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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남근현대문집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21
  • 유사(2)(遺事(2))
  • 낙춘헌 임공 유사(樂春軒任公遺事)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21 / 유사(2)(遺事(2))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21.0001.TXT.0005
낙춘헌 임공 유사
공의 성은 임(任)이고, 휘는 수환(秀煥)이며, 자는 윤문(允文)이다. 시조(始祖) 휘 호(灝)가 중국 소흥부(紹興府)에서 동쪽으로 와서 회주(懷州 장흥)의 천관산(天冠山) 아래에 정착하면서 자손이 그대로 이곳을 본관으로 삼았다. 이로부터 작위와 공훈으로 저명한 석학들이 대대로 찬란하였다. 휘 광세(光世)에 이르러 관산군(冠山君)에 봉해졌으며, 이분의 손자 발영(發英)이 임진년 변란 때 종묘사직의 신주(神主)를 받들고 용만(龍灣 의주)까지 호송하였는데, 선묘(宣廟 선조)가 이를 가상하게 여겨 시를 지어 말하기를, "하늘이 임발영을 낳으니, 우리 사직의 신하라네[天生任發英, 爲我社稷臣.]"하고 정훈 이등(正勳二等)으로 예양군(汭陽君)에 봉하였다. 이분의 손자 설(渫)에 이르러 훈련 부정(訓錬副正)으로 발포(鉢浦)의 전쟁에서 순절하자, 마을에 정문(旌門)을 세우도록 명하였으니, 공에게는 7세조가 된다. 증조 휘 명중(命重)은 사복시 정(司僕寺正)에 증직되었고, 조부 휘 시오(時五)는 좌승지(左承旨)에 증직되었으며, 부친 휘 흥언(興彦)은 통덕랑(通德郞)에 올랐고, 모친 인천 이씨(仁川李氏)는 광직(光稷)의 따님으로 순묘(純廟) 신미년(1811) 9월 16일에 공을 낳았다. 형제 셋에 공이 막내였는데, 집안이 대대로 매우 가난하였기에 맨손으로 분가하여 고생고생 쉴 틈 없이 부지런히 일하였다. 일의 형세와 재력이 조금 펴지자 항상 말하기를, "나이든 부모님이 집에 계시고 두 형님이 모두 가난하여 콩죽이나 물을 바쳐 기쁘게 해드리니, 이 몸이 전적으로 책임질 일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자신은 묵은 솜의 베옷을 입고 거친 밥을 먹으면서 부모님의 몸에 편안한 옷과 입에 맞는 음식을 모두 갖추어 드리지 않음이 없었고, 부모님의 상을 당해서는 상사(喪事)를 치르는 데에 필요한 모든 도구들을 모두 자신이 마련하여 남은 유감이 없게 하였으며, 두 형님을 섬길 때에는 우애가 매우 돈독하여 있든 없든 함께하였고, 돌아가셨을 때에는 여러 조카들을 보살펴 양육함에 자기에게서 나온 자식과 차별을 두지 않았다. 마음가짐은 순박하고 진실하였으며, 몸가짐은 겸손하고 공손하였으며, 근면과 검약으로 집안을 다스렸고 온화함과 너그러움으로 다른 사람을 대했으니, 이 때문에 각기 환심을 얻어 안팎으로 원망이 없었다. 일찍이 한 번은 길을 가는 중에 도적을 만나 지니고 있던 자기의 물건과 이웃 사람이 맡긴 물건을 모두 잃었는데, 집으로 돌아와 잃은 것을 말하지 않고 이웃의 물건을 하나하나 갖추어 주었고, 이웃에 사는 사람이 밤에 수확한 벼를 훔치다 다른 사람에게 붙잡히자, 공이 말하기를, "훔쳐간 것이 아니라 내가 본래 그에게 준 것이다." 하였으니, 그의 너그러움이 이와 같았다. 길에서 술에 취한 사람을 만나 상해를 입었을 때에 여러 자제들이 이를 분하게 여기자, 공이 말하기를, "저 사람은 술에 취해 정신이 없었는데, 무슨 따질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일찍이 말하기를, "사람들이 싸우는 실마리는 모두 남의 옳지 못한 것만 보고 자기의 옳지 못한 점을 보지 못한 데에서 비롯하니, 만약 마음과 생각을 평안하고 너그럽게 하여 자기자신처럼 남을 용서할 수 있다면 어찌 다툼이 있겠는가." 하였으니, 이 때문에 평생 동안 남과 화를 내며 다투어 화평함을 잃은 적이 없었다. 두 아들을 경계하여 말하기를, "옛사람은 하나의 몸으로 밭을 갈고 책을 읽는 일을 겸하였는데, 하물며 너희 형제들은 두 개의 몸으로 도리어 이것을 하는데 부족함이 있겠는가. 형은 책을 읽고 동생은 밭을 가는 것도 또한 집안을 위한 계책으로 삼을 만하다."하였다. 또 말하기를, "천하에 휼륭한 일은 모두 갖은 어려움을 겪고 애써 힘쓰는 가운데에서 나왔으니, 이것으로 부지런함은 복을 일구는 밭이고, 나태함은 화를 부르는 계제임을 알 수 있다. 너희들은 이를 경계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인(仁)이란 천지가 만물을 생육하는 마음이니, 이 마음의 바름은 바야흐로 봄기운이 화창하고 따사로울 때에 볼 수 있다." 하고서 인하여 '낙춘(樂春)'을 헌(軒)의 편액으로 걸어두었다. 금상(今上 고종(高宗)) 계유년(1873) 5월 23일에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享年) 63세였으며, 웅치(熊峙) 梨木嶝(이목등) 진좌 언덕에 안장되었다. 부인 천안 전씨(天安全氏)는 종유(宗瑜)의 따님으로 부덕(婦德)이 있었다. 2남1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봉규(奉奎)ㆍ태규(台奎)이고, 딸은 광산(光山) 김재현(金在鉉)에게 시집갔다. 손자 삼현(三鉉)ㆍ오현(五鉉)은 첫째 봉규에게서 나왔고, 철현(喆鉉)ㆍ문현(文鉉)은 둘째 태규에게서 나왔다. 아, 충직하고 참되며 질박하고 성실함은 순박하고 고아한 선진(先進)의 풍모이니, 그 남은 운치와 향기는 비록 풍속이 야박해지고 사라진 때라 하더라도 또한 다하는 날이 있지 않음을 공에게서 알 수 있다. 태규가 칠순의 노쇠한 나이에 눈보라를 맞으며 후세에 길이 전할 글을 부탁하니, 그의 뜻을 애닯게 여겨 감히 번다하게 사양하지 못했다.
樂春軒任公遺事
公姓任。諱秀煥。字允文。始祖諱灝。自中國紹興府東來。止於懷州天冠山下。子孫仍貫焉。自是爵勳名碩。世代煒燁至諱光世。封冠山君。有孫發英。壬辰之變。奉廟社。扈于龍灣。宣廟嘉之。有詩曰。天生任發英。爲我社稷臣。以正勳二等封汭陽君。至孫渫。以訓錬副正。殉節于鉢浦之役。命旌閭。於公爲七世。曾祖諱命重。贈司僕寺正。祖諱時五。贈左承旨。考諱興彦。通德郞。妣仁川李氏光稷女。以純廟辛未九月十六日生。公兄弟三人。公其季也。家世貧甚。赤手分炊。而辛勤拮据。事力稍紓。常曰。老親在堂。二兄皆貧。菽水供歡。其非此身之專責乎。自衣縕袍。自喫處糲。而所以安其體適其口者。無不畢給。遭內外艱。初終凡具。皆自營辦。俾無餘憾。事二兄。友悌甚篤。有無共之。及其歿。撫養諸姪。無間已出。宅心醇實。持身謙恭。御家勤儉。接物和裕。是以各得歡心。内外無怨。嘗路中遇賊。所携己物及隣人所付物。竝失之。歸家不言所失。隣物一一備給。隣氓夜竊穫禾。爲人所執。公曰非竊也。吾固與之耳。其含容如是。路次遇酗酒人見傷。諸子忿之。公曰。彼卽酒妄。有何計較也。嘗曰。人之爭端。皆由於只見人之不是不見己之不是處也。若能平心坦慮。恕人類己。則豈有爭也。是以平生未嘗與人忿爭以失其和也。戒二子曰。古人以一箇身。兼耕讀之業。況汝兄弟以二箇身。而乃有闕於此乎。兄讀弟耕。亦可爲家户之計也。又曰。天下好事。皆自艱難辛苦中來。是知勤苦爲福田。懶怠爲禍階。汝等戒之。又曰。仁者天地生物之心。此心之正於方春和煦之時可見。因以樂春揭軒。今上癸酉五月二十三日卒。享年六十三。葬熊峙梨木嶝辰坐原。配天安全氏宗瑜女。有婦德。生二男一女。男奉奎台奎。女適光山金在鉉。孫三鉉五鉉長房出。喆鉉文鉉次房出。嗚呼。忠信質慤。此是醇古先進之風也。其餘韻遺馥。雖在風澆俗喪之日。而亦未有可盡之日。觀於公可以知矣。台奎七耋衰齡。觸冒風雪。有不朽之託。悲其意不敢多辭云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