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화콘텐츠
  • 특화콘텐츠
  • 호남근현대문집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21
  • 유사(2)(遺事(2))
  • 증 동몽교관 박공 유사(贈童蒙教官朴公遺事)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21 / 유사(2)(遺事(2))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21.0001.TXT.0009
증 동몽교관 박공 유사
공의 성은 박(朴)이고, 휘는 종안(鍾安)이며, 자는 도현(道賢)이고, 호는 야은(野隱)이다. 신라(新羅) 밀성대군(密城大君)이 별자(別子)를 계승한 선조이고, 중엽에 이르러 휘 울(蔚)이 찰방(察訪)을 지냈다. 4대를 전해 내려와 휘 지수(枝樹)는 감찰(監察)을 지냈고, 임진왜란 때 순절(殉節)하여 마을에 정문(旌門)이 세워졌으며, 좌승지(左承旨)에 증직되었으니, 공에게는 10대 선조가 된다. 고조는 경시(慶始)이고, 증조 장환(章煥)은 문장으로 세상을 울렸으며, 조부는 재희(載禧)이다. 부친 효원(孝源)은 효성으로 마을에 정문이 세워졌고, 모친 진원 박씨(珍原朴氏)는 순길(順吉)의 따님으로 문강공(文康公) 광전(光前)의 후손이다. 순묘(純廟) 갑신년(1824) 5월 17일에 정천리(淨川里) 집에서 공이 태어났다. 공은 천성이 순박하고 진실했으며, 성격은 온화하고 인자하였다. 곤궁함 속에서 나고 자라 온갖 고생을 두루 겪으면서도 응대하거나 일을 주선하는 것이 물이 흐르듯 민첩하고 넉넉하여 일찍이 부모님의 뜻을 한 번도 어긴 적이 없었다. 형제가 넷이었는데, 서당에 가서는 나란히 함께 앉아 형과 아우가 서로 매진하며 날마다 분량을 정해 공부하였고, 밤이 되면 긴 베개와 커다란 이불을 함께 하며 애초에 서로 떠난 적이 없었다. 집안의 온갖 일을 힘을 다해 주관하고 다스려서 변변찮은 음식이나마 바쳤고, 부모님의 상을 당해서는 공이 이미 늙은 나이임에도 몸이 훼손될 정도로 너무나 지나치게 슬퍼하며 인정과 예법, 형식과 슬픔에 빠뜨린 의절이 없었다. 평상시 거처할 적에는 무익한 일이나 유람은 하지 않았으며, 아침 일찍 일어나고 밤늦게 잠을 자면서 근면하고 검약하였다. 남의 훌륭한 점을 보면 자기가 한 것처럼 여겼고, 남의 나쁜 점을 보면 자기의 병통인 것처럼 여겼으며, 친척과 친구들의 좋거나 나쁜 일, 기쁘거나 슬픈 일에 안부를 묻고 도와주는 데 정성스럽고 넉넉하게 하지 않음이 없었다. 언제가 한번은 어떤 사람이 엽전 수십 꿰미를 빌려가고서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 이미 돌려주었다고 속이자, 공이 그와 더불어 따지지 않고 즉시 그 문서를 찢어버렸다. 서책을 살 때에는 값을 흥정하지 않고 말하기를, "성인의 경전은 지극히 중요한 것이니 어찌 저자거리에서 사고파는 것처럼 하겠는가." 하였다. 이웃 사람이 밤에 집으로 들어와 조세 가마니를 훔쳐가는 것을 공이 마치 보지 못한 것처럼 하고서 집안사람들에게 누설하지 말도록 경계시키며 말하기를, "어찌 한 섬의 조세 때문에 남을 헤아릴 수 없는 곤경에 빠트리겠는가." 하였다. 계미년(1883) 1월 26일에 삶을 마쳤고, 묘지는 서창촌(西倉村) 왼쪽 산기슭 신좌(辛坐)이며, 갑오년(1894)에 동몽교관(贈童蒙教官)에 증직되었다. 배(配) 풍천 임씨(豊川任氏)는 태원(泰元)의 따님으로 명고(鳴皐) 임전(任錪)의 후손이고 부덕(婦德)이 있었다. 딸 하나를 낳았는데, 경주(慶州) 이진기(李鎭基)에게 시집갔다. 계배(系配) 하동 정씨(河東鄭氏)는 재원(載元)의 따님으로 정숙하고 조용한데다 유순하고 착했으며 규중의 법도를 두루 갖추었다. 1남3녀를 낳았으니, 아들 윤동(潤東)은 군수를 지냈고, 딸은 신평(新平) 송연심(宋淵心)과 이천(利川) 서용수(徐鎔洙), 능성(綾城) 구교주(具教周)에게 시집갔다. 손자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 아아, 공의 평생을 더듬어 보건대 효성과 우애로 화락하였으며, 근면하고 검약한데다 질박하고 성실하였으니, 이것이 뜻을 세우고 행실을 닦는 법으로 가정에 훌륭한 계책을 남기고 고을에 아름다운 명성을 드러나게 한 이유이다. 계승시켜 나아갈 전통을 남김이 이미 이와 같으니, 산초 열매나 메뚜기 알처럼 번성한 자손들에게 면면히 이어질 경사를 또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는가. 윤동이 가장(家狀)을 가지고 나를 찾아와 후세에 길이 전할 글을 부탁하였다.
贈童蒙教官朴公遺事
公姓朴。諱鍾安。字道賢號野隱。新羅密城大君爲繼别之祖。至中葉有諱蔚。察訪。四傳至諱枝樹。監察。壬辰之變。殉節旌閭。贈左承旨。於公爲十世。高祖慶始。曾祖章煥。文章鳴世。祖載禧。考孝源。孝旌閭。妣珍原朴氏順吉女。文康公光前后。純廟甲申五月十七日。公生于淨川里第。天資朴實。性氣溫仁。生長窮約。備經辛苦。而應對周旋。敏贍如流。未嘗一咈親意。兄弟四人。就塾連業。我邁爾征。日有課程。夜則長枕大被。未始有違。家間凡務。殫力幹理。以供菽水。內外艱。公已耆艾。而致毁過甚。情文易戚。未有闕儀。平居不作無益之事。不爲無益之遊。夙興夜寐。克勤克儉。見人之善若己出。見人之惡若己病。親戚知舊。吉凶歡戚。存訊賙恤。無不款洽。嘗有人貸去錢數十緡。久後誣以已還。公不與之辨。卽折其券。買書冊不上下價曰。聖經至重。豈若市井買賣之爲。隣人夜入家竊租苞。公若不見也。戒家人勿泄曰。豈以一石租而陷人於不測乎。癸未正月二十六日終。墓西倉村左麓辛坐。甲午贈童蒙教官。配豊川任氏泰元女。鳴皐錪后。有婦德。生一女適慶州李鎭基。系配河東鄭氏載元女。貞靜柔惠。閫儀備至。生一男三女。男潤東郡守。女適新平宋淵心利川徐鎔洙綾城具教周。孫以下不錄。嗚呼。迹公平生。孝友愷弟。勤儉質慤。是其立心行己之則。而所以貽佳謨於家庭。著令聞於鄉閭者也。垂統可繼。旣已如此。則螽斯椒聊。綿綿餘慶。又豈可量哉。潤東持家狀過余。託以不朽之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