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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남근현대문집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21
  • 유사(2)(遺事(2))
  • 동중추 농은 박공 유사(同中樞農隱补公遺事)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21 / 유사(2)(遺事(2))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21.0001.TXT.0003
동중추 농은 박공 유사
공의 휘는 국서(國瑞)이고, 자는 내명(乃明)이며, 호는 농은(農隱)이니, 대제학을 지낸 충의공(忠義公) 휘 첨(瞻)이 그의 비조(鼻祖)이다. 우리 조선조에 이르러 휘 희중(熙中)은 호가 위남(葦南)이고, 벼슬이 직제학(直提學)에 이르렀으며, 진원군(珍原君)에 봉해졌는데, 자손들이 이로 인하여 진원을 관향(貫鄕)으로 삼았다. 이분이 휘 희생(暉生)을 낳았고, 이분이 휘 문기(文基)를 낳았고, 이분이 휘 윤원(胤原)을 낳았고, 이분이 휘 위(衛)를 낳았으니, 이상 4대가 모두 사마(司馬)에 올랐다. 이분이 낳은 휘 이인(而認)은 우산(牛山) 안 선생(安先生)과 도의로 교제하였고, 병자란(丙子亂) 때에는 그와 더불어 의병을 일으켰다. 이분이 낳은 광보(光輔)는 죽천(竹川) 선생과 종조형제(從祖兄弟)가 되어 문학과 의로운 행실로 한 시대에 이름을 나란히 하였다. 이분이 낳은 휘 잠(岑)은 품계가 통정대부(通政大夫)였고, 이분이 낳은 휘 영립(英立)은 봉사(奉事)를 지냈다. 이분이 휘 응필(應弼)을 낳았고, 이분이 휘 경호(慶顥)를 낳았고, 이분이 휘 진해(振海)를 낳았으니, 호는 겸암으로 공에게는 고조가 된다. 증조 휘 동수(東壽)는 군자감 정(軍資監正)에 증직되었으며, 조부 휘 성우(成祐)는 호가 매죽헌(梅竹軒)으로 보성(寶城)에서 능주(綾州)로 우거(寓居)하였으며, 호조 참의(户曹參議)에 증직되었다. 부친 휘 명혁(命爀)은 호가 용암(龍庵)으로 이조 참의(吏曹參議)에 증직되었고, 모친 숙부인(淑夫人) 김씨(金氏)는 아무개의 따님이다. 정묘(正廟 정조(正祖)) 을묘년(1795) 2월 19일에 능주의 용두리(龍頭里)에서 공이 태어났다. 공은 어려서부터 성품이 지극히 착해 부모를 섬기며 오직 부모의 말씀만을 따랐고, 취학(就學)해서는 번거롭게 이끌거나 독려하지 않아도 과정(課程)을 준수하였다. 하루는 '제자는 들어와서는 어버이에게 효도하고, 나가서는 어른에게 공손하며, 이렇게 행하고도 남은 힘이 있으면 글을 배워야 한다.주 6)'라는 말을 읽고서 말하기를, "효도와 공경은 자식된 직분이니, 하루라도 닦지 않으면 안 된다. 봉양을 돌보지 않고 한갓 독서만 잘한다면 이런 사람을 과연 어디에 쓰겠는가." 하였다. 이 때부터 집안 일을 겸하여 주관하면서 집안의 재력이 조금 펴졌고, 부모의 뜻에 빠뜨리는 것이 없게 되었다. 평상시 거처할 때에는 일찍 일어나고 밤늦게 잠을 자며 게으른 기색이 낯빛에 드러나지 않았으며, 겸손과 공경으로 몸을 단속하고 근면과 검약으로 집안을 다스려서 온 집안 내에 가르침이 시행되지 않은 것이 없었고 일이 거행되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도리와 규범이 반듯하였고 은혜와 정의(情誼)가 화기로웠으며, 이를 미루어 친척과 벗에게 이르렀으며, 도의를 귀중하게 여기고 재물을 가볍게 여겨 가난한 사람을 구휼하였다. 만년에는 집안일을 전가(傳家)한 채 한 방을 깨끗하게 다스리고 서적에 깊이 빠졌는데, 이내 탄식하며 말하기를, "젊었을 때 노력하지 않다가 늙어서 후회됨을 알겠구나."하고서 여러 자제들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너희들은 나를 전거지감(前車之鑑)주 7)으로 삼아 제 때에 힘써서 너희 아버지가 이루지 못한 한을 위로하거라." 하였다. 수직(壽職)으로 동중추(同中樞)에 올랐고, 정축년(1877) 3월 29일에 정침(正寢)에서 세상을 떠났으며, 용두리 뒷산 위 봉우리 묘좌 언덕에 안장되었다. 부인 의령 남씨(宜寧南氏)는 성추(星秋)의 따님으로 2남2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덕현(德鉉)과 기현(箕鉉)이고, 딸은 민치황(閔致璜)과 이승규(李承奎)에게 시집갔다. 첫째 덕현은 자식이 없어 태영(泰瑛)을 후사로 삼았고, 둘째 기현은 3남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태영(泰瑛)ㆍ태섭(泰燮)ㆍ태규(泰奎)이고, 딸은 임만갑(林萬甲)에게 시집갔다. 증손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 아아, 집에 거처할 때에는 효도와 우애의 행실이 있었고, 마을에 거처할 때에는 화락한 풍모가 있었으며, 평소에 은덕을 쌓아 안팎으로 원망하는 사람이 없었고 대질(大耊 80세)에 오르도록 장수하였으며, 자손들이 번성하여 문학을 실추시키지 않았으니, 천도가 선한 사람에게 복을 준다는 것이 어찌 사실이 아니겠는가. 태규가 가장(家狀)을 받들고 와서 후세에 길이 남을 글을 부탁하니, 내가 마을의 후배로 평소에 우러러 사모하였기에 감히 사양하지 못하였다.
주석 6)제자(弟子)는 …… 한다
《논어》 〈학이(學而)〉에 나오는 말이다.
주석 7)전거지감(前車之鑑)
앞의 실패가 뒤의 교훈이 됨을 비유하는 말로, 《한서》 권48 〈가의전(賈誼傳)〉에 "앞서가는 수레가 전복되면 뒷수레가 조심을 한다.〔前車覆 後車戒〕"에서 유래하였다.
同中樞農隱补公遺事
公諱國瑞。字乃明。號農隱。大提學忠義公諱瞻。其鼻祖也。至我朝。有諱熙中。號葦南官直提學封珍原君。子孫因貫焉。生諱暉生。生諱文基。生諱胤原。生諱衛。以上四世。皆登司馬。生諱而認。與牛山安先生爲道義交。丙子亂。與之擧義。生諱光輔。與竹川先生爲從祖兄弟。文學行義。一時齊名。生諱岑。通政。生諱英立。奉事。生諱應弼。生諱慶顥。生諱振海。號兼巖。於公爲高祖。曾祖諱東壽。贈軍資監正。祖諱成祐。號梅竹軒。自寶城寓居綾州。贈户曹參議。考諱命爀。號龍庵。贈吏曹參議。妣淑夫人金氏某女。正廟乙卯二月十九日。公生于州之龍頭里。幼有至性。事父母。惟命是聽。就學不煩提督。遵循課程。一日讀弟子入則孝。出則弟。行有餘力則以學文之語。乃曰。孝悌是入子職分。不可一日不修。不顧其養而徒能讀書。是果何用也。自是兼幹家務。家力稍舒。親旨無闕。平居夙興夜寐。懈慢之氣。不形於色。持身以謙恭。御家以勤儉。一家之内。敎無不行。事無不擧。倫理井井。恩誼融融。推而至族戚朋友。貴義輕財。賙窮恤匱。晚年傳家事。淨討一室。沈潛墳典。乃歎曰。少而不力。老而知悔。顧諸子曰。爾輩以我爲前車之鎰。及時勉力。以慰乃父未就之恨也。以壽陞同中樞。丁丑三月二十九日。考終于正寢。葬龍頭里後山上峯卯坐原。配宜寧南氏星秋女。舉二男二女。男德鉉箕鉉。女適閔致璜李承奎。長房無育。泰瑛爲後。次房有三男一女。泰瑛泰燮泰奎。女適林萬甲。曾孫以下不錄。嗚呼。居家有孝友之行。居鄕有愷悌之風。平生積累。內外無怨。壽隮大耋。螽斯蕃衍。文學不墜。天道福善。豈不信然。泰奎奉家狀。有不朽之托。余以鄉里後生。慕仰有素。不敢辭。