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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21
  • 유사(2)(遺事(2))
  • 신계 김공 유사(莘溪金公遺事)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21 / 유사(2)(遺事(2))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21.0001.TXT.0006
신계 김공 유사
공의 휘는 만원(萬源)이고, 자는 명은(明恩)이며, 호는 신계(莘溪)이다. 김씨(金氏)는 본래 경주(慶州) 사람으로, 고려조에 휘 충한(冲漢)이 예의 판서(禮儀判書)를 지냈는데, 이분이 계보(系譜)에 오른 시조(始祖)이다. 휘 대기(大器)는 호가 경재(警齋)이고, 진사(進士)였는데, 중봉(重峯) 조 선생(趙先生 조헌(趙憲))에게서 수업하여 마침내 선생의 학문을 전했으며, 이분이 낳은 휘 명철(命哲)은 임진년(1592)에 의병을 일으켰고 장악원 정(掌樂院正)에 증직되었으며, 이분이 낳은 휘 횡(鑅)은 호가 태암(泰巖)으로 동중추(同中樞)를 지냈고 병자란(丙子亂) 때 우산(牛山) 안 선생(安先生 안방준(安邦俊))을 따라 의병을 창도하였으니, 이분들이 모두 현조(顯祖)이다. 고조 휘 희학(希學)은 호조 참의(戶曹參議)에 증직되었으며, 증조 휘 지형(之炯)은 문학과 행실이 세상에 드러났으며, 조부 휘 홍기(鴻基)는 호가 농와(聾窩)로 은덕(隱德)이 있었으며, 부친 휘는 종국(鍾國)이고, 모친 상산 김씨(商山金氏)는 욱해(郁海)의 따님이다. 헌종(憲宗) 임인년(1842) 12월 12일에 신산리(莘山里)에서 공이 태어났다. 7세에 학문을 시작하였는데, 어려서부터 의젓하여 이끌거나 독려하지 않아도 과정(課程)을 준수했다. 장성해서는 이웃 마을의 지남(芝南) 이공(李公)을 통해 비로소 과거 공부가 자기 수양을 위한 학문이 아님을 알고서 마침내 석담(石潭 이이(李珥))의 《격몽요결(擊蒙要訣)》을 받아 읽으며 나아갈 방향을 밝혔고, 이로 인해 사자(四子)와 육경(六經)주 8)에 미쳐가면서 정밀하게 연구하고 깊이 생각하여 처음부터 그친 적이 없었다. 집안 형편이 평소 넉넉하지 않았기에 산에서 나무하고 강에서 물고기를 잡았으며, 밭을 일구고 힘써 거두어 좌우에서 봉양하는 것이 이르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형제들과 우애가 매우 돈독하여 재물을 함께하고 한솥밥을 먹으며 떨어져 산 적이 없었다. 공의 형체와 관상은 질박하고 예스러웠으며, 풍모와 거동은 너그럽고 평이하였으며, 말은 어눌하게 하여 민첩하지 않았고, 문장은 서툴게 표현하여 기교를 부리지 않았다. 천성에 맡기고 분수를 지킨 채 구구하게 꾸미는 태도가 없고 쉴 새 없이 일에 빠져 몰두하려는 뜻이 없어 일상생활의 말과 행동이 곤곤한 하늘의 조화 속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이 때문에 사람을 대함에 있어서는 다툼이 없었고, 일에 임해서는 겉으로 공을 드러냄이 없었으며,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는 크게 어긋남이 없었다. 매번 곤궁한 집과 차가운 걸상이나 푸성귀 아침과 소금국 저녁을 볼 때마다 담박한 맛이 손으로 움켜 쥘 만큼 넘쳐흘렀다. 신묘년(1891) 가을에 향촌 내의 여러 벗들과 함께 방장산(方丈山 지리산)의 화엄사(華巖寺)에 가서 최계남(崔溪南)주 9)ㆍ정애산(鄭艾山)주 10)과 종유하며 여러날 강학하고 토론하였는데, 천성이 조용하고 담박하여 즐기거나 좋아하는 것이 없는 듯하였지만 벗들과 술마시는 흥취에는 남보다 뒤질까 두려워하였으며, 매번 산중 누각에 달이 떠오르는 밤이나 강둑에 봄바람이 불 때에는 몇 명의 친구들을 데리고 가서 술을 마시고 시를 읊으며 화락하게 도취하여 그윽한 감상의 흥취를 다하였다.
임인년(1902) 10월 7일에 삶을 마치니, 신산(莘山) 오른쪽 기슭 갑좌 언덕에 장사지냈다. 부인 파평 윤씨(坡平尹氏)는 계진(啓鎭)의 따님으로 부덕(婦德)이 있었다. 1남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권주(權柱)이고, 딸은 정재우(鄭在禹)에게 시집갔다. 아아, 공은 세상에 발을 내딛지 않고 세속에 머리를 적시지 않은 채 백발이 되도록 경서를 궁구하고 유유자적하게 스스로를 즐기면서 만년의 행로에 때 묻지 않은 완전한 사람이 되는 것을 잃지 않았으니, 이는 친구 중에 매우 얻기 쉽지 않다. 공의 풍모를 우러러 추억하니 어찌 참담한 슬픔을 가눌 수 있겠는가. 이에 행적을 기록해 달라는 권주의 부탁을 차마 번다하게 사양하지 못했다.
주석 8)사자(四子)와 육경(六經)
사자는 공자(孔子)ㆍ증자(曾子)ㆍ자사(子思)ㆍ맹자(孟子) 네 선생의 가르침이 담긴 《논어(論語)》ㆍ《대학(大學)》ㆍ《중용(中庸)》ㆍ《맹자(孟子)》를 가리키며, 육경은 유가의 여섯 가지 경전으로, 《시경(詩經)》ㆍ《서경(書經)》ㆍ《예경(禮經)》ㆍ《악경(樂經)》ㆍ《역경(易經)》, 《춘추(春秋)》를 가리키는데 《악경》은 진(秦)나라 분서갱유(焚書坑儒) 때에 없어져 지금은 오경(五經)만 남아 있다.
주석 9)최계남(崔溪南)
조선 후기와 개항기의 유학자인 최숙민(崔琡民, 1837~1905)으로 계남은 그의 호이다. 자는 원칙(元則)이고, 호는 존와(存窩)이며,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경상남도 하동군 출신으로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1798~1879)의 문인이다. 삭발령이 내렸을 때 죽을지언정 삭발할 수 없다고 항거하는 등 유학의 도를 지키고 후학 양성에 전념하였다 저서로는 《계남집》이 있다.《한국 향토문화 전자대전》
주석 10)정애산(鄭艾山)
조선 후기와 개항기의 유학자인 정재규(鄭載圭, 1843~1911)로 애산은 그의 호이다. 자는 영오(英五) 또는 후윤(厚允)이고, 호는 노백헌(老柏軒)이며, 본관은 초계(草溪)이다. 경상도 합천에서 전라남도 장성 기정진(奇正鎭)의 문하에 들어가 스승이 죽기까지 15년간 학문에 몰입하였으며, 〈납량사의기의변(納凉私議記疑辨)〉·〈외필변변(猥筆辨辨)〉등을 지어 전우(田愚)의 기정진에 대한 반박을 변론하여 철학사적으로 중요한 논쟁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저서로 《노백헌집(老柏軒集)》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莘溪金公遺事
公諱萬源。字明恩。號莘溪。金氏本慶州人。麗朝有諱冲漢。官禮儀判書。是爲登譜之祖。至諱大器。號警齋進士。受業于重峯趙先生。遂傳其學。生諱命哲。壬辰擧義。贈掌樂院正。生諱鑅。號泰巖同中樞。丙子亂。從牛山安先生倡義旅。皆其顯祖也。高祖諱希學。贈戶曹參議。曾祖諱之炯。文行著世。祖諱鴻基。號聾窩。有隱德。考諱鍾國。妣商山金氏郁海女。憲宗壬寅十二月十二日。公生於莘山里。七歲上學。幼儀不待提督而遵循課程。及長。因隣閈芝南李公。始知功令之業。非爲己之學。遂授讀石潭要訣。以明其趨向。因以及於四子六經。研精覃思。未始有己。家泰不贍。樵山漁水。服田力穡以爲左右就養者。無所不至。與其弟友愛甚篤。同財共㸑未有分異。公體相質古。風儀坦夷。言語訥而不捷。文辭拙而不巧。任眞推分。無拘拘矯飾之態。無營營汨没之意。而日用云爲。無非自滾滾天機中出來。是以接人無爭競。臨事無表襮。處事無逕庭。每見其窮齋寒榻。朝齏暮鹽。澹泊氣味。津津可掬。辛卯秋。與鄕裏諸友。往從崔溪南鄭艾山於方丈之華巖寺。累日講討。性恬淡。若無所嗜好。而於朋酒興致。惟恐不先於人。每於山樓夜月。江堤春風。携多小知舊。觴咏陶暢。俾盡幽賞之趣。壬寅十月七日卒。葬莘山右麓甲坐原。配坡平尹氏啓鎭女。有婦德。生一男一女。男權柱。女適鄭在禹。鳴呼。公不出脚於世。不濡首於俗。而白首窮經。囂囂自樂。不失爲晚路之完人。此在知舊。甚不易得。追仰風韻。曷勝悲愴。茲於權柱誌行之託。有不忍多辭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