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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21
  • 유사(2)(遺事(2))
  • 열효부 정씨 유사(烈孝婦鄭氏遺事)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21 / 유사(2)(遺事(2))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21.0001.TXT.0017
열효부 정씨 유사
내가 옛날 강가에서 노사(蘆沙)주 43) 선생을 모시다가, 어느 날 "문천상(文天祥)주 44)이 국가가 패망한 날에 죽지 않고 연옥(燕獄)주 45)에서 붙잡힌 지 수 삼년 만에 죽음을 내린 이후에야 죽었으니 왜 그랬습니까?"라고 여쭈었다. 선생은 "옛날에 개가(改嫁)하는 일이 있었으므로 개가하지 않는 것을 '열(烈)'로 여겼지만, 우리나라에는 개가하는 법이 없으므로 남편을 따라 죽는 것을 '열(烈)'로 여겼으니, 어찌 시부모를 받들고 자식을 길러서 그 집안을 보존하는 것을 '열(烈)'로 여겼겠는가?"라고 하셨다. 내가 듣고서 느끼고 깨달은 바가 있어 평소 잊지 않고 있었는데, 이제 열효부(烈孝婦) 정씨(鄭氏)의 행장 한 편을 보고 과연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정씨는 고(故) 사인(士人) 이문욱(李文郁)의 처인데 친영(親迎)주 46)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남편이 죽으니 따라 죽기로주 47) 맹세하고 절대로 먹고 마시지를 않았다. 시부모가 백방으로 누그러뜨리고 타이르자 정씨는 번연(幡然)히주 48) 마음을 바꾸고 일어나 "부모를 봉양하는 것이 죽은 남편의 마음입니다."라고 하고는 억지로 미음을 먹고 곡읍(哭泣)과 벽용(擗踊)주 49)을 예(禮)에 맞게 그쳤다. 시부모를 섬길 때는 부드러운 목소리와 기쁜 낯빛으로 극진하게 뜻을 받들어 따랐고, 맛있는 반찬과 정갈한 음식으로 극진하게 정성스런 봉양을 하였다. 병구완을 할 때 약물을 널리 구했는데 그 효성에 감응(感應)한 것이 많았다. 몸소 부지런히 길쌈을 하면서 새벽과 밤에도 게을리 하지 않으니 모든 경비가 덕분에 넉넉해졌다. 조카인 익무(翊茂)를 데려다 후사(後嗣)로 삼고 스승에게 나아가게 하였으며 올바른 교육주 50)을 다하는 데 힘쓰니 끝내 성취하게 되었다. 오호라! 죽은 남편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으로 삼았으니 남편을 따라 죽은 경우보다 나은 것이 훨씬 크지 않겠는가. 이것이 향리의 보고와 사림의 천거가 의당 계속되어 한 두 번이 아니었던 까닭이다. 부인은 하동(河東)의 저명한 성씨로 고(故) 충의공(忠毅公) 지(地)의 후예이자 효자 준(浚)의 따님이다. 법도 있는 집안에서 나고 자랐으니 교화에 젖어 습성을 이룬 것이 어찌 그 유래가 없겠는가? 하루는 그 손자 병규(秉奎)가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보여주고 또 울면서 "우리 선조비(先祖妣)의 지극한 행실과 탁월한 절조는 옛날 어진 부인주 51)에게 견주어도 실로 부끄러울 것이 없는데 지금 세도(世道)가 옛날 같지 않아 진위(眞僞)를 구별하지 못하니 훗날에 증거할 수 있는 것은 다만 전해질 한 편의 문장이 아니겠습니까?"라고 하면서 굳게 간청해 마지않았다. 내가 듣고 흠모하고 부러워하여 감히 고루(固陋)하다고 하여 사양하지 못하였다.
주석 43)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1798~1879)의 호이다. 자는 대중(大中), 본관은 행주(幸州)이다. 1831년(순조31) 사마시에 합격하여 호조 참판을 지냈고, 서경덕ㆍ이황ㆍ이이ㆍ이진상ㆍ임성주 등과 함께 성리학의 6대가로 꼽힌다. 저서로는 《노사집》이 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주석 44)문천상(文天祥)
송(宋) 나라 충신으로, 자는 송서(宋瑞), 호는 문산(文山)이다. 원(元) 나라 장군 장홍범(張弘範)에게 패하여 3년 동안 연옥(燕獄)에 갇혔다. 원나라의 세조가 그의 재능을 높이 사 벼슬을 간곡히 권했으나 끝까지 거절하여 결국 사형을 당했다. 《宋史 卷418 文天祥列傳》
주석 45)연옥(燕獄)
문천상이 수감되었던 연경(燕京)의 감옥을 말한다. 《宋史 卷418 文天祥列傳》
주석 46)친영(親迎)
신랑이 신부의 집에 가서 신부를 직접 맞이하는 의식이다.
주석 47)따라 죽기로
원문의 '하종(下從)'으로, 남편이 죽으면 자신도 죽어서 지하(地下)로 따라간다는 뜻이다.
주석 48)변연(幡然)히
갑자기 마음을 바꾸는 것을 말한다. 《맹자》 〈만장 상(萬章上)〉에 "탕 임금이 세 번이나 사람을 보내어 초빙하자, 이윽고 마음을 바꾸었다.〔湯三使往聘之, 旣而幡然改.〕"라고 하였다.
주석 49)벽용(擗踊)
상을 당하여 슬픈 나머지, 가슴을 치며 발을 굴러 뛰는 것을 말한다.
주석 50)올바른 교육〔義方之敎〕
'의방(義方)'은 올바른 도리로 바르게 가르치는 가정교육을 말한다. 춘추 시대 위(衛)나라 장공(莊公)의 아들 주우(州吁)가 오만 방자하게 굴자 석작(石碏)이 장공에게 충간(忠諫)한 말 가운데 "아들을 사랑한다면 그에게 바른 길로 가도록 가르쳐서 잘못된 곳으로 빠져 들지 않게 해야 한다.〔愛子, 敎之以義方, 弗納於邪.〕"라고 하였다. 《春秋左氏傳 隱公3年》
주석 51)어진 부인
원문의 '숙원(淑媛)'으로, 《후한서(後漢書)》 〈열녀전(列女傳) 조세강처(曹世叔妻)〉에 "만약 숙원하고 겸순한 부인이라면 의를 따라 우호를 돈독히 한다.〔若淑媛謙順之人, 則能依義以篤好.〕"라고 하였는데 이현(李賢)의 주에 "숙은 선함이고 아름다운 여자를 완이라고 한다.〔淑, 善也. 美女曰媛.〕"라고 하였다.
烈孝婦鄭氏遺事
余昔侍蘆沙先生于江上。一日問文天祥不死於國家敗亡之日。而被執燕獄數三年。至於賜死而後死之。何耶。先生曰。古有改嫁。則以不嫁爲烈。在我東法無改嫁。則以從死爲烈。曷若奉舅姑養嗣息。以存其家之爲烈也。余聞之感悟。尋常不忘。今見烈孝婦鄭氏行狀一篇。果知有其人也。鄭氏故士人李文郁妻。親迎未幾而死。誓以下從。絶不飮食。舅姑寬譬百端。鄭氏幡然而起曰。奉養父母。是亡夫心也。强進餰粥。哭泣擗踊。止於禮。事舅姑。柔聲怡色。極其承順。馨饍潔羞。極其忠養。其侍疾。旁求藥餌。多有孝感之應。躬勤織紝。晨夜不懈。凡百調度。賴以紓焉。取從子翊茂爲嗣。命就傳。務盡義方之敎。卒至成就。嗚呼。心亡夫之心而賢於下從者。不其遠矣乎。此鄕里之報。士林之薦。宜其續續而弗一也。夫人河東著姓。故忠毅公地後。孝子浚女。生長法家。所以擩染而成性者。豈無所自耶.一日其孫秉奎抱狀示余。且泣曰。我先祖妣至行卓節。方古淑媛實無愧焉。而目今世道不古。眞贋莫別。則可以證信於日後者。其獨非一副文字之傳耶。固懇不已。余聞之欽艶。不敢以固陋辭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