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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21
  • 유사(2)(遺事(2))
  • 운계 김공 유사(雲溪金公遺事)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21 / 유사(2)(遺事(2))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21.0001.TXT.0015
운계 김공 유사
공의 휘는 기현(奇鉉)이고, 자는 선화(善華)이며, 호는 운계(雲溪)이다. 김씨의 선계는 광산(光山)에서 나왔으니, 신라의 왕자 휘 흥광(興光)이 처음으로 광산에 거주하였다. 이로부터 10여 대(代)에 걸쳐 평장사(平章事)를 지냈는데, 문안공(文安公) 휘 양감(良鑑)과 문정공(文正公) 휘 태현(台鉉)이 가장 유명하였다. 본조에 들어와서 휘 여정(厲精)은 과거에 급제하여 한성 판윤(漢城判尹)을 지냈다. 이분으로부터 3대를 전해 내려온 휘 처겸(處謙)은 호가 육행당(六行堂)으로 성균관에 올랐고, 부호군(副護軍)를 지냈으며, 광산에서 추성(秋城 담양(潭陽))으로 옮겨 우거하였다. 이분으로부터 3대를 전해 내려온 휘 응(應)은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고, 훈도(訓導)를 지냈다. 이분이 낳은 휘 대기(大器)는 호가 만덕재(晩德齋)로, 사계(沙溪) 김선생(金先生)을 스승으로 섬겨 경학(經學)과 행의(行義)로 한 시대에 중망을 받았으며, 구산사(龜山祠)주 27)에 배향되었다. 이분으로부터 2대를 전해 내려온 휘 성준(聲駿)은 병자란(丙子亂) 뒤에 복천(福川 동복(同福))의 성산(星山) 아래에 은둔하여 벼슬에 나아갈 뜻을 접은 채 산수(山水)에 자취를 의탁하였다. 이분이 낳은 휘 이초(履初)는 효행으로 명성이 났고, 이분이 낳은 휘 광속(光涑)은 의로운 행실로 조정에 알려져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증직되었으니, 공에게 5대조가 된다. 고조의 휘는 덕조(德祖)이고, 증조 휘 백일(百鎰)은 호는 난산(蘭山)이며, 조부 휘 문추(文秋)는 호가 월천(月川)으로 세상에 은덕(隱德)이 있었다. 부친 휘 재택(在澤)은 호가 애산당(愛山堂)으로, 효우(孝友)와 문학으로 당시에 중망을 받아 여러 차례 천거에 올랐으며, 응교(應敎) 정희(鄭㵙)주 28)가 그의 행장을 짓고,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주 29)이 그의 묘갈명을 지었다. 모친 광주 안씨(廣州安氏)는 방옥(邦玉)의 따님으로 부덕(婦德)이 있었다. 철종(哲宗) 갑인년(1854) 7월 27일에 복천의 난산리(蘭山里)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영특하여 이미 성인으로서의 의절과 모습이 있었으니, 7세 때 대인공(大人公 부친)이 부모의 상을 당하고 다른 형제가 없었는데, 그의 물 뿌리고 씻는 의절과 제기를 진설하는 의식이 한결같이 대인의 뜻과 같았다. 평소에 아침저녁으로 문안드리는 일을 반드시 부지런히 하였고, 응대할 때에는 반드시 공손하였으며, 맛있는 음식을 얻으면 먼저 먹은 적이 없었다. 어버이의 병환을 간호할 때에는 자신의 몸으로 궤안을 대신하며 밤낮으로 곁을 떠나지 않았고, 상사(喪事)를 치를 때에는 애통함이 의례보다 더하였고, 인정과 형식이 모두 지극하였으며, 제사지내는 날을 만났을 때에는 질병이 있는 경우가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 대신 제사지내게 한 적이 없었고, 정성과 정결을 다하여 여재(如在)주 30)의 뜻을 다하였다. 소년 시절부터 학문에 전심하여 사자(四子 사서(四書))와 육경(六經)에 대해 성대하게 암송하는 부분이 매우 많았고 연구가 매우 정밀하여 강학과 토론에 드러나고 저술에 나타난 것들이 모두 찬연히 빛나 볼 만하였다. 처음에는 공령(功令 과거 공부)을 업으로 삼았으나 어버이가 돌아가신 뒤에는 마침내 다시는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으며, 문을 닫아걸고 종적을 감추어 서적을 자신의 즐거움으로 삼았다. 평상시 거처할 때에는 의복 띠를 반드시 바르게 하고 용모를 반드시 단정히 하였으며, 책상의 서책은 가지런하게 정돈하였고, 비록 벼루와 먹, 편지처럼 작은 물건이라 하더라도 일정한 곳에 두어 어지럽게 놓아둔 적이 없었다. 일상생활에 필요한 그릇과 집기는 힘써 질박함을 따랐고, 즐기며 좋아할 만한 화려한 물건이나 먼 곳에서 나는 진귀하고 기이한 물건은 일찍이 한 번도 몸에 접하지 않았고 한 번도 집안에 들인 적이 없었다. 남전 여씨(藍田呂氏)의 향약(鄕約)주 31)을 모방하여 동내 사람을 권면하고 이끌었으며, 항상 집이 가난하고 어버이가 늙어 사방으로 유학하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기다 만년에 송사 기공(기우만)을 따르며 이택(麗澤)주 32)의 뜻을 붙였다. 원근의 분묘(墳墓)를 빠짐없이 살피고 청소하였으며, 묘갈(墓碣)을 갖추어 표지(表誌)하고 묘전(墓田)을 두어 향사(享祀)하였으며, 묘실(墓室)을 수선하여 우러러 사모하였다. 벗을 사귐에 그 사람의 선(善)ㆍ불선(不善)만을 볼 뿐, 부귀와 빈천에 따라 취하거나 버리지 않았으며, 말과 낯빛을 바르게 하여 일찍이 아부하는 뜻이 없었고, 또한 특이한 행실도 없었다. 이 때문에 안팎에서 서로 믿고, 먼 사람이든 가까운 사람이든 모두 따랐다. 갑오년(1894) 비류(匪類)의 난(동학 농민 운동) 때에는 공이 마을 사람들에게 난에 물들지 말도록 경계하여 사람들이 많이 그에게 힘입었다. 일찍이 여러 자제들에게 경계하여 말하기를, "'충신근근(忠信勤謹)' 네 글자는 진실로 몸을 지키는 데 으뜸인 부적이니, 절대로 잠시라도 몸에서 떠나게 해서는 안 된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사군자(士君子)는 의로운 행실을 앞세우고 문예(文藝)를 뒤로 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문예의 명성이 한 시대에 으뜸이 된다 한들 어찌 귀하게 여길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임진년(1892)에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에 제수되었고, 다음해에 돈녕부 도정(敦寧府都正)에 올랐으며, 병오년(1906) 4월 15일에 세상을 떠났으니, 본방(本坊)의 서촌(西村) 금옥동(金屋洞) 건좌(乾坐)에 안장하였다. 부인 신안 주씨(新安朱氏)는 양홍(陽鴻)의 따님으로, 2남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영계(永桂)ㆍ영학(永鶴)이고, 딸은 창원(昌原) 정장섭(丁章燮)에게 출가하였으며, 손자는 모두 어렸다. 아아, 나는 공과 같은 시대에 같은 지역에 살았음에도 하늘 끝과 땅 모퉁이처럼 떨어져 지내다 갑자기 오늘과 옛날처럼 딴 세상의 사람이 되었는데, 오늘 그의 가장(家狀)을 읽게 되니 미치지 못한 추앙의 회포가 곱절이나 절실해진다. 영계가 나에게 글을 청하여 세상에 길이 전하려고 계획하였는데, 사양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기에 대략 전말을 서술하였다.
주석 27)구산사(龜山祠)
송순(宋純)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전라남도 담양군 수북면 남산리에 창건한 뒤에 송정순(宋庭筍)과 김언욱(金彦勗) 송희경(宋希璟)·김응회(金應會)·이안눌(李安訥)·송징(宋徵)·김대기(金大器)나무춘(羅茂春)임광필(林光弼)을 추가 배향하였는데,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이전에 화재로 전소되어 복원하지 못하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주석 28)응교(應敎) 정희(鄭㵙, 1821~?)
고종2년(1865)에 식년시 을과(乙科)에 급제하여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 등을 거쳐 고종 22년(1885) 응교에 제수되었다.
주석 29)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1846~1916. 본관은 행주(幸州)이고, 자는 회일(會一)이며, 송사(松沙)는 그의 호이다. 전라남도 장성 출신으로 조부 기정진(奇正鎭, 1798~1879)에게 학업을 이어받아 일찍이 문유(文儒)로 추앙받았으며,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이어 단발령이 내려지자 의병을 일으켜 호남창의 총수로 활약하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주석 30)여재(如在)
부친이 계신 듯 제사지내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논어》 〈팔일(八佾)〉에 "공자는 제사를 지낼 적에 선조가 계신 듯이 하였다.[祭如在]"라는 구절에서 유래하였다.
주석 31)남전 여씨(藍田呂氏)의 향약(鄕約)
송(宋)나라 때 남전현(藍田縣)의 여대충(呂大忠)ㆍ여대방(呂大防)ㆍ여대균(呂大鈞)ㆍ여대림(呂大臨) 등 여씨(呂氏) 4형제가 고을 사람들과 지키기로 약속한 자치 규범으로, "덕업을 서로 권면하고, 과실을 서로 바로잡아 주고, 예의의 풍속으로 서로 사귀고, 어려울 때 서로 돕는다.[德業相勸, 過失相規, 禮俗相交, 患難相恤.]"라는 네 조항으로 되어 있다. 《小學 卷6 善行》
주석 32)이택(麗澤)
서로 연결되어 있는 두 못을 말하는 것으로, 서로 물을 대주듯이 붕우 간에 서로 강습하며 도움을 주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주역(周易)》 〈태괘(兌卦) 상(象)〉에 "두 못이 연결되어 있는 형상이 태(兌)이니, 군자가 이를 본받아 붕우 간에 강습한다.[麗澤兌, 君子以朋友講習.]"라는 말에서 유래하였다.
雲溪金公遺事
公諱奇鉉。字善華。號雲溪。金氏系出光山。新羅王子諱興光。始居光山。自此官平章事者爲十餘世。文安公諱良鑑。文正公諱台鉉。最著焉。入本朝。有諱厲精。登科官漢城判尹。三傳至諱處謙。號六行堂。登庠官副護軍。自光寓于秋城。三傳諱應中。司馬官訓導。是生諱大器。號晩德齋。師事沙溪金先生。經學行義。望重一世。配享龜山祠。二傳諱聲駿。丙子亂後。遯于福川星山之下。絶意仕進。托跡山水。是生諱履初。孝行著聞。是生諱光涑。以行義聞于朝。贈童蒙敎官。於公爲五世祖也。高祖諱德祖。曾祖諱百鎰。號蘭山。祖諱文秋。號月川。世有隱德。考諱在澤。號愛山堂。孝友文學。見重於時。累登剡薦。鄭應敎㵙奇松沙宇萬撰狀與碣銘。妣廣州安氏邦玉女。有婦德。以哲宗甲寅七月二十七日生公于福川之蘭山里。公幼而岐嶷。已有成人儀樣。七歲大人公遭艱。而無他兄弟。其灑濯之節。陳設之儀。一如大人之意。平居晨昏必勤。應對必恭。得一味。未嘗先食。侍親癠。以身替几。晝夜不離。執喪哀毁踰禮。情文俱至。遇忌諱之辰。非有疾病。未嘗代人。致誠致潔。以盡如在之意。自少專心學問。於四子六經。誦殷甚多。硏究甚精。以至著於講討。發於著述者。皆粲然可觀。初業功令。親沒之後。遂不復應擧。杜門斂迹。以書籍自娛。常居衣帶必正。容貌必端。几案書冊。秩秩整勅。雖硯墨札翰之微。置有常處。未嘗混亂。若其器用什物。務從質樸。至於華麗玩好及遠方珍異之物。未嘗一接於身。一入於家。倣藍田呂氏鄕約。勸導坊內。嘗以家貧親老。不得遊學四方爲恨。晩從松沙奇公以附麗澤之義。遠近墳墓。省掃無闕。具墓碣以表誌之。置墓田以享祀之。修墓室以瞻慕之。其交朋友。視其人之善不善而已。不以富貴貧賤而有所取捨焉。正言正色。未嘗有阿附之意。亦未有崖異之行。是以內外相信。遠近咸服。甲午匪類之亂。公戒鄕里勿染。人多頼之。嘗戒諸子曰。忠信勤謹四字。實爲持身之元符。切不可斯須去身。又曰。士君子。當先行義而後文藝。不然。文名冠一世。何足貴哉。壬辰除義禁府都事。翌年陞敦寧府都正。丙午四月十五日考終。葬于本坊西村金屋洞乾坐。配新安朱氏陽鴻女。生二男一女。男永桂永鶴。女昌原丁章變。孫男皆幼。嗚呼。余與公同世矣同省矣。而厓角落落。遽作今古隔世之人。今讀其家狀。倍切追仰靡逮之懷。永桂請余文爲不朽計。辭不獲已。略敍顚末云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