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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21
  • 유사(2)(遺事(2))
  • 모의재 윤공 유사(慕義齋尹公遺事)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21 / 유사(2)(遺事(2))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21.0001.TXT.0018
모의재 윤공 유사
공의 휘는 학모(學模), 자는 중현(重賢)이다. 윤씨(尹氏)의 선계는 파평(坡平)에서 나왔다. 태사(太師) 휘 신달(莘達), 영평군(鈴平君) 휘 보(珤)는 모두 상계(上系)의 현달한 조상들이다. 호가 광수(狂叟)인 휘 덕생(德生)에 이르러 우리 장릉(莊陵)주 52)이 양위(讓位)를 할 즈음에 관직을 버리고 남쪽으로 내려왔고 여러 번 나라에서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이분이 휘 만(蔓)을 낳았는데 감찰(監察)을 지냈고 수헌(睡軒) 권오복(權五福)ㆍ한재(寒齋) 이목(李穆)ㆍ매계(梅溪) 조위(曺偉)와 도의(道義)의 교분을 맺었다. 이분이 휘 자중(自中)을 낳았는데 좌랑(佐郞)이고, 이분이 휘 승문(承文)을 낳았는데 사과(司果)이고 승지(承旨)로 추증되었다. 이분이 휘 형유(衡柚)를 낳았는데 별제(別提)이고, 이분이 휘 해(海)를 낳았는데 여절교위(勵節校尉)이고 정유(丁酉)의 난 때 순절하였다. 5대를 전하여 휘 효동(孝東)이 바로 공의 고조이다. 증조의 휘는 일서(日瑞), 호는 계송당(桂松堂)인데 효행으로 명성이 났고 가선대부(嘉善大夫)이다. 조부의 휘는 상진(商鎭)이요, 호는 동은(東隱)이다. 부친의 휘는 일(溢)이요, 호는 학재(鶴齋)인데 문장과 덕행을 대대로 계승하였다. 모친은 개성 차씨(開城車氏) 명철(明轍)의 따님으로 부도(婦道)에 흠결이 없었다. 순묘(純廟) 임오년(1822, 순조22) 5월20일 함평(咸平) 모양리(牟陽里)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풍모가 헌걸차고 성품이 온량(溫良)하여 어버이를 섬김에 지극히 효성스러웠고 응대와 진퇴 간에 일찍이 뜻을 어긴 적이 없었다. 7세 때 어버이의 병이 위중한 것을 보고는 밤낮으로 부축하며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았다. 상을 당해서는 가슴을 치고 발을 구르며 울고 부르짖다가 거의 생명을 상할 뻔했으니 보는 사람들이 찬탄하였다. 집안이 평소 매우 가난했으나 부지런히 일하고 힘을 다해 모친을 봉양하면서 달고 부드러운 음식을 드리는 일과 따뜻하고 시원하게 보살피는 예절을 갖춰 드리지 않음이 없었다. 연로한 어버이가 노쇠하여 걷기 어렵게 되니 공이 매번 업고 뜰을 걸어 다녔다. 하루는 병이 나서 위태로울 뻔했는데 공이 넓적다리를 베어 드려 3일간 목숨을 연장하였다. 집상(執喪)을 할 때는 늙었다고주 53) 하여 스스로 핑계대지 않고 애훼(哀毁)함이 끝이 없었으며 정성과 예절이 모두 지극하였다. 중년에 화곡리(花谷里)에 우거하며 작은 집을 짓고, 꽃과 대나무, 거문고와 서적을 대하며 밤낮으로 한가로이 노닐었다. 공은 어려서 독서하고 겸하여 무예를 익혔다. 진을 펼치고 군대를 운용하는 법과 말을 달리고 활을 당기는 방도에 대해 대략 큰 이치를 깨우쳤다. 병인년(1866, 고종3) 강화도의 변란주 54)으로 조야가 흉흉할 때 김인기(金仁基) 공과 한 고을을 창도하여 장차 의거를 일으키려 하였다. 전략을 보좌하고 계획하여 출발이 얼마남지 않았는데 변란이 평정되니 그쳤다. 만년에는 스스로 재덕(才德)을 깊이 숨겨 감추고 문밖을 나서지 않았다. 그러나 빈객과 벗이 들르면 기분 좋게 마시면서 즐거움을 다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가숙(家塾)을 열어 자손을 가르쳤고 문규(門規)를 만들어 족친(族親)들을 통합하였다. 이웃 마을 친구에 대해서 까지도 위문과 구휼을 갖추어 행하지 않음이 없었다. 정해년(1887, 고종24) 4월 13일 생을 마치니 단양면(丹陽面) 동막(東幕) 뒤편 불당동(佛堂洞) 건좌(乾坐)의 언덕에 안장하였다. 부인은 문화 유씨(文化柳氏) 기수(起樹)의 따님인데, 부덕(婦德)으로 명성이 났다. 4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병희(炳熙)ㆍ병룡(炳龍)ㆍ병문(炳文), 병호(炳豪)이고, 딸은 남평(南平) 문공휴(文功休)에게 시집갔다. 손자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 내가 병인년(1866,고종3)에 거사를 했던 공(公)들을 본 적이 있는데 모두 고을에서 연세가 높고 명망이 무거운 분들이었다. 인물이 빼어나고 걸출하였으며 의론은 뛰어나고 시원스러웠다. 계모는 자세하고 빈틈이 없어서 원근 간에 호응하고 대소 간에 감동하였다. 비록 한 때에 공적을 기록할만한 업적은 없더라도 민심을 진작하고 국위(國威)를 조장(助壯)하여 적을 꺾는 원대한 계책을 세웠으니 또한 위대하지 않은가? 오호라! 이제는 40년 전의 일이 되었구나. 당시의 인물들은 홀연 모두 떠나시고 하늘에 넘치는 거대한 물결주 55)만 이처럼 가득 찼으니 곧바로 구천(九泉)으로 달려가 고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도다. 병희(炳熙)가 유장(遺狀)을 가지고 와서 글 한 편을 부탁하는지라 옛날을 회상하며 오늘을 슬퍼하니 어찌 차마 사양하겠는가?
주석 52)장릉(莊陵)
단종(端宗)의 능으로 여기서는 단종을 말한다.
주석 53)늙었다고
원문의 '기애(耆艾)'로 노인을 지칭하는 말이다. 《예기(禮記)》 〈곡례 상(曲禮上〉에 "50세를 애(艾)라 하니 관복을 입고 정사에 참여할 수 있으며, 60세를 기(耆)라 하니 사람들을 부릴 수 있다.〔五十曰艾, 服官政, 六十曰耆, 指使.〕"라고 하였다.
주석 54)강화도의 변란
1866년(고종3) 9월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에 침입하여 발생한 병인양요(丙寅洋擾)를 말한다.
주석 55)하늘에……물결
일제의 침입 등을 비유한 것이다.
慕義齋尹公遺事
公諱學模。字重賢。尹氏系出坡平。太師諱莘達。鈴平君諱珤。皆其上系顯祖也。至諱德生。號狂叟。我莊陵遜位之際。棄官南下。累徵不就。生諱蔓。監察。與權睡軒五福李寒齋穆曺梅溪偉爲道義交。生諱自中。佐郞。生諱承文司果。贈承旨。生諱衡柚。別提。生諱海勵節校尉。丁酉亂殉節。五傳諱孝東。卽公之高祖也。曾祖諱日瑞。號桂松堂。孝行著稱。嘉善。祖諱商鎭。號東隱。考諱溢。號鶴齋。世襲文行。妣開城車氏明轍女。壺儀無闕。以純廟壬五月二十日生公于咸平牟陽里器宇軒昂性氣溫良。事親至孝。唯諾進退。未嘗有違。七歲見親疾危劇。晝夜扶持。暫不離側。遭艱擗踊啼呼。幾於傷生。見者嘖嘖。家素貧甚。服勤致力以奉慈闈。甘毳之供。溫凊之節。無不備給。親年衰癃。艱於行步。公每負之而行於庭除。一日屬疾幾危。公割股以進。得延三日。執喪不以耆艾自恕。哀毁罔極。情文俱至。中年寓花谷里築小屋子。花竹琴書。日夕徜徉。公少年讀書。兼習武藝。布陣行軍之法。馳馬挽弓之方。略曉大致。丙寅江都之變。朝野洶洶。與金公仁基倡一鄕。將設義擧。贊畫方略。行發有日。亂平而止。晩年深自鞱晦。不出戶庭。然賓朋過之。未嘗不酣暢以盡其娛。開家塾以敎子孫。設門規以合族親。至於隣里故舊。問訊賙恤。無不備擧。丁亥四月十三日考終。葬丹陽面東幕後佛堂洞乾坐原。齊文化柳氏起樹女。婦德著稱。生四男一女。曰炳熙炳龍炳文炳豪。南平文功休。孫以下不錄。余嘗及見丙寅擧事諸公。皆鄕裏耆舊宿碩也。人物俊偉。言議英暢。謀畫綢密。遠近響應。大小風勤。雖未有一時紀功之蹟。而所以振勵人心。助壯國威。而爲折衡千里之計。不亦大矣乎。嗚呼。今爲四十年前事耳。當時人物。遽皆零落。而陷天巨浪。瀰漫如此。直欲奔告九泉而不可得也。炳熙持遺狀。託以一言之役。緬古傷今。豈忍辭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