊風亭癸坐原。妣文化柳氏明樹女。擧二男。方鎬璨鎬。璨鎬出爲堂叔致殷后。余自小少。猥爲公辱知。詞垣翰墨之場。黌宮樽爼之席。出入陪從。擩染餘薰。不啻充然。嗚呼。先進宿儒。擧皆千古。而鄕井之間。不復見當日之風儀。俯仰今古。有淚如注。今於其遺孫泳彦之託。不忍以非其人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