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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21
  • 유사(2)(遺事(2))
  • 계사 강공 유사(溪沙姜公遺事)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21 / 유사(2)(遺事(2))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21.0001.TXT.0013
계사 강공 유사
내가 시골 마을 사이에 있으면서 매번 여러 사람들이 모여 교유하며 이야기하는 말을 들을 때 마다 마치 한 입에서 나오듯 계사(溪沙) 강공(姜公)이 선인 군자(善人君子)라고 자자하게 칭송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하루는 내가 방문하여 인사를 드리고 살펴보니, 사는 곳이 매우 외졌고 집은 질박하여 누추하였으나 신발이 뜰을 채우고 의관을 갖춘 사람이 자리에 가득하였으며, 공은 편한 복장에 촌스러운 두건을 쓰고서 물이 흐르듯 자연스럽게 응접하여 굶주린 사람은 밥을 먹게 하고, 목마른 사람은 물을 마시게 하며, 추운 사람은 덮어주고, 병든 사람은 소생시켜 주어 즐거워하고 기뻐하지 않는 사람이 없이 각기 그 바람을 충족시켜 주었다. 그런데 20여 년이 지난 뒤에 공의 손자 흥섭(興燮)이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보여주고 인하여 후세에 길이 전할 글을 부탁하였다. 아아, 은미한 것을 드러내고 숨겨진 것을 밝혀 훌륭한 행실과 위대한 절개가 사라져 없어지지 않게 하는 것, 이것이 저술가의 필법이니, 나의 문장이 비록 이를 감당할 수 없겠지만, 예전부터 평소 공경하고 염모했던 입장에서 어찌 차마 적합한 사람이 아니라고 하여 사양할 수 있겠는가. 공의 휘는 의영(義永)이고, 자는 인교(仁敎)이며, 진주(晉州) 사람이다. 시조(始祖) 휘 이식(以式)은 병마원수(兵馬元帥)로 수 양제(隋煬帝)의 동쪽 정벌 군사를 막았다. 휘 사진(思進)은 평장사(平章事)를 지냈고, 청성군(靑城君)에 봉해졌으며, 시호가 원충(元忠)이다. 휘 구만(九萬)은 양천군(陽川君)에 봉해졌고, 시호가 정절(正節)이며, 처음으로 진주의 대봉산(大鳳山) 아래에 거주하였다. 휘 희경(希經)은 우리 조선조에 들어와 직제학(直提學)을 지냈고, 시호가 문성(文成)이다. 휘 군보(君寶)는 봉산군(鳳山君)에 봉해졌고, 시호가 문경(文敬)이다. 휘 한(漢)은 호가 금재(琴齋)로 현감(縣監)을 지냈는데, 고을 사람들이 사당을 세워 제사 지냈다. 휘 위구(渭龜)는 호가 모헌(慕軒)으로, 임진왜란 때 조중봉(趙重峯 조헌(趙憲)) 선생을 따라 금산(錦山)에서 절개를 지키며 전사하였다. 이들 모두가 그의 이름난 선조들이다. 증조 휘 이희(爾熙)는 사복시 정(司僕寺正)에 증직되었고, 조부 휘 재령(載齡)은 좌승지(左承旨)에 증직되었으며, 부친 휘 사회(士會)는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증직되었고, 모친 남평 문씨(南平文氏)는 성인(聖仁)의 따님이다. 공은 순묘(純廟) 정해년(1815) 4월 12일에 태어났다. 천성이 인자하고 너그러운데다 온후하며 마음이 여리고 자애로워 부모를 섬김에 효성과 봉양이 모두 지극하였고, 형제와 친척을 대함에 은덕과 정의가 융성하고 흡족하였으며, 벗들과 사귐에 신뢰와 의리의 행실이 드러났고, 곤궁한 사람들을 구휼하고 없는 사람들을 도와주는 데에 더욱 급급하여 집안의 재력이 미치지 못함을 알지 못했다. 경서와 사서(史書)를 널리 섭렵하여 문사(文詞)가 넉넉하고 풍부하였지만 벼슬을 구해 나아가는 것에 담담하였다.
조비(祖妣) 문씨(文氏)의 열행(烈行)과 8대조 교관공(敎官公)의 효행(孝行), 9대조 모재공(慕齋公)의 충절(忠節)이 우뚝하고 뛰어났음에도 오랫동안 표창을 받지 못한 것을 공이 항상 한스럽게 여겼는데, 지난 무오년(1858)에 향도(鄕道)의 추천을 통해 증직과 정문(旌門)을 세우게 하는 은전을 받자 여론이 경사라고 칭하면서 모두 공의 효성으로 그렇게 된 것이라 하였다. 사곡산(沙谷山) 중에 집을 지은 것은 수석(水石)의 한적한 곳에서 유유자적하게 만년을 보내려는 마음을 부치기 위한 계책이었는데, 빈객과 벗들이 매일 찾아와 글과 술이 비지 않은 채 밤낮으로 수창하며 흥취와 즐거움이 넘쳐났다. 흉년을 만나 빈객 중에 병든 몸을 이끌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공이 직접 약을 조제하여 소생시킨 사람이 수없이 많았고, 낫지 못하고 죽은 사람이 또 십여 사람이었는데, 공이 습렴(襲斂)을 갖추어 장례를 지내주었다. 이웃 마을에 굶주린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수시로 곡식을 빌려주어 밥 짓는 불이 끊어지지 않게 하였으며, 어떤 한 부인이 연로한데다 의탁할 곳이 없자 더욱 가엾게 여겨 자신의 집에 머물게 하였다. 임종할 날이 다가오자 빚 문서를 가져와 불에 태우면서 말하기를, "생전에 사람들에게 이롭게 한 것이 없는데, 어찌 죽고 나서 폐해를 끼칠 수 있겠는가." 하였다. 계사년(1893) 7월 18일에 세상을 떠나니, 사곡의 안산(案山) 경좌 언덕에 안장하였다. 부인 죽산 안씨(竹山安氏)는 명천(命天)의 따님이고, 계배(繼配) 광산 노씨(光山盧氏)는 익필(益弼)의 따님이다. 안씨는 1녀를 두었는데, 공주(公州) 이계무(李季茂)에게 출가하였다. 노씨는 1남2녀를 두었는데, 아들 병신(秉甡)은 참봉(參奉)이고, 딸은 하동(河東) 정지현(鄭祉鉉)과 제주(濟州) 양중묵(梁仲黙)에게 출가하였다. 손자는 흥섭이고, 나머지는 모두 어렸다. 이것이 가장 내용의 대략이다. 아, 내가 일찍이 한 번 나아가서 보고 느낀 것은 단지 공이 쌓은 행실 중의 한 가지 일일뿐이지만, 이 한 가지 일로 가장 전체에 기술된 내용이 공에 대한 실제의 말이 아닌 것이 없음을 알 수 있으니, 탐욕이 날로 불어나고 잔인함이 고질이 되어 가는 때에 공처럼 장후(長厚)하고 너그러운 풍모를 어찌 다시 볼 수 있겠는가. 고인의 유풍을 우러러 추억하니 단지 여생의 감회가 절실해질 뿐이다. 공의 자손들이 더욱 힘써 생전의 법도가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기를 바란다.
溪沙姜公遺事
余在鄕里間。每聞群聚遊談之言。無不以溪沙姜公爲善人君子。藉藉稱道。如出一口。一日余過而拜之。見其洞宇深僻。軒室襆陋。而屣履盈庭。衣冠滿座。公以便服野巾。應接如流。使飢者食之。渴者飮之。寒者庇之。病者蘇之。無不歡悅。各充其願。後二十餘年。公之孫興變。持示家狀。因有不朽之託。嗚呼。顯微闡幽。使至行偉節。不至淪沒。此著家筆法。余之文。雖不足以當此。而在平昔欽艶之地。豈忍以非其人辭。公諱義永。字仁敎。晉州人。始祖諱以式。以兵馬元帥。禦隋焬帝東伐之師諱思進。官平章事封靑城君諡元忠。諱九萬。封陽川君諡正節。始居晉之大鳳山下。諱希經。入我朝。官直提學諡文成。諱君寶。封鳳山君諡文敬。諱漢。號琴齋。官縣監。鄕人立祠享之。諱渭龜。號慕軒。壬辰從趙重峯先生立慬錦山。皆其名祖也。曾祖諱爾熙。贈司僕寺正。祖諱載齡。贈左承旨。考諱士會。贈戶曹參判。妣南平文氏聖仁女。公以純廟丁亥四月十二日生。天性仁恕溫厚。惻怛慈愛。事父母。孝養備至。處兄弟族戚。恩誼隆洽。與朋友交。信義著行。而於賙窮恤匱。尤汲汲焉。不知家力之不逮也。博涉經史。文詞贍富。於干進泊如也。祖妣文氏烈行。八世祖敎官公孝行。九世祖慕齋公忠節。磊落卓絶。而久未見褒。公常恨之。去戊午。因鄕道剡薦。得蒙贈貤表旌之典。物論稱慶。皆以爲公誠孝致然。築室於沙谷山中。以其水石幽閒爲晩年寄敖計也。賓朋日至。文酒不空。日夕酬暢。趣樂津津。遭飢歲。客有曳病而至者。公親調藥餌。使得甦活無數。未愈而死者。又十餘人。公爲具襲斂而葬之。隣里有飢者。必隨時假貸。俾無絶火。有一婦人。年老無托。甚加哀矜。使之寄留。臨歿取債券焚之曰。生而無所利於人。豈可死而貽其弊乎。癸巳七月十八日卒。葬沙谷案山庚坐原。配竹山安氏命天女。繼配光山盧氏益弼女。安有一女。適公州李季茂。盧有一男二女。秉甡。參奉。女適河東鄭祉鉉濟州梁仲黙。孫男與變。餘皆幼。此是狀辭大略也。噫。余之所嘗一造而觀感者。特其積行中一事耳。然以此一事。而知全狀所述。無非其實際語也。貪婪日滋。殘忍成痼。如公長厚寬博之風。安得以復見之耶。追仰遺韻。只切餘生之感。願公子孫益加勉焉。使當日典刑。無墜於地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