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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남근현대문집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21
  • 유사(2)(遺事(2))
  • 송곡 이군 유사(松谷李君遺事)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21 / 유사(2)(遺事(2))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21.0001.TXT.0014
송곡 이군 유사
군의 휘는 승일(承一)이고, 자는 성만(成萬)이며, 본관은 광산(光山)이고, 송곡(松谷)은 그의 호이다. 고려조 상서좌복야(尙書佐僕射) 휘 순백(珣白)을 비조(鼻祖)로 삼아 4대를 전해 내려온 휘 선제(先齊)는 호가 필문(蓽門)으로, 벼슬이 대제학(大提學)에 이르렀고 경창부원군(慶昌府院君)에 봉해졌다. 이분이 낳은 휘 조원(調元)은 호가 청심당(淸心堂)으로, 은일(隱逸)로 여러 번 조정의 부름을 받아 이조 참의(吏曹參議)에 이르렀고, 연산조(燕山朝) 때에 상소하였으나 채택되지 않자 그날로 벼슬을 버리고 돌아갔다. 이분이 낳은 휘 호선(好善)은 호가 면재(勉齋)로, 벼슬이 대사성(大司成)에 이르렀다. 이분들이 모두 그의 현조(顯祖)이다. 고조 영복(永複)은 예조 참판(禮曹參判)에 증직되었고, 증조는 광국(光國)이며, 조부 한미(漢微)는 호가 송와(松窩)로, 공조 참판(工曹參判)에 증직되었다. 부친 남호(南鎬)는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증직되었고, 모친 장택 고씨(長澤高氏)는 진오(鎭五)의 따님으로, 철종(哲宗) 병진년(1856) 3월 13일에 신산리(薪山里)에서 군을 낳았다. 군은 용모와 체구가 대단히 크고 성격과 기질이 호쾌하게 시원스러워 그야말로 천인(千人)을 능가하는 기상이 있었는데, 성동(成童)이 되자 서책을 시렁에 묶어 놓은 채 날마다 젊은 협객들과 함께 말을 달리고 매를 날리며 놀이에 빠져 돌아오지 않았다. 그의 대인(大人)이 이를 근심스럽게 여기고 족제(族弟) 지남공(芝南公)에게 말하기를, "옛적에 자식을 바꾸어 가르쳤으니, 군이 그를 타일러서 바른 길로 돌아오게 할 수 없겠는가?" 하였다. 지남공이 이에 군을 불러 말하기를, "소는 밭을 가는 동물인데, 만약 밭을 갈게 할 수 없고 사람을 들이받는 것을 잘한다면 너는 그 소를 좋아하겠느냐? 말은 타는 동물인데, 만약 사람을 태울 수 없고 사람을 차고 무는 것을 잘한다면 너는 그 말을 좋아하겠느냐?" 하니, 군이 대답하기를, "좋아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지남공이 말하기를, "해만 있고 유익함이 없으면 소나 말조차도 없애버리는데, 하물며 사람으로서 세상에 해만 있고 사람에게 유익함이 없다면 성인(聖人)의 처벌을 면할 수 있겠느냐? 또 너에게 자식이 있는데 효도하지 않는다면 너의 마음이 편안하겠느냐? 너에게 동생이 있는데 공경하지 않는다면 너의 마음이 편안하겠느냐? 하니, 군이 대답하기를, "편안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지남공이 말하기를, "너의 마음이 이미 편안하지 않은데, 너의 부모와 형만 어찌 마음에 편안할 수 있겠느냐. 옛적에 마 복파(馬伏波)는 만 리 먼 곳에서 편지를 보내어 형의 아들이 경박한 협객들과 소통하는 것을 훈계하였고주 21), 제갈 무후(諸葛武侯)주 22)는 대군을 손에 쥐고 몸이 전쟁의 진영에 있으면서도 그의 아들에게 몸을 닦고 덕을 기르도록 훈계하였으니, 대체로 진실로 정대한 영웅들은 깊은 못 앞에 선 듯 얇은 얼음을 밟는 듯 전전긍긍한 가운데에서 나오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지금 너는 경박한 협객의 부류들과 떠돌아다니며 노는 습관을 만들어 위로는 부모에게 근심을 끼치고 아래로는 처자식에게 고통을 주며 집안의 화를 불러들이고 자기 자신을 망치고 있다. 무릇 사람의 마음이란 모두 다 편안함을 바라고 위험을 바라지 않으며, 복을 구하고 재앙을 구하지 않는 법인데, 너는 참으로 어떤 사람이기에 유독 위험을 편안하게 여기고 재앙을 이롭게 여기느냐?" 하니, 군이 다 듣기도 전에 깜짝 놀라고 빨리 깨달아 마침내 말은 저자로 돌려보내고 매는 들로 날려 보내주었다. 머리를 숙이고 기운을 가라앉힌 채 책을 끼고 학업을 청하여 《소학》부터 시작해서 사자(四子 사서(四書))와 육경(六經)에 미쳐갔다. 겨울에는 화롯불을 쬐지 않았고, 여름에는 부채질을 하지 않았으며, 여러 해 동안 밤에 베개를 베지 않았다. 닭이 울 때에 일어나 조부모님과 부모님의 침소에 문안을 드리며 추운지 더운지를 반드시 조심스럽게 살폈고 응대는 반드시 공경스럽게 하였으며, 부엌에 들어가 밥을 짓고 맛있는 반찬을 장만하여 식사를 올리고 내림에 때에 맞추어 나아가고 물러났다. 평소에 한가한 사람을 만나지 않았고 한가로운 대화를 나누지 않았으며, 묵은 솜옷을 입고 거친 밥을 먹으며 담박한 것을 분수에 달게 여겼다. 여기저기 드나들며 집안일을 돌보고 곁에서 시중들며 물심양면으로 봉양을 다하였으며, 무자년(1888)에 모친상을 당해서는 상사(喪事)를 치르는 의절에 예법과 슬픔이 모두 지극하였다. 다음해에 병을 얻어 12월 10일에 세상을 떠나니, 향년 34세였다. 지동(池洞) 앞 산기슭 미좌(未坐) 언덕에 안장하였다. 아아! 공자가 "중도를 행하는 사람을 얻어서 함께하지 못한다면 반드시 뜻이 고원하거나 고지식하게 스스로를 지키는 사람[狂狷]과 함께할 것이다.주 23)"라고 하였으니, 대체로 고원하고 고지식한 사람의 의지와 기개는 우뚝하게 견고하고 강인하여 함께 나아가 성취를 이룰 수 있다. 예로부터 사업과 공명이 위대했던 인물은 이와 같은 기상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니, 우리나라에서는 말을 베어버린 김 각관(金角干)주 24)과 검을 꽂아 놓은 채 정진했던 이일재(李一齋)주 25)와 같은 사람이 모두 이러한 인물들이다. 군은 뛰어난 자질로 스스로 깨달아 잘못을 고침이 우레처럼 맹렬하고 선으로 옮겨감이 바람처럼 신속하였고, 한번 주장을 세워 죽을 때까지 물러나지 않았으니, 돌아보건대 전일의 잘못은 햇빛에 나타난 눈이나 금옥(金玉)에 난 흠조차도 되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그 자질이 옛날 광견(狂狷)이라 일컬었던 사람과 부합한 점이 있었지만, 지남공이 그를 지도하여 이끌어주지 않았다면 끝내 혼미하여 회복하지 못하게 되었을 줄 또 어찌 알겠는가. 학문을 연마하고 침잠하여 확충하고 분발해 간다면 앞으로 수립할 것이 헤아릴 수 없을 것인데, 운수가 궁박하고 수명이 짧아 중도에 요절하였으니, 어찌 애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것으로 보건대, 세상에 뛰어난 재주를 지녔음에도 지도하여 이끌어줌을 얻지 못하거나 천수를 얻지 못한 사람이 또 얼마나 많겠는가. 그러나 이끌어줌을 받지 못하고 천수를 얻는 것은 천수를 얻지 못하고 이끌어줌을 받는 것만 못하니, 공자의 이른바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괜찮다.주 26)"라는 말을 보건대, 군은 유감이 없을 것이다. 부인 하동 정씨(河東鄭氏)는 재후(在厚)의 따님으로 3남을 두었으니, 계휴(桂休)ㆍ옥휴(玉休)ㆍ태휴(泰休)이다. 태휴가 가장(家狀)을 받들고 와서 후세에 길이 전할 글을 부탁하였다.
주석 21)마 복파(馬伏波)는 …… 훈계하였고
마 복파는 후한(後漢) 때 복파장군(伏波將軍)을 지낸 마원(馬援)으로 조카 마엄(馬嚴)과 마돈(馬敦)이 경박한 유협(遊俠)들과 사귀며 남을 비평하기를 좋아하자 편지를 보내어 호협(豪俠)한 두보(杜保)를 본받지 말고 신중(愼重)한 용술(龍述)을 본받으며 입을 조심하라고 간절하게 훈계하였다.《後漢書 卷24 馬援列傳》 《小學集註 卷5 嘉言》
주석 22)제갈 무후(諸葛武侯)
삼국시대 촉한(蜀漢)의 정치가이자 군사가인 제갈량(諸葛亮)으로, 무후(武侯)는 그의 시호이다.
주석 23)중도를 …… 것이다
《논어》 〈자로(子路)〉에 나오는 말이다.
주석 24)말을 …… 김 각관(金角干)
김 각관은 신라 진평왕 시대에 각간을 지낸 김유신(金庾信, 595~673)을 말한다. 김유신이 화랑시절에 기녀 천관녀(天官女)에 정신이 팔려 수련을 게을리하였다가 어머니 만명부인의 훈계(訓戒)를 듣고 다시는 천관녀를 만나지 않으리라 맹세하였는데, 어느 날 밤 말이 술에 취한 김유신을 태우고 예전 습관처럼 천관녀의 집 앞에서 걸음을 멈추자 김유신이 술이 깬 뒤에 검(劍)으로 말의 목을 베었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破閑集》
주석 25)검을 …… 이일재(李一齋)
이일재는 이항(李恒, 1499~1576)으로, 일재는 그의 호이다. 본관은 성주(星州)이고, 자는 항지(恒之)이며,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젊은 시절에 무관에 뜻을 두었다가 30세가 되었을 때 백부로부터 깨우침을 받아 스스로 학문을 시작해 성현의 글을 섭렵하였고, 주희(朱熹)의 〈백록동강규(白鹿洞講規)〉를 읽고는 더욱 분발해 도봉산 망월암(望月庵)에 들어가서 수년을 독학해 깨달은 바가 컸다고 한다. 당시의 학자 백인걸(白仁傑)은 이항의 학문이 조식(曺植)에게 비길만하다고 칭찬하였다. 저서로는 《일재집(一齋集)》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일재에 관한 일화가 몇 가지 전해지는데 그 중 하나로 무관으로서의 뜻을 접고 학문할 당시 칼을 옆에 꽂고서 정신일도하에 공부를 했다고 한다.
주석 26)아침에 …… 괜찮다
《논어》〈이인(里仁)〉에 나오는 말이다.
松谷李君遺事
君諱承一。字成萬。貫光山。松谷其號也。以麗朝尙書佐僕射諱珣白爲鼻祖。四傳諱先齊。號蓽門。官至大提學封慶昌府院君。生諱調元。號淸心堂。以隱逸累徵。至吏曹參議。燕山朝。抗疏不用。卽日賦歸。生諱好善。號勉齋。官至大司成。皆其顯祖也。高祖永複。贈禮曹參判。曾祖光國。祖漢微。號松窩。贈工曹參判。考南鎬。贈戶曹參判。妣長澤高氏鎭五女。哲宗丙辰三月十三日。生君于薪山里。容體碩大。性氣豪爽。鬱鬱有凌駕千人之氣。至成童。束閣書冊。日與俠少輩。馳馬飛鹰。流連不返。其大人憂之。謂族弟芝南公曰。古者易子而敎。君未可爲之諭之使返於正耶。芝南乃招以語曰。牛耕者也。若不可耕而善博觸人。則汝愛之乎。馬乘者也若不可乘而善踶囓人。則汝愛之乎。對曰未可也。曰有害而無益。牛馬且去之。況乎人而有害於世。而無益於人。則其可免於聖人之誅乎。且汝有子而不孝。則汝心安乎。汝有弟而不恭。則汝心安乎。對曰未可也。曰汝之心旣不安。則爲汝之父兄者。獨可以安於心乎。昔馬伏波萬里致書。以戒兄子之通輕俠。諸葛武侯手握重兵。身在戰陣。而戒其子以修身養德。蓋古之眞正大英確。無非自戰戰兢兢臨深履薄中出來也。今與輕俠之流。作浮浪之習。上以貽父母之憂。下以貽妻子之苦。招家戶之禍。速己身之亡。夫人之情。莫不欲安而不欲危。求福而不求災。汝乃何人。獨安其危而利其災也。聽未了。蹶然而驚。幡然而悟。遂歸馬於市。飛鷹於野。屈首降氣。挾冊請業。自小學爲始。及於四子六經。冬不爐。夏不扇。夜不枕者數年。雞鳴而起。問寢重廷。寒暄必謹。應對必恭。八廚滫灑。備辦甘毳。食上食下。進退須時。平居不接閒人。不打閒話。縕袍麤糲。分甘淡泊。出入幹蠱。左右服勞。以致志物之養。戊子遭內艱。執喪之節。易戚兩至翌年得疾。以十二月十日終。得年三十四。葬池洞前麓負未之原。嗚呼。孔子曰。不得中行而與之。必也狂狷乎。蓋狂狷志氣。磊落堅忍。可與進取也。自古人物。有大事業大功名者。無不有這般氣象。在我東如金角干之斬馬。李一齋之揷釼。皆是也。君以魁傑之姿。能自覺悟。改過如雷之猛。遷善如風之迅。一立脚跟。底死不退。回視前日之失。不足爲見睍之雪。金玉之瑕也。此其姿質。有合於古所稱狂狷者。而非有芝南公爲之指引.則又安知終不遠復也耶。磨礱浸灌。充拓而奮張之。則前頭樹立。有不可量。而運窮數局。中途夭閼。豈不可惜以此觀之。世之有英材。而不得其指引。不得其年壽者。又何限焉。然失指引而得年壽。不若失年壽而得指引。觀孔子所謂朝聞夕可之語。君可以無憾矣。齊河東鄭氏在厚女。擧三男。桂休玉休泰休。泰休奉家狀。有不朽之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