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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21
  • 유사(2)(遺事(2))
  • 유인 임씨 유사(孺人林氏遺事)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21 / 유사(2)(遺事(2))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21.0001.TXT.0019
유인 임씨 유사
조군(趙君) 익제(翼濟)는 자가 사빈(士彬)이요, 함안인(咸安人)이다. 효우(孝友)하고 돈목(敦睦)하며 선(善)을 즐거워하고 의(義)를 좋아하여 향리에서 칭송을 받았다. 군과 나는 중년의 벗인데 만년에 비로소 이웃에 접하여 서로 어울렸다. 이 때문에 부인의 아름다운 부덕(婦德)과 많은 내조(內助)에 대해 듣게 되었다. 그 부인 평택 임씨(平澤林氏)는 고(故) 충절공(忠節公) 팔급(八汲)의 후손으로 경인(景仁)ㆍ수길(守吉)ㆍ준원(俊源)이 그 증조 이하 3세의 휘이다. 모친은 한산 정씨(韓山程氏) 석조(錫祚)의 따님이다. 철종(哲宗) 기유년(1849, 즉위년) 11월 20일에 태어났다. 부인은 온화하고 인자하며 자애하고 유순하여 어려서부터 지극한 성품이 있었다. 16세에 시집을 와서주 56) 시부모를 받들어 모시면서 정성과 봉양을 다하여 달고 부드러운 음식을 올리고 신혼(晨昏)주 57)의 예절에 날마다 일정한 규정을 두었다. 시할머니 조씨(曺氏)의 깊은 병환이 오래되어 10년에 이르도록 부인은 마음으로 걱정하며 낯빛도 풀이 죽었다. 한데에서 기도하고 약을 맛보면서주 58) 낮에는 곁을 떠나지 않고 밤에는 선잠도 자지 않을 정도였다. 남편을 섬길 때는 화순(和順)하고 공경함을 모두 지극히 하여 한 마디 말도 따지지 않았고 규방에서는 온화하고 조용하여 사람 소리가 없는 것 같았다. 자손을 가르치고 기를 때는 의로운 방도를 다하기에 힘썼고, 상스러운 놀이를 경계하며 화려한 꾸밈을 금하였다. 취학시킬 때가 되면 반드시 어진 사장(師長)을 택해서 보내고, 매양 술과 음식을 갖춰서 사장에게 바치게 하고 정성을 다하였다. 족척(族戚)과 이웃에게는 은혜로운 뜻을 두루 흡족하게 하였고, 안부를 묻고 보내 주는 것을 때에 따라 변치 않았다. 흉년을 만나면 더욱 더 불쌍히 여겨 구제한 바가 많았다. 기해년(1899, 고종36) 12월에 남편이 병이 들어 위중해지자 부인은 매일 밤에 기도를 올리면서 자기 몸으로 대신할 것을 청했다. 얼마 되지 않아 남편의 병은 조금 차도가 있었는데 부인이 병에 걸리고 말았다. 임종할 때 자식들을 돌아보며 "너희들의 부친이 이미 차도가 있으니 내가 죽는 들 어찌 한스러워 하겠느냐?"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어버이에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며 글을 배우는 데 힘써서 가업을 폐하지 말거라."라고 하였다. 말을 마치고 세상을 떠나니 바로 경자년(1900, 고종37) 정월 6일이었다. 안장하였다가 가승동(佳勝洞)의 안산(案山) 활인봉(活人峰) 손좌(巽坐)의 언덕에 이장하였다. 두 아들을 두었는데 내룡(來龍)ㆍ내귀(來龜)이다. 두 딸은 여흥(驪興) 민사호(閔社鎬)ㆍ경주(慶州) 김용희(金龍熙)에게 시집 갔다. 오호라! 부인의 훌륭한 지모와 아름다운 풍범은 옛날의 어진 부인들에 견주어도 부끄러울 것이 없도다. 이 때문에 조씨의 집안이 훌륭한 명성이 드러나서 향리에 자자한 것이다. 나는 이것을 표장하여 당세에 열녀전(烈女傳)을 편찬하는 자에게 알리기를 원했었는데 내룡(來龍)과 내귀(來龜)가 나를 따라 종유하다가 어느 날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글을 부탁하였다. 돌이켜보건대 내가 비록 형편없으나 다만 정의(情誼)가 깊은지라 차마 굳게 사양하지 못하겠기에 삼가 전일에 들은 것과 오늘의 가장에 근거하여 그를 위하여 이와 같이 글을 짓노라.
주석 56)시집을 와서
원문의 '우귀(于歸)'로, 신부가 시집으로 오는 것이다. 《시경》 〈도요(桃夭)〉에 "야들야들 복사꽃, 열매가 주렁주렁. 이분 시집감이여, 집안을 의당 화목하게 하리로다.〔桃之夭夭, 有蕡其實. 之子于歸, 宜其家室.〕"라는 말이 나온다.
주석 57)신혼(晨昏)
혼정신성(昏定晨省)의 준말로, 어버이를 정성껏 봉양하는 것을 말한다. 《예기》 〈곡례 상(曲禮上)〉에 "자식이 된 자는 어버이에 대해서, 겨울에는 따뜻하게 해 드리고 여름에는 시원하게 해 드려야 하며, 저녁에는 잠자리를 보살펴 드리고 아침에는 문안 인사를 올려야 한다.〔冬溫而夏凊 昏定而晨省〕"라고 하였다.
주석 58)약을 맛보면서
윗사람에게 약을 올리기 전에 먼저 맛보는 것을 말한다. 《예기》 〈곡례 하(曲禮下)〉에 "임금이 병이 들어 약을 마실 때에는 신하가 먼저 맛을 보며, 어버이가 병이 들어 약을 마실 때에는 자식이 먼저 맛을 본다.〔君有疾, 飮藥, 臣先嘗之, 親有疾, 飮藥, 子先嘗之.〕"라고 하였다.
孺人林氏遺事
趙君翼濟。字士彬咸安人。以孝友敦睦。樂善嗜義。見稱于鄕里間。君余中年友也。而晩始接隣相從。是以聞其壺範之美。內助之多。其夫人平澤林氏。故忠節公八汲之後。景仁守吉俊源。其曾祖以下三世諱也。妣韓山程氏錫祚女。以哲宗己酉十一月二十日生。溫仁慈柔。幼有至性。十六于歸。承奉舅姑。備盡忠養。甘毳之供晨昏之節。日有常程。王姑曺氏沈疾彌久。至於十年。夫人心憂色沮。露禱嘗藥。晝不離側。夜不儼寐。事君子。和敬兩至。未嘗以一言相稽。閨房之間。雍容幽靜。若無人聲。敎養子孫。務盡義方。戒鄙俚之戱。禁華麗之餙。及其就學。必擇師長之賢者而送之。每具酒饌。使獻之而致誠焉。族戚鄰里。恩意周洽。問訊贈遺。隨時不替。遇飢歲。曲加矜恤。多所濟活。己亥十二月。其夫遘疾危劇。夫人每夕行禱。請以身代。未幾夫病少差。而夫人遘疾。臨終顧諸子曰。汝父親旣得向差。吾死何恨。又曰。孝於親。友於兄弟。勤於學文。勿替家業也。言訖而逝。卽庚子正月六日也。葬而移窆于佳勝洞案山活人峰巽坐原。擧二男。曰來龍來龜。二女適驪興閔社鎬慶州金龍熙。嗚呼。夫人之佳謨懿範。視諸古之淑媛。可以無愧矣。此趙氏之家所以著有令聞而藉藉於鄕里者也。吾願表以出之以諗于世之編烈女傳者。來龍來龜從余遊。一日以家狀屬余爲文。顧以無狀。但以事契之重。有不忍牢讓。謹据前日之聞今日之狀。爲之說如此云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