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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21
  • 유사(2)(遺事(2))
  • 신천 민군 유사(新川閔君遺事)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21 / 유사(2)(遺事(2))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21.0001.TXT.0016
신천 민군 유사
종족(宗族)들이 효성스럽다고 칭찬하고 향당(鄕黨)에서 공손하다고 칭찬한다는 그 말을주 33) 나는 들었고 나는 그러한 사람을 보았다. 유유자적함을 법도로 삼으며 어진 이를 사모하면서도 여러 사람을 포용한다는 그 말을주 34) 나는 들었고 나는 그러한 사람을 보았다. 고(故) 신천(新川) 민군(閔君) 우식(祐植) 세중(世仲)이 그 사람이다. 군은 가학과 법도가 있는 집안주 35)에서 태어나 간난신고를 겪으며 자랐고, 몸소 밭 갈고 손수 호미질하며 어버이에게는 맛있는 음식을 올렸다. 한가한 날에는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섭렵하고 옛사람의 위기지업(爲己之業)주 36)에 종사하였다. 그 후 최면암(崔勉庵)주 37)ㆍ 정애산(鄭艾山)주 38)ㆍ정월파(鄭月波)주 39)ㆍ기송사(奇松沙)주 40)를 종유하며 왕복강마(往復講磨)하면서 그 의리의 지취를 넓혔다. 아름다운 천부의 자질로 가정에서 전한 것을 이어받고 사우(師友)의 도움에 젖어서 그 마음을 세우고 처신하며, 사람을 응대하고 사물에 대처하는 데에 찬연(粲然)히 조리가 있고 의연(毅然)히 절도가 있었다. 평소에 조용하고 묵묵하여 함부로 말하거나 웃지 않고 함부로 출입하지 않았다. 노력하지 않고는 먹지 않았고, 의리가 아니면 취하지 않았다. 세속을 따라 영합하지 않았고 시류를 좇아 아첨하지 않았다. 오직 한 표주박의 마실 것주 41)과 한 책상의 서책이 그 필생(畢生)의 살림살이였다. 몸을 숨기고 자취를 거두어 암연(闇然)히 스스로 닦으면서, 안으로는 그 환심(歡心)을 잃지 않았고 밖으로는 그 훌륭한 명성을 잃지 않았으니, 군을 알건 모르건 이구동성으로 추켜세우지 않음이 없었다. 임인년(1902, 고종39) 3월 28일에 생을 마쳤으니 태어난 계해년(철종14, 1863)과 거리를 따져보면, 향년 겨우 40세였다. 국수봉(菊秀峯) 자좌(子坐)의 언덕에 안장하였다. 민씨(閔氏)의 선계는 여흥(驪興)에서 나왔다. 신라에서 고려까지 저명한 석학이 이어져서 동방(東方)의 거족이 되었다. 휘 회삼(懷參)은 호가 의암(義庵)이니, 이분이 남쪽으로 낙향한 조상으로 군에게는 15세가 된다. 증조의 휘는 치록(致祿), 조부의 휘는 사호(士鎬)이다. 부친의 휘는 영곤(泳坤)이요, 모친은 남평 문씨(南平文氏) 모(某)의 따님이다. 생부(生父)의 휘는 영석(泳碩)이요, 생모(生母)는 전주 이씨(全州李氏) 종수(棕秀)의 따님이다. 군은 의령 남씨(宜寧南氏) 모(某)의 따님에게 장가들었고, 계취(繼娶)는 제주 양씨(濟州梁氏) 모(某)의 따님인데 2남 병하(丙夏)와 병엽(丙燁)을 두었다. 나는 군과 나이를 잊은 막역한 교분을 맺었었는데 유명(幽明)을 달리한 지 8, 9년 되었을 때 병하(丙夏)가 벌써 관례(冠禮)를 하고 찾아와서 그 가장(家狀)을 가지고 나에게 글 한 편을 써줄 것을 청하였다. 오호라! 군을 못 본 지도 오래되었는데, 이제 그 외롭게 남았던 아이가 부쩍 자라서 관례(冠禮)주 42)까지 한 것을 보게 되니, 서글픈 느낌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또 어린 나이에 선친의 미덕을 천술(闡述)할 줄 알고 게다가 선친의 벗을 방문하였으니 기특하고 기특한 일이다. 아직 이루지 못한 뜻은 장차 끝을 성대히 할 날이 있으리라.
주석 33)종족(宗族)들이……말을
선비다운 인물이라는 뜻이다. 《논어》 〈자로(子路)〉에 선비의 자격을 묻는 자공(子貢)의 질문에 공자가 "일가친척이 효성스럽다고 칭찬하고, 마을 사람들이 공손하다고 칭찬하는 것이다.〔宗族稱孝焉, 鄕黨稱弟焉.〕"라고 한 것을 인용한 것이다.
주석 34)유유자적함을……말을
여유 있고 관대한 사람임을 말한 것이다. 《예기》 〈유행(儒行)〉에 "(유자는) 유유자적함 법도로 삼으며, 어진 사람을 사모하면서도 여러 사람을 포용하고 모난 점을 버리고 원만하게 지내니 그 관대함이 이와 같다.〔優游之法, 慕賢而容衆, 毁方而瓦合. 其寛裕有如此者.〕"라고 한 것을 인용한 것이다.
주석 35)가학과……집안
원문의 '시례법필(詩禮法拂)'로, 유교 경전에 대한 지식과 예의범절을 이어오는 가문을 '시례지가(詩禮之家)'라 한다. 《논어》 〈계씨(季氏)〉에, 공자가 아들인 이(鯉)에게 "시(詩)를 배웠느냐?〔學詩乎?〕" 하고 묻고, 또 한 번은 "예(禮)를 배웠느냐?〔學禮乎?〕"라고 하였다. '법필(法拂)'은 법도가 있는 세신(世臣)과 보필하는 현사(賢士)를 뜻한다. 《맹자》 〈고자 하(告子下)〉에 "안으로 법도 있는 세신과 보필하는 현사가 없고, 밖으로 적국과 외환이 없으면 이런 나라는 항상 망한다.〔入則無法家拂士, 出則無敵國外患者, 國恒亡.〕"라고 하였다.
주석 36)위기지업(爲己之業)
위기지학(爲己之學)을 말한다. 오직 자신의 덕성을 닦기 위해 공부하는 것을 말한다. 《논어》 〈헌문(憲問)〉에, "옛날의 학자들은 자신을 위한 공부를 하였는데, 지금의 학자들은 남을 위한 공부만 한다.〔古之學者爲己, 今之學者爲人.〕"라고 하였다.
주석 37)최면암(崔勉菴)
최익현(崔益鉉, 1833~1906)으로 면암(勉菴)은 호이다. 자는 찬겸(贊謙)이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항일의병운동을 전개하였다. 74세의 고령으로 태인(泰仁)과 순창(淳昌)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나, 체포되어 대마도(對馬島)에 유배 중에 세상을 떠났다.
주석 38)정애산(鄭艾山)
정재규(鄭載圭, 1843~1911)로 애산(艾山)은 호이다. 자는 영오(英五)ㆍ후윤(厚允), 호는 노백헌(老柏軒), 본관은 초계(草溪)이다.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의 문인이다.
주석 39)정월파(鄭月波)
정시림(鄭時林, 1839~1912)으로 월파(月波)는 호이다. 자(字) 백언(伯彦), 본관은 광산(光山)이다.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의 문인이다.
주석 40)기송사(奇松沙)
기우만(奇宇萬, 1846~1916)으로 송사(松沙)는 호이다. 자는 회일(會一), 본관은 행주(幸州)이다. 기정진(奇正鎭)의 손자이다.
주석 41)한……것〔一瓢之飮〕
안빈낙도의 삶을 뜻한다. 공자가 이르기를 "한 대그릇의 밥과 한 표주박의 마실 것으로 누추한 골목에 사는 것을 사람들은 그 근심을 견디지 못하건만, 안회는 그 즐거움을 바꾸지 않으니, 어질구나, 안회여!〔一簞食, 一瓢飮, 在陋巷, 人不堪其憂, 回也不改其樂, 賢哉回也!〕"라고 하였다. 《論語 雍也》
주석 42)관례(冠禮)
원문의 '돌변(突弁)'으로, 20세가 되어 관(冠)을 쓰는 것을 가리킨다. 《시경》 〈보전(甫田)〉에 "예쁘고 아름다운 머리 딴 총각을 얼마 후에 보면 돌연 관을 쓰고 있다.〔婉兮孌兮, 總角丱兮, 未幾見兮, 突而弁兮.〕"라고 하였다.
新川閔君遺事
宗族稱孝焉。鄕黨稱悌焉。吾聞其語矣。吾見其人矣。優遊以法。慕賢而容衆。吾聞其語矣。吾見其人矣。故新川閔君祐植世仲。其人也。君生於詩禮法拂之家。長於艱難辛苦之中。躬耕手鋤。以供親旨。餘日涉獵經史。從事於古人爲己之業。旣而從崔勉庵鄭艾山鄭月波奇松沙往復講磨。以博其義理之趣。以天資之美。承襲乎家庭之傳。擩染乎師友之助。其立心行已。酬人處物。粲然有條。毅然有節。平居恬靜簡黙。不妄言笑。不妄出入。非其力不食。非其義不取。不俯仰於世。不趨附於時。惟一瓢之飮。一床之書。其畢生家計也。潛身斂迹。闇然自修。內而不失其歡心。外而不失其令聞。知不知無不一口推詡。壬寅三月二十八日考終。距癸亥寅降。得年纔四十。葬菊秀峯子坐原。閔氏系出驪興。自羅至麗。名碩相望。爲東方鉅族。至諱懷參。號義庵。是爲落南之祖。於君爲十五世。曾祖諱致祿。祖諱士鎬。考諱泳坤。妣南平文氏某女。生考諱泳碩。妣全州李氏棕秀女。吾娶宜寧南氏其女。繼娶濟州梁氏某女。二男丙夏丙燁。余與君爲忘年莫逆之契。而幽明一別爲八九年。丙夏旣冠而來。以其家狀。請爲一言之役。嗚呼。不見君久矣。今見其孤孩漸長。至於突弁。悲愴之感。不覺潛涕。且以稚妙之年。能知闡述先徽。又能訪問先友。奇事奇事。未就之志。其將有大終之日也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