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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남근현대문집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21
  • 유사(2)(遺事(2))
  • 봉강 김군 유사(鳳岡金君遺事)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21 / 유사(2)(遺事(2))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21.0001.TXT.0010
봉강 김군 유사
학생 김용희(金龍熙)가 나를 따라 수학하였는데, 하루는 자기 선친의 가장(家狀)을 보여주며 말하기를, "선친께서는 신체가 매우 크고 모습이 매우 헌걸찼습니다. 얼굴은 넓고 입은 컸으며, 눈썹은 치켜 올라갔고, 수염은 아름다웠으며, 목소리는 우렁차 멀리까지 퍼져 나갔고, 말은 어눌하면서도 자상하셨습니다. 그 기상과 풍모가 사람들로 하여금 좋아하게 하였고 싫어할 수 없게 하였으며, 친근하게 하였고 소원하게 할 수 없었습니다. 집에 거처하거나 고을에서 처신할 때에 사람은 친소(親疏)를 따지지 않았고, 일은 쉽든 어렵든 가리지 않으셨으며, 상사(喪事)가 있으면 가련하게 여기며 도와주셨고, 재난과 우환이 있으면 다스리고 보호해 주셨으며, 원통하고 억울한 일이 있으면 풀어주고 구원해 주셨으니, 남의 근심을 걱정하고 남의 즐거움을 즐거워하는 마음으로 힘이 다하도록 주선하는 데 이르지 않은 것이 없으셨습니다. 일을 헤아리는 데 재주가 있으셨고 사람들에게 완곡하게 말씀하시는 데에 뛰어나시어 친척과 친구, 고을과 이웃 마을 사람들이 해결하지 못한 일이 있으면 선친께 자문하여 처리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니, 대체로 분쟁을 해결하고 복잡한 일을 처리하는 데 일반 사람보다 뛰어나셨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밖에서의 의로운 행실로 선생님께서 직접 보셨던 것이 아니신지요? 가친(家親)께서 백부의 양자로 나가 양부모를 섬기실 적에는 한결같이 정성과 삼감으로 그 뜻과 몸을 봉양하시어 수십 년 동안 집안에서 흠잡는 말이 없었으며, 상을 당해서는 슬픔을 다하시고 절기에 따른 예제(禮制)에 남은 유감이 없으셨으며, 제사를 지낼 때에는 정성을 다하시고 제기(祭器)를 씻는 일을 반드시 자신이 직접 하셨습니다. 규방 안에서는 무람없는 습관이 없으셨고, 집안에서는 사치스러운 기풍이 없으셨으며, 집안사람을 근면과 검약으로 다스리셨고, 자손들을 시서(詩書)의 학과에 힘쓰고 현숙한 사람과 친근하게 지내도록 가르치셨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안에서의 의로운 행실로 선생님께서 보셨던 일이 아니신지요? 그러나 밖의 행실로 안의 행실을 미루어 본다면 또한 대략 짐작하여 가늠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세월은 머물러 있지 않아서 선친의 음성과 용모가 날로 멀어지니, 선친에 대한 그리움을 보존하고 추모의 정을 붙이기 위한 것으로 문자의 서술이 또한 없을 수 없습니다. 혹 이를 위해 한마디 말씀을 해 주시는 데에 인색하지 않으시겠지요?" 하였다. 내가 그의 뜻을 가련하게 여겨 차마 사양하지 못하고 이로 인해 말하기를, "나 또한 들은 것이 있다네. 내가 일찍이 그대의 선친과 함께 앉아 있을 적에 어떤 객이 왔는데, 그대의 선친이 친척 집안의 생계 형편을 묻자, 객이 말하기를, '근래에 매우 곤궁합니다.' 라고 하니, 그대의 선친이 말하기를, '이는 좋은 소식이군요. 가난한 선비로 분수를 지키고 상도를 편안하게 여기니 어찌 곤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만약 충족하다고 했다면 반드시 옳지 못한 구함이 있었을 것이니 듣기를 바랐던 것이 아닙니다.' 라고 하였네. 내가 옳은 말이라 여기고 탄복하며 칭찬해 마지않았다네. 또 일찍이 나를 경계시키며 말하기를, '나이가 들고 기운이 쇠약해지면 실수하기가 쉬우니, 만약 독서의 도움이 없다면 어떻게 부지할 수 있겠는가. 공의 근래 생활을 보건대 서책을 대하는 것이 드무니 자못 염려스럽네. 사람이 술을 마실 때에는 반드시 기운으로 술을 이겨야 하는데, 지금 공은 기운이 쇠약함에도 술 마시는 것을 줄이지 않으니 술로 곤욕을 당하지 않겠는가.'
라고 하였으니, 내가 모두 탄복하여 마음에 새겨두었다네. 이 세 가지 말은 그대가 듣지 못했을 것이네. 이것으로 보건대, 이 말 외에도 또 듣지 못한 것이 없을 줄 어찌 알겠는가. 내가 만년에 이웃 마을에서 나의 공부를 도와주는 훌륭한 벗을 하나 얻었다가 근래에 이런 규범과 경계를 듣지 못하여 벗의 마음에도 오히려 한스러움이 없을 수 없는데, 하물며 자손이 된 입장임에랴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들은 것들을 모두 기록하여 가장으로 삼게나." 하였다. 군의 휘는 권일(權一)이고, 자는 권중(權中)이며, 호는 봉강(鳳岡)이다. 김씨(金氏)의 계보는 경주(慶州)에서 나왔으니 신라(新羅) 경순왕(敬順王)이 그 시조이다. 휘 충한(冲漢)은 호가 수은(樹隱)으로 예의 판서(禮儀判書)를 지냈고, 고려 말에 조선에 굴복하지 않아 남원(南原)으로 귀양을 갔으며, 개성(開城) 표절사(表節祠)에 배향되었다. 7대를 전해 내려와 휘 영전(永傳)은 호가 필암(蓽庵)으로 수의부위(修義副尉)를 지냈고, 능주(綾州)의 신산(薪山)에 우거하였다. 이분의 손자 대기(大器)는 호가 경재(警齋)로 진사(進士)이고, 중봉(重峯) 조 선생(趙先生 조헌(趙憲))에게서 수업하였으며, 신산에서 가승동(佳勝洞)으로 옮겨 왔다가 그대로 이곳에 거주하였다. 이분의 아들 명철(名哲)은 임진왜란 때 김대인(金大仁) 장군과 함께 예성산(禮聖山)에 웅거하여 적을 죽이고 이겼으니, 이 일이 읍지(邑誌)에 실려 있다. 고조는 양욱(陽旭)이고, 증조는 사충(思忠)이며, 조부는 종만(鍾萬)이다. 양부는 석원(錫源)이고, 양모 진원 박씨(珍原朴氏)는 동지(同知) 계환(桂煥)의 따님이다. 생부의 휘는 일원(鎰源)이고, 생모 능성 구씨(綾城具氏)는 상길(相吉)의 따님이다. 철종(哲宗) 정사년(1857)과 금상(今上 고종(高宗)) 갑진년(1904) 4월 20일이 군이 태어나고 세상을 떠난 날이다. 부인 공주 이씨(公州李氏)는 시변(時釆)의 따님이다. 자녀는 4남1녀이니, 아들은 봉희(鳳熙)ㆍ학희(鶴熙)ㆍ용희(龍熙)ㆍ인희(麟熙)이고, 딸은 장흥(長興) 임태주(任泰柱)에게 출가하였다. 한우치(閒牛峙)에 장묘지를 썼다가 송석면(松石面) 탄현(炭峴)의 경좌 언덕으로 이장(移葬)하였다. 아아, 군의 인품과 재주가 말세에 보기 드문데 나이가 오십도 되기 전에 갑자기 저 세상으로 떠나 평소에 가졌던 뜻과 사업을 백에 하나도 이루지 못하였으니 비통하고 애석한 마음을 어찌 이길 수 있겠는가. 그러나 난초 가지와 산초 가지가 무성하여 뜰에 가득하고, 용희가 또 뒤를 이어 사문(斯文)에 종사하여 한창 끊임없이 진보하고 있으니, 당시의 뜻을 계승하여 이루어 낼 날이 있지 않을 줄 어찌 알겠는가.
鳳岡金君遺事
金生龍熙從余遊。日以其先親家狀示之曰。先親身幹碩大。體相俊茂廣面大口。軒眉美鬚。聲弘而遠。言訥而詳。其氣象風度。令人可欲而不可惡。可親而不可遠。居家處鄕。人無親疏。事無難易。有死喪則扶戀之。有災患則營護之。有冤枉則伸捄之。其有以憂人之憂。樂人之樂。而周旋竭蹶者。無所不至。長於料事。優於諷人。親戚知舊。隣里鄉黨。事有未決者。無不待以咨處焉。盖其解紛剸劇。有以異於人。此行義之在外者也。非先生之所親見乎。家親出後伯父。事所後。志物之養。一於誠謹。數十年。庭無間言。喪致其哀。而時月之制。無有餘憾。祭致其誠。而漑濯之役。必自執之。閨房之中。無褻狎之習。庭除之間。無奢靡之風。御家衆以勤儉。教子孫以勉課詩書。親近賢淑。此行義之在内者。非先生之所見也。然以外推內。亦可以領略矣。日月不居。音容日遠。所以存其思而寓其慕者。文字之述。亦不可無也。或爲之不吝一言耶。余悲其意而不忍辭。因曰。吾亦有所聞。吾嘗與尊先君坐。有客至。君問其親戚家計活之狀。客曰。近日極困云。君曰。是好消息。以窮儒而守分安常。安有不困。若云充足。則必有所枉求。非所願聞也。余以爲格論。歎賞不已。又嘗戒余曰。年老氣衰。易致失墜。苟非讀書之助。何以扶持。見公近年罕對書冊。殊可慮也。人之飲酒。必須氣以勝之。今公氣衰而飲不減。其不爲酒困乎。余皆歎服而銘佩焉。此三言者。汝之所不聞也。以此觀之。此言之外。又安知無所未聞也。余晚接隣閈。得一強輔。近不聞此等規警。朋友之心。猶不能無恨。況爲子孫地乎。竝記所聞者。爲之狀。君諱權一。字權中。號鳳岡。金氏系出慶州。新羅敬順王。其始祖也。至諱冲漢。號樹隱。官禮儀判書。麗末不屈。謪南原。享開城表節祠。七傳諱永傳。號蓽庵。修義副尉。寓綾州之薪山。孫大器。號警齋。進士。受業于重峯趙先生。自薪山移佳勝洞。仍居焉。子命哲。壬辰之亂。與金將軍大仁。據禮聖山。殺賊得捷。事載邑誌。高祖陽旭。曾祖思忠。祖鍾萬。考錫源。妣珍原朴氏同知桂煥女。生庭諱鎰源。妣綾城具氏相吉女。哲宗丁巳今上甲辰四月二十日。卽君生卒也。配公州李氏時釆女。四男一女。鳳熙鶴熙龍熙麟熙。長興任泰柱。墓閒牛峙。移葬于松石面炭峴庚坐原。嗚呼。人品材局。叔世罕見。而年未五十。遽已告逝。使平日志業。百未一就。曷勝痛惜。蘭枝椒條。蕃衍盈庭。而龍熙又從事斯文。方進不已。安知當日之志。不有繼述成就之日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