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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남근현대문집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21
  • 유사(2)(遺事(2))
  • 월담 처사 장공 유사(月潭處士張公遺事)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21 / 유사(2)(遺事(2))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21.0001.TXT.0008
월담 처사 장공 유사
공의 성은 장(張)이고, 휘는 정규(珽奎)이며, 자는 성팔(聖八)이고, 호는 월담(月潭)이니, 포음(圃蔭) 선생 휘 정필(貞弼)을 비조(鼻祖)로 삼았다. 포음은 본래 중국 절강성(浙江省) 사람으로 바다를 건너 동쪽(신라)으로 와서 본국 사람 권공(權公) 행(幸)ㆍ김공(金公) 선평(宣平)과 함께 삼한(三韓)주 11)을 통합하는데 공적이 있어 안동 태사묘(安東太師廟)주 12)에 함께 배향되었다. 휘 연우(延佑)에 이르러 벼슬이 호부 상서(户部尚書)에 이르렀고 흥산군(興山君)에 봉해지자 자손들이 이로 인하여 그곳을 본관으로 삼았다. 휘 합(合)은 조선조에 들어와 선공감 정(繕工監正)을 지냈는데, 예를 갖추어 장사를 지내도록 명하였다. 5대를 전해 내려온 휘 희성(希聖)은 문과에 급제하여 전한(典翰)을 지냈으며, 문장과 의로운 행실로 세상에 명성이 드러났다. 이분이 낳은 휘 경한(景翰)은 주부(主簿)를 지냈으며, 갑자년(1604)에 적을 토벌하는데 공적이 있어 진무 공신(振武功臣)에 녹훈되었다. 이분이 낳은 휘 운구(雲衢)는 통정 대부(通政大夫)에 올랐으며, 병자년(1636) 북쪽 오랑캐의 변란 때 나라가 화친을 맺고 신주(神州)가 침몰하는 것을 보자 개연(慨然)히 세상을 등진 채 복천(福川 동복(同福))의 산중으로 들어가 과축(薖軸)주 13)을 꾸미며 노년을 마칠 것을 생각하고 스스로 '숭정(崇禎)주 14)의 숨어 사는 백성[逸民]'이라 하였으니, 공의 5대이다. 고조 치언(致彥)은 호가 일송(一松)으로 학문과 행실이 세상에 드러났으며 학생을 가르치는데 성취가 많았다. 증조 효지(孝智)는 가선 대부(嘉善大夫)에 올랐고, 조부 한신(漢臣)은 호가 추와(秋窩)이다. 부친 욱(旭)은 호가 창파(滄坡)로 세상에 은덕이 있었으며, 모친 전주 이씨(全州李氏)는 필달(馝達)의 따님으로 단정하고 정숙한데다 조용하고 아름다워 규문의 범절에 부족한 점이 없었다. 정종(正宗 정조) 갑인년(1794) 4월 16일에 동복(同福) 학당리(學堂里)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온후하고 강직한데다 총명하고 빼어났으며, 어려서부터 좋지 않은 옷이나 맛없는 음식을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농으로 하는 말이나 장난스러운 행동을 하지 않아 사람들이 감히 어리다고 그를 홀대하지 않았다. 7세 때 취학(就學)하여 천자문(千字文)을 배울 적에 종일토록 읽지 않아도 등지고 암송하는데 매우 익숙하였는데, 글방 스승이 말하기를, "너의 재능은 참으로 영민하다. 그러나 영민하여 읽지 않고도 암송하는 것은 우둔하여 많이 읽고 암송하는 것만 못하다." 라고 하자, 이때부터 여러 차례 암송하는데 매우 부지런하였다. 조금 장성해서는 경서(經書)와 사기(史記)를 두루 읽어 글 솜씨가 매우 뛰어났는데, 순상(巡相 관찰사)이 도회(都會)의 시소(試所)를 설치하여 금성(錦城 나주)에서 선비들을 시험할 때에 공이 지은 글을 보고 크게 칭찬하고 이로 인해 그를 수레에 태워 함께 가려고 하자, 공이 부모님이 계시다고 허락하지 않았으니, 이로부터 화려한 명성이 자자하였다. 집안이 매우 가난하여 직접 나무하고 물고기를 잡았으며, 목소리를 부드럽게 하고 얼굴빛을 온화하게 하여 물이 흐르듯 부모님의 명을 받들어 따랐으며, 아침에 문안인사를 올리고 저녁에 잠자리를 보살펴 드리거나 겨울에는 따뜻하게 해 드리고 여름에는 시원하게 해 드리는 의절이 잠깐 사이나 창졸간에도 처음부터 어긴 적이 없었다. 부모님이 병이 나면 지극한 정성으로 근심을 다하여 한데에서 기도하고 약을 맛보면서 밤까지 허리띠를 풀지 않았으며, 부모의 상을 당해서는 가슴을 치고 발을 구르며 지나칠 정도로 슬퍼하면서도 온갖 의절을 한결같이 가례(家禮)를 따라 행하였다. 항상 말하기를, "젋은 시절에는 가난하여 봉양하지 못했고, 지금은 조금 넉넉하다고 할 만한데 부모님이 계시지 않으니, 이것이 내가 종신토록 한스럽게 여기는 것이다." 하고서 인하여 눈물을 떨어뜨리며 옷을 적셨다. 동생과 우애가 매우 돈독하였는데, 분가할 때에 논밭과 가옥, 세간살이들을 한결같이 설포(薛包)주 15)가 했던 것처럼 스스로 나쁜 것만 차지하였다. 만년에 하나의 서재를 지어 '모락재(慕樂齋)'라고 쓴 편액을 걸어 놓았으니, 대체로 추모하고 화락하게 즐거워한다는 의미를 담은 것이었다. 거처하는 곳에 수십 이랑을 개간할 만한 황무지가 있었는데, 공이 마을 장정들을 감독하여 제방을 쌓게 하고 이웃 마을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 개간하도록 하여 그 이익을 독점하지 않았다. 평소 생활이 담박하여 명리와 영화, 온갖 기이한 물건과 완상품에 대해서는 좋아하는 것이 하나도 없었지만, 남을 이롭게 하고 은택을 베풀거나 곤궁한 사람을 도와주는 데에는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처럼 급급하였다. 만년에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마침내 자신의 수양을 위한 공부에 전념하여 격언(格言)이나 요언(要語)를 만나면 반드시 벽에 써서 항상 눈앞에 두고 보았으며, 늘 말하기를, "종일토록 조용히 앉아 있는 것이 참으로 좋긴 하지만, 만약 기미를 살펴 혼자만의 생각을 삼가지 않는다면 좌치(坐馳)주 16)에 귀결되지 않겠는가." 하였다. 이 때문에 끝까지 사색하고 연구하였으며, 날마다 과정(課程)을 두어 공부하는 것을 쇠약한 노년에 이르도록 바꾸지 않았다. 규산(圭山) 조영승(曺瑩承)ㆍ상사(上舍 진사) 송정옥(宋廷玉)과 더불어 매우 친밀하여 사이좋게 지내며 끊임없이 학문을 강구하고 연마하였는데, 규남(圭南) 하백원(河百源)주 17)이 말하기를, "말세의 분주하게 다투는 풍속에서 욕심이 적은 선비를 보지 못했는데 오직 우리 고을의 장(張) 아무개만이 거의 이러한 선비에 가까울 뿐이다." 하였다. 병이 들었을 때에 집안사람이 의원을 맞이하려고 하였는데, 공이 중지시키며 말하기를, "태어나서 일컬을 만한 일이 없으니 죽는다 한들 무엇이 애석하랴. 또 내 나이가 예순하나로 장수하지 않았다고 이를 수 없으니 다시 무엇을 바라겠는가." 하였다. 마침내 2월 17일에 세상을 떠나니, 옥과(玉果) 율천(栗川)의 안산(案山) 두리봉(斗理峯) 사좌(巳坐) 언덕에 장사지냈다. 부인 선산 유씨(善山柳氏)는 연수(年樹)의 따님으로 문절공(文節公) 미암(眉巖) 희춘(希春)의 후손이며, 온화하고 인자한데다 정숙하였으며, 부녀자로서의 덕행을 모두 갖추었다. 공보다 2년 뒤 7월 26일에 세상을 떠났으며, 본현(本縣) 안심촌(安心村)의 주지봉(冑地峯) 사좌 언덕에 장사지냈다. 아들 동식(東植) 하나를 두었는데, 학문과 행실이 세상에 드러났다. 동식은 4남1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성용(聲容)ㆍ태용(泰容)ㆍ채용(彩容)ㆍ익용(益容)이고, 딸은 광산(光山) 김재구(金在鳩)에게 출가하였다. 성용이 아들이 없어 둘째 태용의 아들 기홍(基洪)을 후사로 삼았으며, 측실(側室)의 아들은 기선(基善)이다. 아아! 이처럼 빼어나고 맑은 자질로 학문의 힘을 겸하여 갈고닦으며 침잠하였기에 성취한 바가 크고 넓었다. 이 때문에 가정에서는 효성과 우애가 흥기되어 행해졌고, 고을에서는 신의가 드러났으며, 친척들은 공의 온정을 생각하였고, 벗들은 공의 풍모를 앙모하였으니, 남쪽 지방의 뛰어난 선비요, 말세에 고상한 인물이라 이를 만하였다. 다만 산림 속에서 배회하고 언덕과 골짜기에 묻혀 지내며 세상을 경영할 뜻을 조금도 시험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유감스러울 따름이다. 그러나 남긴 덕의 향기가 집안에 전해지고 사람들에게 퍼져 있으니, 베풀지 않은 베풂이요, 공효가 없는 공효가 아니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기홍이 스승을 따라 학문에 힘써 한창 진보해 마지않으니 공의 뜻과 학업이 이 손자를 석과(碩果)의 씨로 삼아 후세에 더 큰 인물이 나오지 않을 줄 어찌 알겠는가. 기홍이 가장(家狀)을 안고 와서 후세에 길이 남길 글을 청하니, 감히 합당한 사람이 아니라고 사양하지 못하였다.
주석 11)삼한(三韓)
후삼국(後三國)인 후고구려, 후백제, 신라를 가리킨다.
주석 12)안동 태사묘(安東太師廟)
경상북도 안동시 북문동에 있는 사당으로 고려 태조가 후삼국을 통일하는 데 큰 기여를 한 삼태사, 즉 김선평(金宣平), 권행(權幸), 장정필(張貞弼)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건립 당시에는 삼공신 묘(三功臣廟)라 하였는데, 1613년(광해군 5) 중건과 더불어 이름을 태사묘(太師廟)라 개칭하였다. 《한국 향토문화 전자대전》
주석 13)과축(薖軸)
은둔 생활을 뜻하는 것으로 《시경》 〈고반(考槃)〉에 나오는 '석인지과(碩人之薖)'의 '과(薖)'와 '석인지축(碩人之軸)'의 '축(軸)'을 합성한 말이다.
주석 14)숭정(崇禎)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의종(毅宗)의 연호이다.
주석 15)설포(薛包)
동한(東漢) 여남(汝南) 사람으로 형제들과 재산을 나눌 때 자신은 나쁜 것만 차지하고 좋은 것은 형제에게 주었다고 한다. 《小學 善行》
주석 16)좌치(坐馳)
《장자》 〈인간세(人間世)〉에 나오는 말로, 몸은 가만히 앉아 있지만 생각은 끊임없이 일어나 치달리는 것을 말한다.
주석 17)규남(圭南) 하백원(河百源)
1781~1844. 본관은 진주(晉州)이고, 자는 치행(穉行)·효일(孝一)이며 규남은 그의 호이다. 화순 출신의 실학자로 1803년(순조 3)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물을 뿜어 올리는 자승거(自升車)와 〈동국지도(東國地圖)〉를 완성한 공로로 세상에 알려져 1834년에 음직(蔭職)으로 창릉참봉(昌陵參奉)에 임명되었고, 형조좌랑을 거쳐 석성현감에 나아갔으나 토호(土豪)와의 알력으로 인해 이듬해 보령으로 귀양갔다가 다음 해 바로 풀려나고 사헌부지평이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저서로는 《규남문집(圭南文集)》을 남겼으며, 작품으로는 〈만국전도(萬國全圖)〉·《영모화(翎毛畵)》 등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月潭處士張公遺事
公姓張。諱珽奎。字聖八。號月潭。以圃蔭先生諱貞弼爲鼻祖。圃蔭素以中州浙江人。渡海來東。與本國人權公幸金公宣平。有統合三韓之功。共享安東太師廟。至諱延佑。官户部尚書。封興山君。子孫因貫焉至諱合入我朝。官繕工監正。命禮葬。五傳至諱希聖。文典翰。以文章行義。著聞於世。生諱景翰。主簿。甲子討賊有功。錄振武功臣。生諱雲衢。通政。丙子北虜之亂。見國家媾和。神州陸沈。慨然謝世。入福川山中。裝點薖軸爲終老計。自謂崇禎逸民。是爲公五世。高祖致彥。號一松。學行著聞。教生徒多成就。曾祖孝智。階嘉善。祖漢臣。號秋窩。考旭。號滄坡。世有隱德。妣全州李氏馝達女。端淑靜嘉。壺範無闕。正宗甲寅四月十六日。生公于福之學堂里。溫厚剛方。穎悟秀爽。自幼不恥惡衣惡食。不作戱言戱動。人不敢以幼而忽之。七歲就學。授千字文。終日不讀。而能背誦甚熟。塾師曰。汝之才固敏矣。然敏而不讀而通。不如鈍而多讀而通也。自此誦數甚勤。稍長。遍閱經史。詞藻藹蔚。巡相設都會。試士於錦城。見公所製。大加稱賞。因欲載與俱去。公以親在不許。自是聲華藉藉。家貪甚。躬執漁樵。柔聲怡色。承順如流。晨昏定省之儀。冬夏溫淸之節。造次倉猝。未始有違。親有疾。至誠致憂。露禱嘗藥。夜不解帶。及遭艱。擗踊過哀。凡百儀節。一遵家禮。嘗曰。少日貧窶。無以爲養。今則可謂稍饒而親不在焉。此余終身之恨。因泣下沾衿。與其弟友愛甚篤。及析箸。田廬什物。自取荒頓。一如薛包之爲。晩築一齋。揭顏以慕樂。盖寓追慕湛樂之意也。所居有荒野。可墾數十頃。公董邑丁築堰。命隣里貧者。分以墾之而不專。其利平居恬澹於聲利芬華。凡百技玩。一無所好。至若利人澤物。周窮恤匱。汲汲如飢渴也。晩廢擧業。遂專心爲己。遇格言要語。必書諸壁以常目焉。嘗曰。終日靜坐固善。然若不察其幾而愼其獨。則其不爲坐馳之歸乎。是以窮索研究。日有課程。至衰老而不替也。與曺圭山瑩承宋上舍廷玉。交好甚密。講磨不輟。河圭南百源曰末俗奔競。未見有寡欲之士。而惟吾鄕張某庶幾焉。及其屬疾也。家人迎醫。公止之曰。生而無述。死且何惜且吾年六十一。不可謂不壽。復何望焉。竟以二月十七日考終。墓玉果栗川案山斗理峯巳坐原。配善山柳氏年樹女。眉巖文節公希春后。溫仁貞淑。婦德甚備。後公二年七月二十六日卒。葬本縣安心村冑地峯巳坐原。擧一男。曰東植。文行著世。東植有四男一女。曰聲容泰容彩容益容。光山金在鳩。聲容無男。以仲房子基洪爲後。側室子曰基善。嗚呼。以若秀爽之質。濟以學問之力。磨礱浸灌。所就宏贍。是以在家庭孝友興行。在鄉閭信義著聞。族戚懷其情。朋友仰其風。可謂南服之偉儒。叔世之高蹈。但婆娑林樊。沈淹邱壑。使經世之志。未得有少試焉。此爲可憾也已。然遺芬餘馥。傳之在家。播之在人者。不可謂非不施之施無效之效也。基洪從師力學。方進不已。安知公之志業。不以此爲碩果之種。而將大來於來許耶。基洪抱家狀。來謁不朽之文。不敢以非其人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